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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정치 쇼는 하지 말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양상훈 논설위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려 한 사람이다. 그런 클린턴이 1994년 10월 18일 제네바에서 단순한 북한 핵 동결과 경수로 제공을 맞바꿨다. 북한이 이미 만든 플루토늄에 대해선 알아보려는 시도도 안 했다. 제네바 합의 직후 클린턴은 “한반도 핵 확산 위협의 종식에 기여할 것”이라고 자신의 업적을 적극 홍보했다. 클린턴을 급하게 만든 것은 다음 달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였다.
북한은 미국에 핵 동결을 약속한 직후 파키스탄 칸 박사의 도움을 받아 고농축우라늄 개발에 들어갔다. 1998년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할 때는 수십명의 과학자를 보내 참관케 했다. 제네바 합의 당시 미국측 대표였던 갈루치는 “북한은 핵개발 포기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했었다. 그는 이제 와서 “속았다”고 하고 있다.
제네바 합의 때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의 근원적 해결과 한반도의 안정 및 평화유지를 위한 기반이 마련됐다”고 거창하게 자평(自評)했다. 다음 날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은 “갈루치에게 술 한잔 내야겠다”고 했다. 당시 한국도 지방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후 12년 만에 북한이 결국 핵실험을 했다. 일부러 작년 11월 미국의 중간선거 직전에 핵을 터뜨렸다. 중간선거 패배로 궁지에 빠진 부시는 북핵에서라도 한 건을 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지난 13일 베이징 6자회담 공동성명이다.
부시 대통령은 공동성명 바로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이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극동(極東)에서의 외교적 진전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업적 홍보를 시작했다. 칭찬에 목말라 있던 부시팀은 자기들끼리 서로 칭찬 릴레이도 하고 있다. 조지프 바이든 미 상원의원의 말대로 이 정도의 합의라면 몇 년 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걸 안 하다가 선거에서 지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의미 부여를 하느라 법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6자회담 후 이탈리아 동포간담회에서 “핵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핵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 대통령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해결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재정 통일부장관은 “결정적 전환점”이 왔다고도 했다. 대선을 앞둔 여당은 13년 전 민자당보다 몇 배 더 들떠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자고 나서고 있다. “민족적 경사” “귀중한 설 선물” 등 잔치 분위기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제네바 합의 때와 다를 게 없다.
이번 6자회담 공동성명은 의미가 있다. 공동성명대로 북 핵시설 불능화(不能化)가 정말 이뤄진다면 북핵 폐기를 향한 진정한 첫걸음을 뗀다. 그러나 ‘불능화’가 된다 해도 남은 길은 너무나 멀다. 북한 강석주,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우리가 포기하려고 그 고생을 하며 핵무기를 만든 줄 아느냐”고 했다. 미국 오버도퍼 한미연구소장처럼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점점 늘고 있다. 중국의 거물 전문가 왕지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장은 “미국은 북핵 폐기가 아니라 북핵 이전 방지로 금지선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핵실험을 실시하고 핵폭탄을 포기한 나라는 역사상 하나도 없다. 우리는 북한만 예외로 만들어야 한다. 이 험난한 길을 눈앞에 두고 국가의 책임자들이 우국(憂國)의 시름에 빠진 것이 아니라 웃고 떠들면서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정치 세력이 선거를 앞두고 무엇이든 정치적으로 이용해 보려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북핵 문제만은 그럴 수 없다. 북한의 핵폭탄은 한국과 미국의 역대 정권들이 북핵 폐기와 국내 정치가 뒤섞인 목표를 갖고 우왕좌왕하다 만들어낸 산물이다.
13년 전 제네바 합의 때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북한이 합의를 어기면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제 핵실험까지 했는데도 응징은커녕 얻는 게 더 많다. 북핵을 없애려면 한·미는 정치 쇼부터 그만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