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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종호 논설위원이 쓴 <'적화'와 '통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히며 소개합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대표적 저서 중에 하나가 1965년에 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최근 한글 번역본이 나온 그 책의 부제는 ‘악(惡)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아렌트가 지적한 ‘ 악의 평범성’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그 적실성이 확인되고 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상당수의 시민, 나아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수호를 앞장서서 강조하는 일부 사회 지도층까지 알게 모르게 북한의 이념과 적화통일 전략에 결과적 으로 동조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 학살을 실행한 책임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포로수용소를 탈출, 아르헨티나에서 15년간 은둔한 끝에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돼 그 이듬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1년 이상 진행된 그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가 발견한 것이 악의 평범성이었다. 그토록 끔찍한 집단학살을 자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은 ‘악의 화신’ 아이히만이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악은 외견상의 그 평범성으로 인해 실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본질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한지를 적시는 물처럼 점진적으로 슬며시 스며들어 어느새 사회 전반을 악으로 물들여가는 과정은 악에 대한 불감증을 키우기도 한다. 악이 일반화해 가면 더 그렇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 명의 죽음은 단지 통계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아이히만 의 궤변이 현실이 된다.
주민 수백만명을 굶어죽게 한 북한 정권의 ‘범죄’마저 대수롭 지 않게 여기는 현상도 그런 이유로 빚어진다. 그 규모와 참혹함의 정도를 가늠하기조차 두려운 핵 재앙까지 위협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북한 정권의 코드에 스스럼없이 발맞춰주는 행태도 마찬 가지다. 구체적 개인 아닌 사회나 국가 전체에 대한 위해(危害) 역시 결국 개인 모두에 대한 위해임에도 눈앞의 현실 아닌 관념 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악의 실체를 제대로 실 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는 사이에 악의 그림자는 대한민국 사회에 영역을 넓혀 지배력을 확산시킨다. 그 확산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이른바 ‘386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의 승용차에서 ‘21세기 영도자 김정일 장군께 우리 청년 전사들은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북한 당국에 보내는 충성결의문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 피의자가 “ 인터넷에 가면 어디든 있는 것”이라며 “그게 왜 내 트렁크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반발했다는 것은 그가 직접 작성한 문건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악의 만연을 뒷받침한다. 오죽하면 현직 국가정보원장이 “국민의 국가안보관이 너무 해이해져 있다”며 “그러면 북한이 저쪽 사회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우려했겠는가.
북한 지령을 받은 간첩만 위험한 게 아니다. 간첩은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명백한 의법 처벌 대상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을 붉은 이념으로 물들여 북한 체제에 동화시키려는 북한 정권의 야욕을 결과적으로 거드는 언행의 만연은 더 심각한 위험 요인이다. 합법 정당의 대표가 평양 도착성명을 통해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전쟁을 일으켜 보겠다는 미국과 일본의 준동이 계속되고 있다”며 북한을 대변하다시피 한 것도 그렇고, 공공연히 국가정보원 해체를 주장하는 일각의 행태도 그렇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도 그런 위험 요인에서 벗어 나기 어려울 것이다. 시중에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을 뿐 대한 민국은 이미 적화됐다”는 말이 떠돈 지가 어제오늘이 아닌 현실에 집권 세력은 물론 시민 모두가 무심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