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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적 전체주의 단계 접어든 북한

입력 2006-05-31 11:35 수정 2006-05-31 11:35

동아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 신문 객원논설위원인 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국제정치 전공)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6월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방북을 앞두고 우리 사회뿐 아니라 남북 당국 간에도 논란이 뜨겁다. 경의선 철도를 통한 방북의 경로와 형식이 갖는 상징성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남북관계의 본질적 문제가 흐려지고 있다. 햇볕정책의 실패는 ‘민족의 주술(呪術)’에 빠져 정치체제의 차이와 인류 보편적 가치를 무시한 철학의 빈곤에서 비롯됐음을 김 전 대통령은 직시하고 무리하게 방북을 추진하기보다 진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은 1978년 지하 팸플릿 형태로 발행된 ‘힘없는 사람들의 힘’이라는 글에서 공산 전체주의 국가의 성격을 새롭게 해석한 ‘후기 전체주의론’을 제시했다. 이것이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근거가 됐다. 그의 이론은 확고한 사상적 철학적 근거가 없는 대북정책은 모래성에 불과함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후기 전체주의 사회는 독재체제 및 기존의 전체주의 체제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벨은 주장했다. 독재체제는 뚜렷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지 않는 소수의 집단이 국가 공권력을 장악한 후 필요할 때 노골적 폭력 행사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체제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에서 등장한 독재체제는 독재자의 사망 혹은 권좌 축출과 함께 소멸하고 마는 일시적 정치 현상인 경우가 보통이다.

하벨이 말하는 후기 전체주의는 여전히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붕괴 직전의 말기적 증상이 두드러지는 사회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을 가게 창문에 걸어 둔 후기 전체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채소장수는 더는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채소장수의 행위는 단지 국가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감시자들에게 보내는 요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예를 통해 하벨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후기 전체주의 사회는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리의 세계에 살고자 하는 ‘후기 전체주의에 대한 반체제 운동’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 ‘우리 민족끼리’ 등 주체사상에 기초한 슬로건이 난무하는 북한에서도 후기 전체주의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주체사상을 앵무새처럼 암기하고 주체사상탑에 떼 지어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 가운데 주체사상이 자신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주민들은 국가 폭력 앞에서 주체사상을 실제로 신봉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후기 전체주의적 행동양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후기 전체주의 단계에 접어든 북한에서 기존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북한 내부와 남한을 동시에 겨냥한 대체 이데올로기 마련을 위한 북한 지배세력의 노력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민족공조론’은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말기적 전체주의 사회에 접어든 북한체제의 위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마비시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판명된 상태다.

최근 우리 대학가와 사회에서 대북정책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및 인권을 중시하는 인류 보편적 관점에서 재정립돼야 한다는 건강한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의는 더는 남북협력의 양적 확대와 지속 여부를 둘러싼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핵무장을 한 채 말기적 전체주의 단계로 접어든 북한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단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족공조론’과 같은 대체 이데올로기들의 개발 노력은 북한 지배세력에 의해 북한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 사회 내부에서 당분간 하벨과 같은 반체제 사상가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우리 사회가 북한의 대체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끊임없는 사상적 자기 성찰 노력이 절실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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