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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대통령이 국민을 이긴 나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부시 회담이 끝났다. 이제 손익(損益)계산서를 뽑을 차례다. 노무현·부시 회담에선 의미 있는 합의와 메아리 없는 소리가 각각 한 가지씩 있었다. 의미 있는 합의 하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 6·25의 그 일요일 새벽처럼 북한이 불시(不時)에 대한민국을 공격해 휴전선이 뚫리고 서울 거리에서 탱크전이 벌어질 경우, 국군이 주한미군과는 별개로 독자적 전시 작전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 한미연합사는 간판을 내린 지 오래다. 메아리 없는 소리 하나는 ‘6자회담 재개 방안을 논의하는 마당에 북한에 대한 새 제재를 이야기할 건 없다’는 한국 대통령의 외로운 발언이다.
부시는 전작권을 한국에 넘기기로 했다면서 “이 문제가 정치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는 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말했다. 그 곁에서 한국 대통령은 “아주 좋은 답변이었다”고 박자를 맞췄다. 미국은 내줘서 아쉬울 게 없고, 한국은 내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전작권 문제는 기본적으로 전쟁과 전쟁의 최고 목표는 무엇이냐에 관련된 것이다. 역사의 풍상(風霜)을 이겨낸 증인만이 ‘동북아 균형자’라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설계했던 이 정권의 책상물림 도토리 전략가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
2차대전을 진두지휘해 나치 독일을 패퇴시켰던 윈스턴 처칠의 1939년 5월 13일 국회 연설이다. “우리는 바다에서, 땅 위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승리, 어떤 공포도 이겨내고 승리,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승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전쟁이고, 전쟁의 목표다. 처칠은 이 승리를 위해 영국군 최고의 명장으로, 미국인을 열등국민 취급을 하며, 미국군의 지휘를 받는 것을 그렇게나 혐오했던 몽고메리 원수(元帥)를 미국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의 지휘 아래 집어넣었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접고 승리를 위해 영국군 독자(獨自) 작전지휘권을 내준 것이다.
한국 대통령은 처칠과 정반대의 거래를 했다. 4700만 전체 국민의 목숨이 걸린 절대적 전쟁 억지책(抑止策)을 자주(自主)라는 정체 불명의 개인적 자존심과 맞바꿨다.
더 많은 세금을 내 더 많은 미국 무기를 사들여야 하고, 그러면서도 더 큰 안보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 회담으로 한국에 전쟁이 터지자마자 69만 명의 병력, 5개 항공모함 전단(戰團) 160척의 함정, 2500대의 항공기를 자동적으로 투입해야 한다는 짐을 상당 부분 덜었다. 언제든지 주한미군을 빼내 미국의 이해가 걸린 다른 지역에 투입할 행동의 자유와 비싼 무기를 더 많이 한국에 내다 팔아 더 큰 이익을 올릴 수 있는 덤까지 얻었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갑자기 미국측의 인사치레 몇 마디를 떠받들며 한·미동맹과 전시의 미군 자동 증원은 요지부동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릴 역사적 녹음 테이프가 있다. 1939년 히틀러의 으름장에 굴복해 조약상의 의무를 내던지고 체코의 운명을 히틀러의 먹이로 던져줬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이다. “우리와 가깝지도 않은 저 먼 나라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려 왜 영국 국민이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써야 합니까….” 오늘의 미국이 언제까지 그때의 영국과는 다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 제1차 대전, 제2차 대전 때 영국 편에 뛰어든 것은 조약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를 팽개쳐 버렸던 것도 조약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공통 가치와 상호 신뢰와 상호 이익이 실려 있지 않은 조약이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새 제재조치에 반대한다는 한국 대통령의 또 다른 자주를 위한 투쟁은 길게 언급할 의미도 없다. 회담 며칠 전 미국이 이미 190개 유엔회원국들에 대북 추가제재 조처에 동참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래도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은 의기양양하다. 대한민국 국군을 만들고 키워온 사람들, 대한민국 외교를 짊어져 왔던 사람들, 대한민국 치안을 담당해 왔던 사람들, 무엇보다도 최고의 전쟁 억지책을 자주라는 허깨비와 맞바꾸는 것을 반대해 왔던 절대 다수의 국민을 물리쳤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2006년 9월 15일의 대한민국은 나라와 국민은 지고, 대통령 혼자서 이겼다고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어처구니없는 나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