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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홍준호 선임기자가 쓴 '정치적 IMF'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이틀째 농성하던 엊그제 저녁, 여당 의원 대부분은 의사당 밖에 뿔뿔이 흩어져 자기 볼일을 봤다. 그날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처리하겠다고 밝힌 당 방침과는 너무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때 만난 여당 비대위의 한 중진의원. “우리는 전효숙씨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예산안이라면 몰라도 헌법재판소는 지금 대행체제로도 잘 굴러가는데 무리할 이유가 무엇인가. 야당이 몸으로 막고 대통령도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면 내년 대선까지 계속 이런 상태로 갈 수도 있다.”
여야는 하루 뒤 동의안 처리를 뒤로 미룬채 국회 일정에 임하기로 했다. ‘전효숙 동의안’의 장기 표류가 실제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의 권력 누수가 더 심각해지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한 의원은 “그건 더이상 여당의 관심이 아니다”라고 아주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를 묻는 한국갤럽 조사에서 ‘대통령이 잘못한다’는 응답은 76.4%로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슷했다. 이런 민심 이반 현상이 국회에 투영되고 여당 안으로까지 널리 번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번 ‘전효숙 사태’이다.
엊그제 정부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그날 여당의 정동영 전 의장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강남 집값잡기는 강남 부자들에게 보조금을 준 결과가 됐다”고 했고, 이튿날 천정배 의원은 “중산층과 서민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박탈한 것은 정부 여당의 가장 뼈아픈 과오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은 노 대통령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만든 핵심이다. 마땅히 ‘정부가 추가 대책을 내놓았으니 믿고 따르자’고 설득해야 할 입장인데,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정치권 앞에서 청와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대통령은 제1야당과 타협점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여당을 설득해 힘으로 밀어붙이도록 하지도 못하고, 다른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리더십의 실종, 정치적 IMF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과거 정권에선 임기 말 리더십의 공백을 여당이 대신 메워 주었다. 차기 대선 주자들이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정국의 균형을 잡아 주었다. 열린우리당이 지금 그 역할조차 못하는 것은 이른바 차세대를 자처한 이들이 노 대통령과 함께 동반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전 의장은 최근 자파(自派) 모임에서 “우리가 강정구에 올인했던 것은 잘못이다. 강 교수에게 불구속 수사의 잣대를 대야 한다고 말했으면 그 잣대를 정몽구 회장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밥그릇 문제를 해결 하는데 나름의 공헌이 있는 기업 총수를 잡아 넣으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 장관, 여당 의원들이 줄줄이 나선 것이 민심 이반의 상징적 요인이 됐다는 취지로 들렸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정 전 의장은 공개적으로 “4대 입법(보안법, 사학법, 과거사법, 신문법)이란 모자를 잘못 썼다”고도 말했다.
당 의장으로 두 차례 전국 선거를 이끈 정 전 의장은 이 정권의 국정 기조 자체를 부정하는 데 가까운 참회(?)를 통해 새 길을 찾으려는 것일까? 한때 현역의원으론 유일한 노 대통령의 동지였던 천정배의원이 여당 해체를 말하는 것 역시 탈(脫)노무현의 자구책으로 읽힌다. 그러나 노 대통령을 공격한다고 이들을 향한 눈길이 고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은 노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하라” “향후 정계개편에선 빠져라”란 역풍도 분다.
여당 의원들은 노 대통령의 리더십의 공백을 메워줄 유력한 차세대가 없는 현실을 놓고 “이렇게 사람이 없는가”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우선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정파들을 묶는 작업을 하면서 누군가 대선후보로 떠오르길 기대할 도리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도무지 집권당이라고 말하기 힘든 지경이다. 앞으로 1년 넘게 이어질 정치적 IMF 상태가 나라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홍준호·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