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에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전 연세대 특임교수가 쓴 <정말 듣기 거북한 ‘또 그 소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시골살이를 끝내고 상경한 것은 1975년, 만 40세 되던 해다. 그런 어느 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어사전을 뒤적이다 우연히 ‘초로(初老)’란 항목에 눈이 갔다. ‘노인의 지경에 들어서기 시작한 나이. 본래 40세의 별칭’이라 풀이되어 있지 않은가! 사십이 불혹(不惑)임은 알고 있었지만 초로는 금시초문이었다. 젊어 보지도 못한 채 노인이 되다니! 삶과 청춘을 박탈당했다는 느낌이었고 박탈범의 혐의가 있는 타자와 사회에 분노가 일었다. 충격은 이내 막막한 허망감으로 변했다. 아아, 한세상이 이렇게 가는구나!

    이러구러 30년이 흘렀고 운이 좋아 대과 없이 퇴임을 맞았다. 유유자적을 자처하지만 그렇게 안 보이는지 허전하지 않으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많다. 홀가분하기 짝이 없고 생애 최고의 나날이라고 말하지만 곧이 안 들린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틀림없는 진실이다. 늙어 가는 거야 서럽지만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란 생각은 즐겁다. 직장이 있을 때는 매여 있는 몸이요 머슴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부리는 어엿한 주인이다. 객체가 주체로 승격한 것이다.

    중(中)대륙보다 잘살았던 적 있었나

    개인차가 있겠지만 노년이 안겨 주는 축복의 하나는 관대해진다는 점이다.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전보다 너그러워진다. 하잘것없는 삶을 보냈다는 자의식과 연결된 것인지 모르지만 웬만한 일은 불문에 부친다. “인간 본성이라는 비뚤어진 결의 재목에서 반듯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칸트의 말에 감복하고 있다. 이런 화해적 심경 때문인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선 심신의 큰 변고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한다. 우리 사회에서 평균수명이 높아진 현상과 연관된 것이지 개인적 행운만은 아니다. 또 일용할 양식을 구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 감사한다. 우리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어서이지 꿀벌처럼 부지런했기 때문은 아니다. ‘배곯아 죽은 귀신은 있어도 배 터져 죽은 귀신은 없단다. 더 먹어 둬라’란 소리를 수없이 듣고 자라난 세대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 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요즘 젊은이는 이런 속담의 뜻을 모를 것이다. 북으로 간 시인이 노래했듯이 ‘가도 가도 붉은 산’이던 고향산천이 화려 강산으로 변모한 일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특수한 경우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시골 중학 동기생의 모임에 가면 젊을 때 상상보다 훨씬 넉넉한 노후를 보낸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라느니 배신의 역사라느니 하는 소리를 접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역사와 비교해서 한국의 역사를 폄훼하는가? 남들이 세계적 성공작이라고 평가하는 산림녹화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닌가? 정당성을 얻는 것이 아닌가? 고려조 이후 1000년간에 언제 우리가 중국 대륙보다 유족한 생활을 한 적이 있는가?

    초고속 산업화나 평균수명 연장이 우리 현대사를 전적으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늘진 구석과 참혹한 부분도 허다하다. 그러나 베냐민의 말대로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상처 없는 영광이 어디 있는가? 중요한 것은 플러스 성과와 마이너스 효과를 견주어 보는 균형 잡힌 판단이다. 어떤 역사 해석도 다수 경험자의 역사적 실감을 능가하지도 능멸하지도 못한다.

    호국-산업-민주 세력 모두의 공

    삶 경험이 얕고 이상주의로 흐르는 젊은이가 치욕의 역사라고 흉내 내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간다. 살 만큼 살아 세상물정을 알 만한 사람, 성공적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며 권력 주변에서 호의호식하는 인사들이 치욕의 역사 운운하는 모습은 정말로 듣기 거북하다. 그들이야말로 사회적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동어반복을 일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된 것은 전시의 호국(護國) 세력, 산업화 세력, 민주화 세력으로 참여한 인적 자원의 노력 때문이다. 이들 중 누구도 사회적 공로의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