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권 여당의 집안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브리핑에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린 후 여당 내 갈등은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 때는 그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결속력이 강해 보였던 열린우리당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물론 노무현 정권 3년 반의 총체적 실패로 인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끼리 못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노선투쟁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열린우리당이라는 배가 난파 직전에 이르자 서로 살아보겠다며 어제까지 함께 노를 젓던 사람들끼리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나라 일을 제치고 우리가 살 길만 찾는 것처럼 국민에게 보일 때 국민들은 더욱 우리에게 실망할 뿐”이라며 “대통령의 서신 이후 당원들까지 나서 공개적인 문제로 확대되는 조짐이 있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제 살 길 찾는 것’에서 비켜나 있다는 말인가. 

    김근태 의장도 6일 “당 사수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본질과 무관하다. 국정 실패를 인정하고 새 출발할지, 아니면 구차하게 변명하고 합리화할지가 핵심이고 쟁점”이라고 말했지만 열린우리당 간판을 내리고 통합신당의 새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머릿속에 ‘어떻게 하는 것이 그간의 실정을 바로잡고 국정을 바로 이끄는 길인가’라는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어떻게 하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까’라는 정치공학적인 수읽기만이 있을 거라고 보는 사람이 압도적일 것이다. 물론 통합신당 반대파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살아남기’ 차원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신문광고를 보면 도대체 노 후보가 어느 정당 후보인지를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새천년민주당’이라는 글자는 귀퉁이에 깨알만한 글씨로 박혀 있어 웬만한 시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좀처럼 눈에 띄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소속한 정당이 부끄러웠거나, 그 정당의 이름으로는 득표에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속 정당을 애써 감추려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 후보는 김대중 정부, 아니 민주당 정부 5년의 성적표가 자신에게 불리하므로 철저하게 민주당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지난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만 있고, 새천년민주당은 없었다. 민주당 정권 5년의 공과(功過)는 사라진 채 후보 간 인기투표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참담한 국정 성적표다.

    기본적으로 선거는 심판이다. 정당정치에서 선거는 정권의 공과에 대한 심판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책임정치는 설자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정당정치와 책임정치의 실종을 초래한 셈이다. 열린우리당은 그걸 되풀이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통합신당과 관련, “구(舊) 민주당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며 “우리당의 진로와 방향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정책과 노선을 어떻게 변화·발전시킬 것인지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예의 야당 탓, 언론 탓, 심지어 여당 탓까지 나열해 실소를 금할 수 없게는 하지만 적어도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지역당으로의 회귀는 안 된다는 지적만큼은 그 진정성 여부와 상관없이 흘려보낼 수 없는 대목이다. 바로 책임정치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지금의 간판을 그래도 유지한 채 대선과 총선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 책임정치가 살고 진정한 정치발전을 기할 수 있다. 만일 간판을 바꿔 내걸어 열린우리당 정부 5년의 실정을 감춘 채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그들에게는 축복일지 모르지만 국민에게는 재앙이다. 반대로 지금의 간판으로 심판을 받는다면 설혹 선거에서 질 지는 모르지만 책임정치를 이룬 공로는 인정받을 것이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죽어야 산다. 문제는 여당의 머릿속에 책임정치라는 개념이나마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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