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노대통령의 ‘진화론적 통일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워낙 다변이시라 그런지 간혹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도 세간의 반응이 없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6월 16일 노 대통령은 충남 계룡대에서 가진 전군 주요 지휘관과의 대화에서 남북한의 통일 방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까지) 국가연합, 연방제, 통일이라 했는데 경제 통합, 곧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며, 다음에 문화 통합, 그 다음에 정치 통합의 순서로 가야 한다. 이 시간은 아주 넉넉하게 잡아서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 요컨대 노 대통령은 경제 통합→문화 통합→정치 통합이라는 점진적이며 단계적인 통일론을 제시하였으며, 그러한 논리적 기초에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이 제시한 국가연합→연방제→통일이란 3단계 통일론을 사실상 기각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 좀 쑥스럽지만, 국가란 사회로부터 도출된 이차적 문명이다. 예컨대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국가 권력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것은 기원후 2, 3세기경이지만 한반도에 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수만 년을 올라가고 있다. 간혹 역사의 격변기에 국가가 먼저 생기고 사회가 나중에 생기는 듯한 현상이 나타나지만, 따지고 보면 이 경우에도 위와 같은 양자의 기본 관계는 불변이다. 그러니까 사회의 문명적 기초가 다른 두 국가를 연합이니 연방이니 하면서 하나로 붙이고자 함은 인류의 문명사가 걸어 온 기본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유전자의 구조가 다른 두 종(種)을 접붙이고자 함과 같아서 조물주의 섭리에 반하는 일이다.

    오늘날의 남한을 사유재산과 인권의 바탕 위에서 개인주의와 시장경제가 발달한 문명이라 한다면, 북한은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좌우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으면, 전근대 인류사의 여러 곳에서 꽤나 광범하게 존속했던 ‘국가적 노예제’가 가장 적합한 명제인 것 같다. 남북한의 문명적 기초가 이렇게 다를진대 문명의 정치적 통합체로서 국가를 어떤 식으로든 접붙이고자 함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원래 조물주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귀신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설이 지난 한 세대 간 남한의 지성계와 정치계에서 버젓이 발언권을 행사하고, 드디어 2000년에는 헌법이 규정하는 공론의 장과는 어떠한 교섭도 거치지 않은 채 북한 정상과의 공동선언으로 자신을 공식화하였음은 남한 사회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하나 문명의 내실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노 대통령이 넉넉히 시간을 두고 추진하자는 경제 통합→문화 통합→정치 통합의 3단계 통일론은 추가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보통의 상식에 기초한 것이어서 누구나 알기 쉽고 편안하다. 실은 통일 문제에 비전문가인 나도 진작부터 그러한 궁리를 하면서 ‘진화론적 통일론’이라 이름 붙여 온 터였다. 경제 통합을 노 대통령은 ‘먹고사는 것’이라고 쉽게 설명하였지만 실은 그것보다는 복잡한 문제여서 재화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경제 활동을 규율하는 시장제도를 같이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하 진행 중인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양국의 시장제도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가 논의의 핵심인 것과 꼭 같다. 그렇게 북한이 사유재산과 자유경쟁의 원리에 기초한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해 준다면, 위와 같은 진화론적 통일 방안은 누가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힘으로 스스로를 실천해 나갈 것이다.

    항간에서는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워낙 낮아 정권을 재창출하기 어렵기 때문에 집권세력이 북한 정권과 기왕에 발표한 선언에 기초하여 무슨 남북연합이라도 꾸밀지 모른다는 추론이 나돈 적이 있었다. 그래야 지난 대선에서처럼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이다. 그런데 금번에 노 대통령이 위와 같은 통일론을 펼침으로써 그것이 기우에 불과함이 판명되었다. 역시 광복 후에 태어나 인권과 자유의 물을 먹고 자라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그러한 넉넉한 신뢰감에서 제안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화론적 통일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