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정기 논설실장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유서 - “동지들, 명심하시오. 예상과 정반대로 자본주의 아니라 공산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으로 붕괴한다면 소련을 해체하고 독일을 통일시키고 모스크바를 나토에 가입시키시오. 서구는 결코 이러한 타격으로부터 회복될 수 없을 것이오.

    ” 물론 위작(僞作)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8월31일 언론사 논설실장 과의 간담회에서 음미중이라고 한 책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울리히 벡 저· 정일준 역, 새물결출판사 2000.11.10)가 소개한 한 대목이다. 그날 노 대통령은 헌법과 헌법재판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헌법은 큰 틀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명문에 반하지 않으면 된다. 헌법 논리가 좀 과잉돼 있는 상황이다. 국회 위에 헌재 하나 있는 형국이 돼버렸는데, 이는 정치적 현실을 너무 개념적 논리구조 속에 구속시키게 되기 때문에 좋은 현상은 아니다.

    ” 바로 그 헌재가 11월 중순 전세계의 벤치마킹 모델임을 자부했다 . 헌법재판 종주국인 독일의 연방헌재 관계자 친선 방문이 그렇 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내년에도 그럴까….

    헌재 재판관의 임기는 6년, 정년은 65세(소장은 70세)다. 정년 때문에 들쭉날쭉해지긴 했지만 1988년 9월15일 출범한 헌재는 6 년 임기로 나눠 내년 9월 이후 제4기에 진입한다. 현직 재판관 9 인 가운데 윤영철 소장을 비롯, 권성·김효종·김경일·송인준 재판관 등 5인은 그때 물러난다. 제4기 들어 직을 유지할 4인 가 운데 노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재판관은 단 1인, 2001년 3월23일 이래의 주선회 재판관뿐이다. 그의 임기는 2007년 3월까지, 그렇지 않아도 그의 후임 임명권은 노 대통령 몫이다. 

    대통령 성향과 재판관의 성향이 어찌 한묶음이랴 하는 것은 좋게 받아들여 순진한 말, 빗댄다면 뭘 모르는 말이다. 지난해 10·21 행정수도특별법 위헌의견 8인 가운데 노 대통령이 임명한 재판관은 전무했다. 유일한 합헌의견 전효숙 재판관은 ‘노무현에 의한, 노무현을 위한, 노무현의 판관’이다.

    11·24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재판은 역시 그렇고 그랬다. 윤 소장 이 먼저 주문을 읽었다 - “재판관 7인이 기본권 침해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해 심판청구를 각하한다.”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가 그 이틀전에 지난해 위헌 실효한 행정수도특별법과 대비해 ‘수도에 관한 정의’, 부수조항 말고는 그야말로 대동소이해 법금(法禁)의 실질을 그대로 둔 채 이름만 바꿔 안될 일이 될 것 아니라던 ‘탈법행위 금지의 법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그날의 각하 결정을 다들 행정도시법의 합헌 선언으로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노 대통령 시대 들어와 임명된 재판관 전원, 다시 말해 전효숙·이공현·조대현 3인 재판관의 별개 의견을 더 주목했다. 노 대통령이 이미 본심을 털어놓은 그대로 2002년 대선 때 재미 좀 보겠다는 일념의 대선 공약 그 뒤끝을 받들어 기어이 수도를 옮기는가 싶은 ‘미연의 미래’보다 임명권자의 뜻이 곧 재판관의 뜻임이 기시감(旣視感) 아니라 기억임을 새삼 깨달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헌법재판의 본질이 정치인 것을. 노 대통령이 임명한 재판관은 단 1인 예외없이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1인 반대의견을 드디어 3인이 합창한 것이다. 내년 9월 이후 행정도시법… 아니, ‘부활 행정수도법’이 혹 헌재에 얹혀도 ‘서울=수도’는 관습 헌법도 뭐도 아니게 다 흩어지고 만다, 역시 허공이다.

    현 정권이 위헌논란에 직면한 사안마다 내년 9월 이후 두고보자 고 하고싶은 유혹을 느낄 만하다. ‘노무현의 판관’ 그 대부분의 임기가 끝나는 2012년 9월까지 헌재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개 념을 빌려) ‘식민지’다. 노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 임기도 그 6 개월 뒤인 2013년 2월까지일 뿐이다.

    그 시평선(時平線)을 향한 ‘노무현의 유시’ - “동지들, 2002 대선 당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2002.10.15)라는 자서전에서 ‘최선의 방법은 장기적으로 국회와 청와대 사이에 중앙관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뜻을 잊지 마시오 . 그렇게 주장하더니 서울과 수도를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로 나눴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 책 79페이지를 읽는 사람마다 속절없는 세월이 더 더딜 것이오. 동지들 말고는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