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최원석 국제부 차장대우가 쓴 '중남미 좌파와 한국 좌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중남미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라는 대통령이 있다. 공수부대원 출신으로 중남미 사회주의의 맹주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는 1998년 빈민층 지지로 당선된 후 미국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신 러시아와는 전투기와 소총을 수입하는 무역상담을 하고, 핵개발에 나선 이란과는 형제국 호칭을 주고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차베스 대통령의 베네수엘라를 지탱하는 돈은 미국을 상대로 한 석유장사에서 나온 것이란 점이다. 2004년의 경우 전체 수출액 250억달러의 72.8%인 182억달러가 미국에 판 석유 및 석유제품이었다. 2003년에 비해 48%나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집권한 후 미국에 ‘의존’하는 현상은 더욱 깊어졌다. 1998년 취임 당시 120억달러였던 석유 수출 세입은 작년 그 3배에 달하는 360억달러가 됐다.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에 수출하는 석유량을 꾸준히 늘려온 결과다. 반미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미국을 통해 돈을 버는 일이 반복, 강화돼 온 셈이다.

    좌파로 분류되는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빈민·노동운동가 출신인 그는 ‘공평한 분배’에 정치생명을 걸었다. 대학이라고는 문턱도 가보지 못한 그가 2002년 당선했을 때의 핵심 구호는 ‘끼니를 거르지 않는 브라질’이었다. “나는 나라의 부(富)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다. 언뜻 경제성장은 뒷전이고 분배만 챙긴다는 인상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행동은 다르다. 전임 우파정권이 물려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를 잡기 위해 그는 오히려 우파 정권의 정책을 더욱 강도 높게 집행했다. 수요억제 차원에서 공공부문 지출을 줄이고 금리를 인상한 것이 한 예다. 미국이나 유럽과의 관계도 예상과 달리 유지·강화됐다. 그는 “뭐 하러 미국·유럽과 싸우나. 한 가지(반 서방)를 포기하고 다른 것(경제)을 얻겠다는 생각을 할 때 더 많은 기회를 갖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성장이 뒤받쳐주지 않고는 나눠줄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는 얘기다.

    역시 좌파인 칠레의 미첼 바첼렛 대통령이나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오브라도르 야당후보도 그렇다. 올해 당선된 바첼렛 대통령이 한국·미국과 2004년에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취소하려 든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오브라도르 후보도 선거과정에서 미국과의 FTA를 일부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그걸 폐지하자는 입장은 아니다. 좌파들이 즐겨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FTA가 가져오는 폐해보다 이익에 더 눈을 돌리는 까닭이다.

    이것이 중남미 좌파의 실제 좌표다. 입으로야 무슨 소리를 하든 현실에서는 나라를 키우고 부를 늘리는 길을 택하려는 생각, 여기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좀 더 왼쪽으로 갔는지 아닌지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사고 중심에 정치나 명분보다 실익(實益)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누군가는 ‘실용주의 좌파’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변절한 좌파’라고도 한다. 그러나 타이틀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 이름이 뭐든 브라질은 국민총생산 규모에서 얼마 전 한국을 제치고 세계 11위로 올라섰다. 지금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고 있는 한국 좌파들이 눈여겨 봤으면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