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특파원 칼럼'에 이 신문 워싱턴 특파원 권순택 기자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인만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논쟁거리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을 정도다.

    성탄절이 들어 있는 12월이면 미국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논쟁이 재연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140만 명이나 되는 지지자와 친구들에게 보낸 카드에 들어간 인사말이 문제였다.

    인사말이 ‘메리 크리스마스’나 ‘해피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희망과 행복이 함께하는 홀리데이 시즌이 되기를 바란다’로 밋밋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드에는 기독교나 성탄절을 상징하는 아무런 장식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일부 보수 기독교인은 ‘거듭난 복음주의 기독교인’인 부시 대통령에게서 받은 ‘홀리데이 카드’를 내던져 버렸다고 언론은 전했다.

    보수단체인 미국가족협회는 지난해 말에 광고물과 매장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않은 유명 백화점을 겨냥해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인지 이 백화점은 올해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란 표현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올해는 ‘타깃(Target)’이라는 체인스토어가 새로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인의 96%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이 현실인 만큼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양한 종교의 평등성과 연말연휴의 나눔의 정신을 생각하면 ‘홀리데이 시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맞서 논쟁을 벌인다.

    대법원 판사 임명 때마다 등장하는 낙태 논쟁, 진화론과 창조론 그리고 지적설계론으로 나뉘어 벌이는 생명의 기원 논쟁, 국기에 대한 충성 맹세도 계기가 있을 때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주요 논쟁거리들이다. 

    쉽게 결론이 날 수 없는 이런 종교적인 문제나 국가의 기본적 가치에 관한 문제만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전의 명분이나 미군 철군, 사회보장제도나 의료보험 개혁, 사형제도 같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도 거의 매일 TV와 라디오 방송, 그리고 신문 지상의 논쟁 소재로 등장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면 우리와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우선 치열한 논리의 대결이라는 점이다. 논쟁의 각 진영이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과 논거를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 기본이다. 과거에 했던 주장과의 일관성이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빈틈은 용납되지 않는다.

    지난해 대선에서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상원의원으로서의 표결 때와 다른 주장을 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기도 했을 정도다.

    8∼10일 한국에서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제이 레프코위츠 미국 북한인권특사는 북한의 인권상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들의 비판 발언은 미국 행정부의 내부 합의를 거쳐 정교한 계산 아래 나온 것이며 그 과녁은 우리 정부일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우리 정부의 한 축을 구성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한국 진보세력은 과거에는 인권을 탄압하는 세력이라며 권위주의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권위주의 정권이 사용했던 논리를 그대로 복제한 것처럼 지구상에서 최악으로 평가되는 북한 인권문제를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한국 진보세력의 이런 오락가락하는 논리는 미국에서라면 설 땅을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논쟁이 적당한 선에서 끝나는 경우를 미국에선 본 기억이 없다. 좀 더 치열한 논쟁을 통해 생존을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북한 내 정치범이나 중국 등지를 떠도는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에 우리 사회가 더욱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