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6일자 자유시민연대 성명을 읽었다. 자유시민연대 성명의 내용은 전·의경 명찰 부착을 반대하며 공권력에 도전하는 시위는 '가혹하고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 자유시민연대 성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자유시민연대 성명 내용

    자유시민연대 성명의 요점은 우리 사회의 폭력시위 수준은 도를 한참 넘어섰는데 그 폭력시위 자체는 방치해두면서 강압진압을 한 경찰에게 왜 책임을 묻냐고 반문하고 있다.

    과격진압은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시위가 부른 것이지 어찌 익명성이 초래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사회에서 시위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법이 보호하는 한도 내에서 해야 하며 폭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고 있다.

    이어 공권력이 폭력에 무력화된다면 국가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는 것이며 인권의 측면에서도 폭력시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폭력시위로 피해를 입는 전·의경의 인권 때문이다.

    끝으로 자유시민연대 측은 전·의경에게 명찰을 패용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보다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는 ‘가혹하고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폭력시위자는 물론 시위를 주도한 사람까지 끝까지 색출하여 처벌해야 하고 전·의경이 희생될 경우 피해보상까지 물려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폭력시위 엄단은 동의한다

    그렇다. 자유시민연대 성명의 내용대로 폭력시위 엄단은 동의한다. 폭력시위자, 시위를 주도한 사람까지 끝까지 색출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나 피해보상까지 물려야 한다는 것도 동의한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폭력시위를 진압해야 한다는 표현이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표현이다. 그리고 전·의경 명찰 패용 문제도 나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한다. 물론 그 처벌에는 범죄자의 악행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물론 들어있다. 그렇지만 그 처벌의 본래 의미는 범죄자가 그 범죄에 대한 보상을 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보통 문명사회는 범죄 피해자나 가족의 사적 복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가령 갑이란 사람이 범죄 피해를 당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더라도 갑이란 사람의 친인척이나 지인이 가해자를 찾아가 보복해서 역시 그 가해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처벌의 의미를 시위 진압에 더해 생각해 보면 폭력시위자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표현은 너무 과한 감이 있다. 보통 경찰이 범죄자를 체포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총기를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마찬가지다. 폭력시위자를 체포할 때에도 그 시위자를 체포할 수 있는 만큼의 완력을 사용하도록 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식으로 감정까지 드러내는 것은 법집행의 엄정성을 강조하는 수위를 넘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느낌 마저 들고 체포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과잉 폭력을 묵인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강력한 처벌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다

    간혹 진보진영에서도 법을 어긴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는 식으로 목청을 높이는 이들을 본다. 재밌는 것은 이들은 통상적으로 진보성향의 의도를 관철하는 집회와 같은 일에서 벌어지는 불법행위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성범죄라든가 가진 자들의 부패·비리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목청을 높여 ‘법대로’ 할 것을 주장한다.

    결국 이들의 의도는 간단하다. 이들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이유는 가진 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 꼴 보기 싫은 가진 자들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제거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보수진영에서도 법을 어긴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폭력시위라든지 일반 서민들의 이런 저런 사소한 범죄행위에 대해 목청을 높이는 사례가 많다. 가령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조작해 어느 정도의 부당이익을 챙겼다는 이야기에 분노하는 보수시민들이 간혹있다.

    택시기사들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그러니 낮은 처벌로 끝내자는 주장에 이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법을 어겼으면 분명한 처벌을 해야지 왜 사소한 처벌로 흐지부지 끝내고 넘어가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폭력시위에도 마찬가지 주장을 편다. 이들은 미국에서는 폭력시위와 같은 형태로 공권력에 저항하면 바로 총으로 쏴버린다는 표현까지 쓴다.

    나는 역시 이런 일부 보수인들의 모습에서 역시 앞서 예를 든 일부 진보인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복수욕을 본다. 그러나 과연 이런 복수욕이 우리 사회의 질서·평화유지와 보수진영의 번창에 큰 도움이 될까. 뭐든지 지나치면 안 좋다고 과도한 복수욕은 우리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보진영의 말도 들어보자

    우리는 종종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우리는 보수인이기 때문에 진보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지 않는 태도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진보나 중도인들과 같이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무조건 못 믿겠다고 귀를 막기 보다 일단 진보인들의 말을 좀 들어보도록 하자.

    진보인들 입장에서는 폭력시위의 책임을 경찰에게 돌릴 것이다. 그러니까 경찰이 먼저 폭력을 행사해서 방어를 위해 시위대도 폭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로 인해 폭력다툼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엉뚱한 시위대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말이 옳을까. 그것은 누구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대개 이런 공방은 책임 떠넘기기 공방이다. 진보인들은 폭력시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 책임을 전적으로 경찰에 넘기고 마찬가지로 경찰은 폭력시위 책임을 자신들이 지고 싶지 않으니 책임을 시위대에 다시 떠넘긴다. 이런 식으로 되어 버리면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것이고 더 많이 여론을 끌어당기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보나 중도세력은 유리하고 보수세력이나 경찰은 불리하다.

    지난 농민시위 과정에서 두 명의 농민이 사망했다. 그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했다. 그리고 난 뒤 시위진압 전·의경 명찰 패용조치와 같은 조치들이 행해졌다. 이는 사실상 노 대통령이 경찰과 농민들 가운데 농민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치 논리 때문에 농민들에게 굴복했다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불만들은 최근의 이런 저런 언행들로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대통령 입장에서는 폭력시위 엄단을 이야기하면서도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층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가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보진영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보수진영의 이야기만 소리치려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 우리 사회의 문화적 주도권은 중도·진보진영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 서로 대화해야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야기가 원점에서 맴돌더라도 적어도 대화를 안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하는 것이 낫다. ‘대화’는 원론적인 해법이지만 가장 긍정적인 해법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사라졌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대화를 하지 않는다. 기성세대와 젊은이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영남인과 호남인이 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서로 감정의 벽을 쌓고 대립을 거듭하며 서로의 마음에 앙심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해관계가 다르고 적대관계일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과도한 앙심의 김을 뺄 수 있는 국민적 대화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국민적 대화문화가 정착되어야 관용정신이 확산되고 관용정신이 확산되어야 민주주의가 강화될 수 있다.

    대화가 없으면 관용이 없고 관용이 없으면 민주사회가 흔들린다. 지금 우리는 빈부격차와 국민적 이해관계 갈등 속에서 우리가 힘들여 쌓아 놓은 민주문화의 위기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흔들리고 있는 사회질서와 민주문화를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국민적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며 그 대화를 선도하기 위한 정치 리더십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정치가 그 역할을 못해준다면 오피니언 리더들이 나서서 사회가 원만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런 부분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문제있는 사람들이 간혹 끼어있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폭력시위가 벌어지는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폭력시위자들이 단순히 문제있는 사람들이어서 폭력시위를 해댄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편견에 가깝다. 폭력시위자들이 굳이 폭력을 휘두르는데에는 자신의 욕구를 관철하려는데에 목적이 있다.

    분명히 다시 강조하면 폭력시위는 엄단되어야 한다. 폭력시위 현장에서 시위자가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적당한 수준의 완력을 통해 진압해야 하며, 폭력시위자와 집회 주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경찰이 다치면 피해보상 책임을 물어야 하고 경찰의 잘못으로 법을 어긴 일도 없는 시위 가담 시민이 심하게 다쳤다면 보상해야 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집회현장에서는 이뤄지기 힘들 이야기이다. 일단 집회 현장은 대단히 혼잡하다. 그리고 폭력시위로 일단 번지기 시작하면 누가 폭력시위자이고 누가 일반 시민인지를 분간하기도 어렵다. 이 와중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과 시위 견제방식도 이제는 좀 더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시민과 경찰의 피해를 줄이고 억울한 피해자를 크게 줄이면서도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시위대가 할 말 할 수 있도록 해주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위대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공중의 다수에게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가령 농민시위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진 것은 경제난에 고통받는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폭력시위를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들의 분노를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폭력시위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농민시위에서 농민들이 그들의 의사를 널리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면 굳이 그들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폭력시위를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각 세력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 신문 의견광고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아마 돈이 없어 신문 의견광고를 낼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이런 농민들에게 신문 의견광고를 낼 기회라도 주었다면 과연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폭력시위를 했겠는가. 차라리 폭력시위를 통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이 크다면 차라리 그들에게 중앙일간지에 그들의 의사를 광고할 기회라도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광고기회를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중앙일간지에 그들의 의사를 광고할 기회를 주면 오히려 보수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의 논리가 국민적 지지를 받을만큼 타당성이 컸다면 그들이 폭력집회를 하기 전에 이미 대중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어차피 폭력집회 당사자들의 광고는 대중적 지지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므로 보수진영 입장에서는 큰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해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언론을 이용해 광고까지 했으므로 굳이 폭력집회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도 굳이 폭력집회를 하면 그때는 공권력을 통해 체포하고 처벌하면 그 뿐이다. 언론을 이용해 폭력집회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주면 폭력집회도 줄어들고 사회에 대화문화도 확산될 것이다. 또한 보수진영에서도 얼마든지 대중을 모아 광고권리를 받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매춘의 필요를 이야기할 때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점을 든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하므로 매춘을 둬서 인간의 욕구가 적당히 배설될 수 있는 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폭력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욕구를 언론활용을 통해 적당히 분출시킬 수 있는 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회갈등이 과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약자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만들기가 해법

    폭력시위로 인해 피해를 보는 전-의경들이나 폭력시위를 해야 하는 시위대나 모두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딱한 약자들이다. 결국 폭력시위를 근본적으로 분석해보면 살아남기 위한 우리 사회 약자들의 생존투쟁이며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이 고통을 받을 따름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인들이나 그렇다고 해서 약자가 불행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자본주의 자체에 근본적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질이 꾸준히 나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보수인들은 노력할 수 있다.

    사람들은 폭력시위나 사소한 택시기사 미터기 비리문제에 대해 보수인들이 ‘엄단’을 이야기할 때 머리로는 동조할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거리감을 느낀다. 폭력시위자들을 미국에서는 경찰이 총으로 쏴버린다고 하여 한국 보수인들이 폭력시위자들은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해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을 듣는 일반 시민들의 가슴에는 보수인에 대한 거리감이 들 것이다.

    심지어 일부 진보인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들며 ‘그래서 당신네 보수인들이 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구나’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물론 정리하면 80년 광주의 보수인들과 지금 2006년 보수인들과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자꾸만 80년대 민정당과 지금의 한나라당을 동일시하려는 사고를 가진 이들이 많은데 80년대 민정당과 지금의 한나라당이 대체 어떤 동질성을 갖고 있단 말인가. 아마 이런 이들에게는 80년대 민정당과 지금의 한나라당이 실제로 같건 다르건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한나라당은 그들의 적이고 당연히 한나라당을 제거하거나 무력화시켜야 하니 그들이 극악세력으로 미워하는 민정당을 끌어다 한나라당 위에 얹어놓는 것이다. 대중들이 민정당과 5공을 혐오하니 이런 식의 도식만들기는 그들에게 있어 참으로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법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법은 가진 자가 자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고 한국 보수인들은 그 법을 자기 마음대로 어겼으면서 왜 이제와서 법을 강조하느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반발은 사실 어렵지 않게 반론이 가능하다. 어차피 보수인들 가운데 법을 어겨가며 상당한 이권을 챙기는 이들은 사실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법을 지키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들은 사실은 일반 보수시민들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뒤집어 말하면 과거 일부 보수인들이 법을 어겨가며 악행을 일삼았다고 해서 지금 반 보수인들이 악행을 일삼는다고 한다면 반 보수인들이 과거의 보수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또한 특히 진보인들은 과거 일부 보수인들의 위법사례를 들며 당신들이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있냐고 공격을 가해오는데 그렇게 치면 우리는 누구도 서로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부모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옳은 일, 바른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대개 자녀들에게 옳은 일, 바른 일을 하라고 늘상 이야기한다. 일부 진보인 식 논리대로 하면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단 한 마디도 선량하게 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일부 진보인들은 과거 80년대의 온갖 병폐들이 그때 당시에는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법을 어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에도 맹점이 있다. 80년대는 비 민주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쨌든 민주사회가 되었다. 민주사회에서는 법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법을 지키지 않은 관계로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도 사회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고 있지 않은가.

    또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학법의 사례를 보자. 사학법 통과에 항의하며 일부 사학이 신입생 배정을 거부하겠다고 했었던 바 있다. 그러다 여론의 반발에 밀려 다시 법을 준수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이들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보려 했다가 법을 지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렇지만 이미 이들이 법을 어기고 배정 거부에 나섰을 때에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며 사실상 사학 운영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여기서 굳이 사학법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럼 사학법을 반대한다고 법을 어기고 학생배정을 거부하는 사학들의 사례를 어떻게 보냐고 질의한 어느 진보인의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법의 준수와 관련된 논란에서 법을 가볍게 여기는 반 보수인들을 위와 같은 논리로 잠시 반발을 주저 앉힐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그들의 가슴을 돌려 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이런 저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트집잡아 보수진영을 공격해 온다.

    우리 보수사회가 지금의 폭력시위 문제를 슬기롭게 풀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과도할 정도로 엄격한 시각을 다소 부드럽게 바꿔야 한다. ‘불만세력 때려잡기’가 반드시 능사는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진압 전·의경 명찰 패용은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의경 명찰 패용 때문에 생길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당장 사이버 테러의 우려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런 부작용이 우려된다면 차라리 명찰 대신 소속 부대명을 표시하는 식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 론

    이제 폭력시위는 엄단되어야 한다. 폭력시위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시위까지 해가며 의사를 관철하려는 이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한다. 무턱대고 의사 표현을 억누르게 되면 오히려 폭력시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폭력시위 책임을 은폐하는 등의 지능적 범행이 더 많이 이뤄질 수 있다. 기층민중의 사회 불만은 무턱대고 힘으로 누른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층 민중도 자신들의 할 말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기회는 주고 폭력시위 엄단을 위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제도를 짜임새있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기층 민중들이 한국 사회와 가진 자들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다. 그 불만을 무턱대고 억누를 것이 아니라 그 불만을 어느 정도 원만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을 터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국민들은 빈자는 자신의 권익을 보호받을 길이 없고 사회 기관도 그들을 외면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투쟁’해야 하며 결국 세상은 목소리 큰 편이 이기는 것이고 여론을 휘어잡는 편이 이기는 것이므로 폭력시위를 해도 무방하며 가진 자를 증오하고 법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지금 폭력시위 처리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현실을 생각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