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이훈범 논설위원이 쓴 칼럼 '이해 못할 두 가지 의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과문한 탓이지만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이해 못할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는 이유고, 또 하나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지 않는 이유다. 과격한 표현인지라 오해가 없도록 순화시켜 보려 해도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첫째 의문은 우리 사회의 모진 평등의식에서 비롯된다. 우리처럼 평등을 종교처럼 신봉하고 있는 국민이 또 있을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속담이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현대 버전으로 이어질 만큼 우리의 평등주의 심성은 뿌리 깊다. 하긴 어느 나라 국민이 불평등을 기꺼워하겠나. 세상에서 가장 낙관적이라는 아프리카에도 '와벤지'라는 경멸 섞인 단어가 있다. 스와힐리어로 '벤츠 타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부유한 엘리트를 욕하는 말이다. 돈은 없어도 행복하기로는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부탄 국민 역시 경쟁에 노출되면서 불평등 스트레스가 높아 가고 있단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까지 평등해야 직성이 풀린다. 경쟁자 간의 능력과 노력이 차이 나는데도 결과가 다르면 정부가 개입해서라도 평등한 분배를 이뤄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주의 체제에 딱 어울리는 모습 아닌가. 결과의 평등을 국가 권력으로 강제하는 체제가 사회주의 아니냔 말이다. 종합부동산세와 3불(不)정책이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도 달리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정책을 펴는 정부 인기가 바닥인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둘째는 우리 사회의 광범한 '미국 바라기' 현상이 주는 의문이다. 자녀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기 위해 낯 뜨거운 원정 출산 행렬이 이어지고, 가족이 깨지든 말든 자녀를 미국 학교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독수리.기러기.펭귄 아빠에 이어 그들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 아빠'까지 생겨났다. 때를 놓칠쏘냐, 외로운 엄마 새들을 노린 '불량 제비'들이 대거 미국으로 날아갔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의 어떤 도시엔 한 반의 절반이 한국 학생들인 고등학교까지 생겼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들은 한국 유머를 부모에게 해주는 정도란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들이 사회 전반을 꾸려 왔는데 독수리.기러기.펭귄에 뱁새 자식들까지 대거 귀국할 때가 되면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사뭇 걱정스럽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코스모폴리탄들이야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미국물이 들다만 '반쪽'들은 결국 놀이터가 한국밖에 없을 테니 하는 소리다. 이쯤 되면 자유무역협정(FTA)이랄 것도 없이 아예 미국의 한 주로 편입돼 세계 유일 초강대국 시민으로 행세해 보자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한데 들리는 건 반미(反美) 목소리밖에 없으니 그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주의와 미국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평등을 의미한다면 미국은 자유의 상징이다. 그런데 사회만큼이나 개인에게도 그 둘이 혼재돼 있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 사회에 분명 그런 이율배반적 속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돈이 되는 아파트 청약이라면 사흘 밤낮을 노숙할 각오가 돼 있으면서 남의 아파트값이 오르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고교 평준화에 찬성표를 던져 놓고 명문고 갈 실력이 안 되는 제 자식은 훌쩍 외국으로 보내 버린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한쪽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민주주의 이상이고 기본원리다. 그것은 양자를 조화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지 자기 이익에 따라 한번은 평등을, 한번은 자유를 주장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오래 그리 해오지 않았던가. 그런 사이, 기회의 불평등으로 사회는 점점 더 양극으로 분절되고 자유로써 지켜야 할 효율성.다양성.수월성(秀越性)의 가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지지 않았나 말이다. 이러다가 독일 격언대로 유일하고 진정한 평등은 오직 묘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