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허동현 경희대 사학과 교수가 쓴 '100년 전의 한반도가 생각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오대주(五大洲) 사람들이 다 조선이 위태롭다 하는데 조선인들만 절박한 재앙을 알지 못하니, 집에 불이 난지도 모르고 재재거리는 처마 밑 제비나 참새 꼴과 무엇이 다르겠소.” 1880년 청국 외교관 황준헌이 국제정세에 무지한 조선왕조 당국자들에게 던진 ‘연작처당(燕雀處堂)’의 경구는 한 세기를 훌쩍 넘어, 핵실험이 자행된 오늘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에 비수로 꽂힌다.

    “조심스럽게 공경하는 행실을 보이고 강직하게 인의(仁義)를 말해 일본인들이 고집스럽고 편협하게 대하더라도 우리는 관대하고 후하게 대했다.” 강화도조약(1876) 체결 후 일본에 간 수신사(修信使) 김기수가 남긴 말이다. “이웃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해 이웃이라 봐줄 것이 아니라 서양인의 방식에 따라 대해야 한다.” 갑신정변(1884) 직후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탈아론(脫亞論)’의 한 구절이다. 그때 우리의 실패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이미 서구 열강을 흉내 내는 아류(亞流) 제국주의로 표변한 상황에서 도덕률에 기초한 교린의 의례(儀禮)외교는 무용지물이었듯이, 북한의 핵무기가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오늘 ‘민족’의 허명으로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은 물거품처럼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잘못된 처방전임이 분명해졌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현한 동맹국들, 이를 따라 배우려 하지만 경쟁관계인 비동맹국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불량국가들로 세상을 삼분해 협력·경계·적대하는 탈냉전적 전략을 구사하는 마당에, 주변국에 대한 정책을 민족통일에 적대적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양분하는 ‘자주’ 외교도 우리 목을 조이는 자충수임이 명약관화하다.

    미국의 눈으로 볼 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미 실현했고,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와 대테러 전쟁에 보조를 같이해 이라크에 파병했으며, ‘두 나라 젊은이들의 피로 봉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을 맺은 한국은 분명히 동맹국이다. 전작권과 미군의 자동개입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미국을 졸라 얻어낸 한·미동맹은 어찌 보면 ‘굴욕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대로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을 발판으로 반세기 이상 평화를 누리고 경제번영과 다원적 시민사회도 일구어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위협을 일삼는 불량국가 북한을 ‘민족’의 이름으로 감싸안아온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의혹을 자아낸다.

    ‘자주 동맹’과 ‘민족 공조’라는 이도 저도 아닌 참여정부의 모순적 대미·대북정책은 포유류와 조류의 싸움에서 이편 저편을 오간 박쥐의 행동과 진배없어 보인다. 이러한 회색빛 정책의 대가가 핵위협과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 자랑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위협에 스스로 대처해 보라는 미국의 질책이기도 하다. 세계 굴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었다 한들 미국의 핵우산 없이는 북한의 핵 위협에 무방비인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기에, ‘자주’가 종속을 부르는 자가당착을 범한다.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어온 바 자주독립하는 제국이니라.” 홍범14조(1895)와 대한국국제(1899)의 제1조가 외친 ‘자주’의 수사(修辭)가 외세가 겨눈 창 끝에서 나라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가 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된 개화기 이래 북한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열강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난 역사는 주변국의 동향에 대한 위정자들의 오판과 무지가 어떤 참극을 빚는지를 증언한다. 구시대의 낡은 발상을 벗어나지 못한 전략이나 ‘자주’의 레토릭만으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우리의 활로(活路)를 열 수 없다는 역사의 경고를 되새길 때가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