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은퇴 가이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무엇을 할지 구상 중인 모양이다.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은퇴문화를 새롭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생각을 가다듬고 계신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참모들에게 외국 사례도 찾아보라고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언론운동, 국회의원 출마, 당 고문, 농촌 복원운동 등등을 거론했다.

    외국 사례를 보면 노 대통령이 택할 수 있는 길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평범하고 무난한 스타일을 원하면 ‘고향집에 돌아가 회고록 쓰기’가 최고다. 세계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이 길을 택했다. 전직 국가 최고지도자가 책을 쓰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역사에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퇴임 후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책을 쓰는 게 좋다. ‘전직(前職)’으로 밀려난 후의 허탈감을 달래주고, 자신이 임기 동안 한 일을 한 발 떨어져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잘 하면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도 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엄청난 선인세(先印稅)를 벌 수도 있다.

    둘째, 정치를 포기하지 못하는 체질이라면 정치를 계속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실패율이 높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퇴임 후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사냥 여행을 갔다. 그러나 1년 만에 돌아와 후임 대통령이 잘 못하고 있다면서 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가 실패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 재판을 받았던 앤드루 존슨도 죽을 때까지 정치를 붙들고 늘어졌다. 당을 바꿔 대선 후보에 도전했고 상·하원 선거 각 한번씩 나섰으나 다 실패했다. 세 번째 도전에서 상원 의원에 당선됐지만 5달 만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셋째, 최신 트렌드를 따르고 싶다면 국제 무대에서 자선·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은 재임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퇴임 후에 더 빛났다. 카터는 평화운동과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탄핵될 뻔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도 클린턴재단을 세워 AIDS 퇴치운동과 인종 간의 화해를 위한 활동을 펴고 있다.

    그외에도 허버트 후버처럼 취미생활인 낚시를 즐기며 관련 책을 낸 사람도 있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처럼 뒤늦게 적성에 맞는 공직인 대법원장으로 일한 경우도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은퇴 후 평판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하나는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을수록 은퇴생활이 성공적이라는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유능한 대통령이었지만 퇴임 후 대통령에 재도전하다가 스타일을 구겼다.

    또 다른 하나는 실패한 대통령들이 퇴임 후 더 극성스럽게 활동한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인 네이슨 밀러는 ‘자기 기만(欺瞞)’이 대통령의 직업병이라고 했다. 이 병을 못 고친 무능한 대통령일수록 명예 회복과 자기 변호에 여생을 바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은 은퇴 후 책을 7권이나 썼다. 앤드루 존슨도 선거 승리가 명예 회복 수단이기라도 한 듯 세 번씩 도전하며 발버둥쳤다. 퇴임 후에도 계속 국민의 관심을 요구하며 부담을 줬던 것이다.

    임기 중 실패한 대통령을 견디는 것만도 고생인데, 퇴임 후에까지 무능한 대통령의 자기 정당화를 봐야 한다면 정말 고역일 것이다. 노 대통령이 벌써 신(新)은퇴문화를 모색 중이라는 말을 들으니 퇴임 후에 임기 중 실패를 변호하는 극성맞은 활동을 보게 될까 두렵다. ‘지도자가 길을 잃고 헤매면 국민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는 영국 속담이 추위보다 더 매섭게 파고드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