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김광일 문화부장이 쓴 '눈으로 보고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믿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존재를 확신하는 경우다. 종교적 신앙이 그럴 것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다. 둘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태도다. 철저한 합리적 실용주의자들이다. 세 번째로는 보이는 것도 안 믿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우리 삶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지도층에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구는 평평합니다.” 아마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다. 정신이상자의 헛소리쯤으로 치부될 테니까. 그러나 오늘날에도 지구가 LP판처럼 평평하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다.

    우리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한 국가를 움직이는 최고 정책결정 기관에서도 ‘현실’과 ‘진실’과 ‘믿음’은 전혀 별개인 것 같다. 스스로 옳고 정의롭다고 자처하는 개혁 만능주의자일수록 대체로 세 번째 믿음이 강하다. 그들 때문에 방향타를 잃은 현실은 기우뚱거리고, 진실은 더 멀리 안개 속으로 달아나버린다.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구가 둥글며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믿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종교재판에 회부됐을 때 그는 이미 70세 고령이었다. 천동설이 옳으면 어떻고 지동설이 옳으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결국 목숨을 건지는 쪽으로 타협했지만 그가 가진 ‘위험한 믿음’ 때문에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고 피렌체 자택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400년이 흘렀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들으면 지하에서 벌떡 일어설 만큼 놀라운 단체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FES’라는 조직이 있는데,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국제적 모임’(The Flat Earth Society)이다. 심심풀이 개그 단체가 아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하는지 ‘과학적인’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다.

    엊그제 한국에 번역 소개된 스티븐 킹의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도 “그들은 도무지 보고도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플랫 어스 소사이어티처럼 말이다”(129쪽)라는 구절이 있다.

    이 단체는 19세기 영국에서 시작해 미국에 터전을 잡았고, 현 회장은 찰스 존스로, 회원이 무려 3000명이나 된다. 이들은 지구가 북극을 중심으로 디스크 위에 있으며, 가장자리는 높이 50m의 빙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태양과 달의 지름을 대략 52㎞쯤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FES 관련 사이트들이다. 그곳에 들어가 보면 맨 먼저 나오는 글이 ‘제발 반론을 보내지 마시오’라는 주의사항이다. 반론은 필요 없으니 괜한 헛수고 하지 말고, 당신은 FES에 가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만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챔피언 판타지’ 같은 현상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옳음이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거꾸로 말하면, 명백한 실패를 직접 목격하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놓쳐도 자기네가 대통령 선거 같은 챔피언만 먹으면 한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챔피언 환상주의자들인 것이다.

    부동산 문제도, 교육 문제도, 빈부격차 문제도 그들의 정책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 앞에 벌어진 일들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상대의 반론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지구가 ‘평평하다’고 끝까지 믿어버릴 생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