• 조선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강규형 명지대 정보기록과학대학원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시대정신이란 것이 있는가 보다.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한때에는 타당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촌스럽고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전락한다. 예를 들어 80년대에는 머리끈 동여매고 ‘무산자 혁명’이나 ‘위수김동’을 외치면 멋있었을지라도 이제 그런 행동은 정신 나갔다는 취급을 받기에 알맞다. 지난 20여년간 진보가 한국사회의 담론을 장악해 왔지만 이젠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다.

    진보는 개혁이란 단어와 결부돼 태생적으로 좋은 어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개혁과 진보가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실증한다. ‘한국형’ 진보의 진화 과정도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정치권력을 장악했건만, 요즘은 수구좌파라는 비난을 받으며 방향을 잃고 진영 내 상호비방과 책임회피가 난무한다. 국제주의를 선호하고 인권문제에 민감한 일반적인 진보정신과도 많이 벗어나 있다.

    한심하기는 보수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의 보호라는 온실 속에서 자란 한국의 보수는 ‘오렌지족’ 수준의 기득권 지키기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들판형’ 보수를 자임하는 뉴라이트 운동이 “따듯한 가슴을 가진 보수”, “생각하는 혁신 우파”를 주창하며 등장했다.

    며칠 전 뉴라이트 재단의 정책위원회는 ‘2008 뉴라이트 한국보고서’라는 정책비전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면서 비만정부에서 알뜰정부로의 변환, 경쟁을 촉진하는 공정거래 정책, 파격적 외국투자환경 개선, 국익위주 외교전환 등의 처방책을 내놓았다. 한반도선진화재단도 ‘선진화 국정과제’ 보고서를 제출하며 대안을 모색했다.

    한편, 진보는 어떠한가? 한국의 진보는 그동안 ‘진부(陳腐)’한 진보의 수준을 넘어 파괴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일례로, 대나무밭 하나 없는 서울 도심에서 죽창이 난무하는 불법 폭력시위를 저지르고도 단지 “우발적이었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다행히 새로운 진보를 향한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지속 가능한’ 진보를 표방한 ‘바른정책포럼’의 태동은 범여권 내에서의 변화로 이어졌다. 김영춘 의원은 새로운 성장동력, 대외경쟁력 제고, 북한 인권문제 등 각론에 약한 집권당의 시대착오적인 좌파적 요소를 질타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로 시작된 자성과 대안모색에서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포퓰리즘을 이용해 지지층인 수구좌파에 기대며 고립주의 노선을 견지할 수도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FTA를 이뤄냈다. 보수정권 하에서는 이루기가 훨씬 힘들었을 업적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리처드 닉슨이 공산 중국과의 화해를 쉽게 이뤄냈던 것처럼, 자주와 진보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부는 비교적 순탄하게 한·미FTA를 이끌어낸 것이다.

    같은 당내에서도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유시민 장관이지만, 그의 국민연금개혁 노력도 옳은 방향이라 하겠다. 미래세대를 위해 진보의 관행을 깨는 연금개혁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원래 진부한 진보는 미래가 어찌 되건 일단 많이 거둬 많이 시혜하는 데 혈안이 된다. 1960년대 존슨 행정부는 종합사회복지 체제였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미래에 미미한 수준의 적자가 발생할 것이라 선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미국도 감당하기 힘든 파멸적 재정적자였다.

    또한 열린우리당 정세분석국장을 지낸 고한석 씨도 최근 적진(敵陣)인 뉴라이트 계열의 ‘시대정신’ 봄호에 새로운 진보의 구체적 방향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공평한 경쟁체제 수립, 주주자본주의 옹호, 북한인권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필연적인 세계화에 대한 현실적 대비를 주문했다.

    공무원 수를 더 늘린다는 최근 보도는 실망이지만, 전체적으로 진부한 진보의 시대가 마감되는 징조가 보인다. 수구보수와 수구진보, 둘 다 이제 생명력이 다했다. 그러기에 지금이야말로 보수, 진보가 공히 ‘알 껍질을 깨고 나가는’ 고통과 희열 속에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호기이다. 양쪽 다 더 높이 날면서 한국사회를 업그레이드시켜라. 갈매기 조나단이 말했듯이 “더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볼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