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가 쓴 '무(無)DJ 무(無)호남?'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준동하지 마시오 필자에게 가끔 배달되는 e-메일 중에 '조영탁의 행복한 경영이야기'가 있다. 주로 경영이나 처세에 관한 경구.일화를 소개하는 메일이다. 2일 현재 69만6662명이 메일을 받아 보고 있다니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청와대가 외교.국방라인 개각을 발표한 1일 배달된 '행복한 경영이야기'가 소개한 글의 제목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전문은 이렇다. '많은 이들이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갈채를 보내고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 당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바보들이 동의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무시한다면 적어도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해도 좋다. 적어도 당신이 현명한 행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E W 스크립스)'

    E W 스크립스는 UP통신사(UPI통신의 모체) 설립자이자 많은 일간지도 거느렸던 미국의 미디어 제왕이다. 괴짜 기질이 있는 탁월한 경영인으로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결코 오늘 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필자는 메일을 보낸 조영탁씨를 잘 모르지만(휴넷 대표라고만 들었다), 그가 보내준 짧은 글을 읽은 순간 "조 대표는 정치감각이나 유머감각, 둘 중 하나는 탁월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긋지긋한 회전문 인사, 여당에서조차 떨떠름해하는 개각을 치켜세웠다면 특정 정치감각이 발달한 것이고, 개각을 통렬하게 비꼬려고 이 글을 선택했다면 수준급 블랙유머 아니겠는가. 이번 개각을 보고 소련에서 유행했던 유머를 떠올렸다는 사람도 있다.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한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자, 우리 이제 정치 얘기는 그만 합시다."

    역대 정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던 정치인 관련 블랙유머가 노무현 정권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차마 지면에 옮기기 민망한 것도 많다. 최근에는 '누구 앞에서는 충신, 누구 앞에서는 소신, 누구 앞에서는 당신, 부동산 앞에서는 등신…'이라는 '8신'시리즈도 나돌아다닌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유행하던 유머의 확대 수정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가 없는 정치인도 백 가지 일을 다 잘못하지는 않는다. 10월 9일(북한 핵실험) 이전과 이후의 천지개벽에 가까운 정세 변화를 여전히 '찍어 먹어 보아야 알겠다'는 식으로 대처하는 답답한 정권을 한탄하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블랙유머를 즐길 때조차 나는 그가 그나마 잘한 일도 있다는 점만은 잊지 않는다. 있어야 할 '권위'마저 없애서 탈이지 '권위주의'는 거의 사라졌다. 사회 곳곳이 투명해졌고, '돈 정치'는 발붙일 곳을 잃었다. 권력이 아래로 지방으로 대폭 분산됐다. 가장 업적으로 쳐주고 싶은 대목은 역시 지역주의 불식이다. 특히 인사에서 노 정권만큼 지역주의를 배제한 정권은 이제까지 없었다. 온갖 비난이 쏟아진 이번 외교안보팀 개각에서도 적어도 지역주의는 도마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호남 무국가(無湖南 無國家)" 발언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근 행동거지는 노 정권이 이룬 몇 안 되는 공적마저 헐어버리는 반시대적.반역사적 행태에 해당한다. 나는 DJ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무엇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DJ가 호남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그가 호남 출신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이며, 아직도 지역주의의 달콤한 반대급부를 못 잊고 그리워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현실정치에는 일절 개입않겠다"는 속보이는 입발림까지 내놓다니. 온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태도 아닌가. 이번 기회에 DJ를 상징하는 인동초(忍冬草)도 다른 풀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지역주의를 들쑤시고 다니니 세상 어딘가에 '준동초(蠢動草)'라는 풀이라도 있다면 대신 선사하고 싶다. DJ가 없으면 호남이 없는가. '무DJ 무호남'인가. 앞서 인용한 E W 스크립스는 이런 말도 남겼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해야 할 것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