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은 무엇을 했나
  • 제52회 이승만 포럼 <특집연재: 6.25남침과 이승만의 전쟁 리더십-1>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지난 5년간 매월1회씩 진행해온 <이승만 포럼>은 6.25남침전쟁 65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으로 <6.25남침과 이승만의 전쟁 리더십>을 10회 연속 발표합니다.
    휴전후 좌익세력이 선전선동해온 6.25에대한 허위 왜곡 주장들로 인하여
    '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 운운 잘못 알려진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워 
    건국대통령의 호국전략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정체성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 첫번째 발표를 맡아준 남정옥 박사는 6.25전사에 대한 20여권의 저작을 출간,
    국내 독보적인 전사의 권위자로 상세한 자료를 제시합니다. (편집자)
  • 탱크 한대 없는 대한민국 통수권자 이승만,
    침략 소련-중공-북한 공산군과 싸우면서 미국과 싸운 3년

    Ⅰ. 머리말
      
      6·25전쟁은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과 마오쩌둥(毛澤東), 그리고 미국에 대항한 ‘이승만의 전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3년 1개월간의 전쟁동안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워싱턴과 대립하며, 대한민국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른바 ‘벼랑 끝 전략’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에서 국군철수와 국군단독의 북진통일, 그리고 반공포로석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살려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튼튼한 안보적 토대와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른 한미동맹, 국군 20개 사단의 증강과 해·공군의 현대화, 그리고 전후복구 및 경제부흥을 위한 토대 마련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승만을, 외교의 신 (曹正煥, 「머리말」, 外務部 편, 『外務行政의 十年』, 외무부, 1959, 2), 
    대한민국의 국부·아시아의 지도자·20세기의 영웅(허정, 『우남 이승만』, 태극출판사, 1974;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허정 회고록』, 샘터사, 1979),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
    한국의 조지 워싱턴 (로버트 올리버 지음·황정일 옮김,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2, 342쪽; 유영익,「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유영익 편,『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New York: Dodd Mead and Co., 1960), p.321), 
    6·25동란을 수습한 절대공로자 (金麟瑞,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독학협회출판사, 1963)로 격찬하고 있다.

    국내학자들, 사료 연구도 없이 흠집 내는데 혈안

      그럼에도 국내 사회 및 학계 일각에서는 전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오로지 이승만의 정치적 흠집 내지는 결점만을 찾아내는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다.
    이승만의 전시 업적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이를 무시한다.
    그들에게는 이승만의 과오만 필요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들이 얻어낸 ‘성과’가 바로, 이승만 때리기에 ‘유용한 것’들이다.
    이른바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남침이후 별로 하는 것 없이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피란을 간 무책임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여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정한 대통령,
    전쟁 중에는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권력욕의 화신(化身) 등으로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남침직후 3일간(72시간), 이승만의 '잘못된 행적'에 대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승만은 이들 ‘비난세력’이 말한 것처럼 무능한 인물이었던가?
    정말로 그는 남침직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일신(一身)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갔던 대통령이었는가? 그것은 신뢰성이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자 동기이다.

      그럼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남침직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기록도 거의 없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희박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종합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는 당시의 국가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데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기록도 온존이 보존되지 않는데도 기인하고 있다.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6.25와 이승만...생생한 증언

  • 이승마의 남침직후 초기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를 바탕으로 발간된,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6·25와 이승만』, 기파랑, 2010, 22-26쪽이다. 이승만의 정치고문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책에도, 남침직후 이승만의 행적을 찾기는 어렵다.
    (로버트 올리버 지음·황정일 옮김,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2/ 로버트 T. 올리버 저, 박일영 역,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 이승만과 한미관계』, 계명사, 1990.)
 몇 안 되는 이에 대한 기록들도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들 자료가 남침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을 더듬는 중요한 자료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하다보니 역사가 오도(誤導)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자료로는 6·25전쟁 당시 이승만 주변을 맴돌던 인사들의 증언이나, 그들이 쓴 회고록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앙일보사 편, 『한국전쟁 실록: 민족의 증언』제1권, 중앙일보사, 1972/부산일보사 편, 『임시수도 천일: 부산피난시절 진상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대하실록』상·하,1984 / 박용만, 『제1공화국 : 경무대의 비화』, 내외신서, 경향신문사 편, 『내가 겪은 20세기: 백발의 증언 원로와의 대화』, 경향신문사, 1974/ 김석영 편, 『경무대의 비밀: 이제야 모든 진상을 알게 되었다』제1집, 평진문화사, 1960; 박용만, 『제1공화국 경무대의 비화』, 내외신서, 1965; 임병직, 『임병직장관 회고록 : 임정에서 인도까지』, 외교통상부 외교안보연구원, 1998/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선진, 2003/ 허정, 『허정회고록 :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 1979.)   
  그렇다고 자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이승만의 72시간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다. 다만 늦게 공개되었거나, 여기 저기 파편처럼 산재되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맞추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 몇 개 되지 않는 자료로는, 무초 대사와 미 국무부간의 전문자료 21건(6.25.10:00∼6.27.08:00)이 1976년에 발간된 미 국무부의 대외자료(FRUS: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초기 이승만의 행적을 알게 하는데 매우 귀중한 기초 사료이다.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이하 FRUS로 표기), 1950, Vol. Ⅶ, Korea(Washington, D.C.: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6), pp. 125-176)
 또한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동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1977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쟁사 공간사와 기록물이 있다. 이들 자료로는, 국방부, 『한국전란1년지』, 선광인쇄주식회사, 1951;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전사편찬위원회, 1977; 국방군사연구소, 『韓國戰爭』(上), 1995;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전투』제2권, 군사편찬연구소, 2005 등이다.

 또 단편적이긴 하나 당시 주미대사관의 한표육(韓豹頊) 참사관이 1984년에 쓴 회고록 성격의 책인 『한미외교 요람기』가 있는데, 이는 이승만과 주미대사관의 전화통화기록이 시간과 장소 그리고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어 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韓豹頊, 『한미외교 요람기』, 중앙신서, 1984)
<한표욱은 1916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 문과 졸업하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시라큐즈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석사, 미시간대에서 철학박사를 수여받다. 주요 경력으로는 미 하버드대 연구원, 미 조지워싱턴대 국제정치학 교수를 역임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주미한국대사관 창설요원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다. 이후 주미대사관 1등서기관, 참사관, 전권공사, 제네바대표부대사, 태국대사, 유엔대사, 오스트리아대사, 영국대사를 끝으로 1981년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대한민국 외교의 산 증인이다.>
 이외에도 최근 발간된 남시욱 교수의 『6·25전쟁과 미국』도 이 이 시기의 이승만의 행적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남시욱, 『6·25전쟁과 미국: 트루먼·애치슨·맥아더의 역할』, 청미디어, 2015)
 
  이 글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남침직후 이승만의 3일, 즉 72시간의 행적을 고찰하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침직후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과거에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묻혀 있는 것을 새로 발굴하는 ‘이승만 역사’의 복원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역사인물로 자리를 잡기를 기대해 본다. 나아가 이승만이 미국 명문대학(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을 나온 당대의 뛰어난 국제정치학자로서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인지, 아닌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 일요일 새벽 전면 침략에 나선 소련제 신형 탱크부대.
    ▲ 일요일 새벽 전면 침략에 나선 소련제 신형 탱크부대.
    Ⅱ. 군과 경찰의 남침상황 보고 및 조치 

    1. 북한군의 남침과 전선 상황, 6.25.04:00∽6.26.13:00(의정부 함락)

      김일성(金日成)과 스탈린이 마오쩌둥(毛澤東)과 협의하여 수립한 북한의 남침공격계획의 기본개념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전선에 배치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군은 신속히 남해안까지 진출하여 미 증원군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하고, 전쟁을 종결함으로써 8월 15일 광복5주년 기념일에 서울에서 성대한 행사를 통해 ‘통일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A. V. 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역,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 2003, 114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군사편찬연구소, 2001, 135- 137쪽 / 러시아 국방부 저, 김종국 역,『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교육사령부, 2002, 31쪽)
     
    맨손의 국군들, 북한 탱크 뛰어올라 몸 던져 폭파 저항

      북한군은 1개월 전쟁을 가능케 할 남침공격계획과 국군에게는 단 한 대도 없는 전차(242대)와 전투기(226대) 등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04:00시(워싱턴 시각, 6.24. 15:00)를 기해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동해안에서는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부대를 강릉일대와 부산지역으로 기습적으로 상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부산으로 상륙하려는 수송선은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에 의해 격침됐고, 북한군 전차들은 국군장병들의 육탄공격 등 선전(善戰)으로 곳곳에서 저지됐다.  

     북한공군은 달랐다. 북한전투기들은 전쟁당일부터 서울상공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공격했다.
    연습기와 연락기뿐인 우리 공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북한전투기들은 6월 25일 10:00시부터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에 출현했고, 정오경에는 야크(YAK) 전투기 4대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과 통신소 등 서울시내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합동참모본부,
     17:00시경에는 2대의 야크기가 김포비행장의 관제탑과 유류저장시설을 공격하여 큰 화재가 났고, 계류장에 있던 미 공군의 C-54수송기 1대와 한국공군의 T-6건국기 1대가 손상을 입었다.
    이때 다른 야크기 4대는 여의도비행장을 공격하여 한국공군 연락기 7대에 손상을 입혔다.
    19:00시경에는 6대의 북한전투기들이 김포비행장을 다시 공격하여 미 공군의 C-54수송기 1대를 파괴했다. (공군본부, 『6·25전쟁 항공전사』, 공군본부, 2002, 14-15쪽)

    소련제 전투기들, 첫날부터 서울 상공에..."항복하라" 전단까지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북한전투기들이 용산 일대의 군 시설과 여의도 및 김포비행장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를 비롯하여 중앙청 일대에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까지 살포했다. (공군본부, 『6·25전쟁 항공전사』, 15쪽)
     무초 대사도 25일 19:00시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북한공군의 공습을 크게 우려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관리들이 미국의 공군지원을 바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무초는 향후 전쟁의 향배는 미국 공군의 지원에 달려 있다고 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FRUS, 1950, Vol. Ⅶ, pp. 132-133.)
      
      6월 26일 13:00시경(워싱턴 시각, 6월 25일 자정), 북한군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서울 시내에서 불과 8km 떨어진 창동까지 진출하며, 서울 도심 진입을 시도했다.
    서울이 적의 야포 사정거리에 들어갔다. 또 북한군 전차의 시속 약 60km의 속도를 고려하면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이때가 26일 야간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엔으로부터는 아직 대한민국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려고 했을까?

  • 북한 전투기에 공격닫해 불타는 서울의 군용기.
    ▲ 북한 전투기에 공격닫해 불타는 서울의 군용기.
    2. 육군본부 상황실, 채병덕 총장에게 남침상황보고, 6.25.05:00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받은 육군본부 상황실은 전선의 예하부대로부터 적의 공격 상황을 접수하고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채총장은 지난 토요일 밤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하고, 이날 새벽 02:00시경 총장공관으로 돌아와 취침 중 05:00시경 당직사령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육본상황장교 김종필 중위를 총장공관으로 불러 이를 확인한 다음,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비상소집하라.”고 명령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전사편찬위원회, 1977, 577쪽 /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상, 국방군사연구소, 1995, 108쪽)
     
      채 총장으로부터 비상발령의 명령을 수령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은 25일 06:00에, 〈작전명령 제83호〉(1950.6.25.06:00)에 의거 ‘전군(全軍)비상령’을 하달하고, 동시에 육군 장병들의 비상소집을 실시했다. (국방부,『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928쪽)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한 고급장교와 지휘관들은 밤늦은 회식에도 불구하고 비상소집이 발령되자 곧바로 출근하여 전쟁에 임했다. 그중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대령이 몇 일전에 서대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직통전화가 가설되지 않아 09:00시쯤 가두방송을 듣고 들어왔다. 
     그리고 14:00시 넘어서는 외출외박 장병의 80∽90%가 부대로 복귀했다.    

    3. 채병덕 육군총장,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남침상황보고, 6.25, 07:00

      채병덕 총장은 남침상황을 보고허기 위해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자, 장관비서인 신동우(申東雨) 중령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신 중령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장관공관인 마포장으로 갔다. 자고 있던 신성모 장관은 채병덕 총장의 방문을 받자 가운만 입은 채, 채 총장이 휴대하고 간 상황판을 보고 남침사실을 보고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국방장관비서였던 신동우 중령은, “장관은 응접실 탁자위에 지도를 펴놓고, 채 총장으로부터 전방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받았다. 이때 장관의 표정은 자못 놀라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짐작은 하였겠지만, 북괴(北傀)가 일요일 새벽에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577쪽.
     이때가 07:00시경이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576-577쪽)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국무총리서리를 겸하고 있었다.   
      채 총장은 장관에게 보고즉시 육군본부로 들어오자마자 국방부 정훈국장(육군본부 정훈감 겸무) 이선근(李瑄根) 대령을 불러, “전군에 비상을 알리고 신속히 이들의 소집이 실현되도록 모든 방법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김백일(金白一) 행정참모부장과 협의하여 후방 3개 사단 출동과 수도경비사 예하 3개 연대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이때가 08:00시경이었다. 
     
      그리고 수색의 1사단 사령부를 불시방문하고, 이어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이때가 10:00경이었다. 7사단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야 그는 북한군의 전면남침을 확인했다. 
     그리고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14:00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4. 치안국장, 내무부장관에게 남침상황 보고, 6.25, 05:00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상황을 경찰로부터 먼저 보고받았다.
    당시 38도선 일대에는 경찰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6월 25일 04:00시, 북한이 38선 일대에 대해 전면남침을 개시하자, 일선 경찰들은 남침상황을 치안국상황실로 신속히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치안국장이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시간이 25일 05:0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전쟁 발발 1시간 뒤였다. 거의 육군본부 상황실에 보고된 것과 비슷하다.
    채병덕 육군총장도 05:00시경 보고를 받았다. 군에서는 이보다 앞선 06:00시에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보고들 받은 내무부장관은 06:30분에 전국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전투태세로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631쪽)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백성욱(白性郁) 내무부장관은, “6월 25일 아침에 장석윤(張錫潤) 치안국장으로부터 북괴의 전면남침으로 38선 일대의 지서(支署)와 경찰초소(哨所)가 유린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여 군과 협조해서 질서 있는 작전을 수행토록 했다.”고 회고했다. (「백성욱 내무부장관 증언」,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개정판), 631쪽)
     
      치안국 상황실에서는 북한의 남침 사실을 경무대에 최초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히 몇 시에 누가 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경무대비서인 황규면(黃圭冕)이 집에 있다가 당직비서인 고재봉(高在鳳)으로부터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은 시각이 09:30분이었다고 한다, 그가 신당동 자택에서 경무대에 서둘러 들어가자, 경무대 분위기는 어수선한 것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황규면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신성모 장관의 전황보고와 백성욱 내무장관의 경찰보고가 달랐고, 미 대사관과 맥아더의 주일연합군사령부(SCAP)의 보고가 서로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경무대 비서실에서선 상황을 분석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 철거되기 전의 대통령 관저 '경무대' 모습 그림.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사용했다.
    ▲ 철거되기 전의 대통령 관저 '경무대' 모습 그림.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사용했다.
        Ⅲ. 군과 경찰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보고

    1.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최초 보고, 6.25.10:00

      1950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09:30분쯤 창덕궁 비원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이승만은 경회루에서 낚시한 것이 아니라 비원의 반도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국방부,『한국전쟁사』제1권 개정판, 610쪽).
     이승만은 10:00시경 비원의 반도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경무대경찰서장 김장흥(金長興)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남침’ 상황을 보고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22쪽 /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610쪽)
    <경무대경찰서는 6·25전쟁 당시 서울시경찰국 산하에 편제된 정식 경찰서 명칭이다. 경무대경찰서는 1949년 2월 23일 경무대 지역을 관할하던 창덕궁경찰서를 폐지함과 동시에 '국가원수와 중앙청 경호경비'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됐다. (경찰청,『경찰50년사』, 경찰사편찬위원회, 1995, 106-107쪽)>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남침을 보고받은 시간과 무초대사가 전면공격을 알리는 전문을
    위싱턴에 보낸 시간은 모두 10:00시였다. 의정부 전선으로 현장지도를 나갔던 채병덕 육군총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고 10:00시에 북한의 전면공격임을 알았다. 

    2.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보고, 6.25.10:30
     
      프란체스카의 증언에 의하면, 10시쯤 신성모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09:00시)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낄 때 나타난 불안한 빛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신 장관을 포함하여 경무대에서는 북한의 남침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프란체스카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무대 안 분위기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경무대의 비서들은,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이었다. 여기에 신성모 장관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23쪽)
     
    신성모 장관이 이렇게 낙관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대통령을 안심시키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경무대에 오기 전에 무초 대사를 만나 현재의 상황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왔음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역력하다. 무초 대사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북한군의 전면공격에 대해 “한국군은 북한침략자를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진지로 투입되었고, 한국관리와 국군은 침착하고 능숙하게 사태를 잘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FRUS, 1950, Vol. Ⅶ, p.127)

    엇갈리는 군경의 전황 보고...이승만은 <전면 남침>을 직감

     이것을 보면 무초는 한국군이 잘 싸우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모 장관은 경무대에 오기 전에 무초가 보는 한국군의 능력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한 믿음 하에 대통령에게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경찰정보는 신성모의 보고나 무초의 보고와는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를 불러 정보보고를 다시 확인시켰다. 고재봉 비서는,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고 보고했다. 
     향후 이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이때쯤 이 대통령은 남침상황을 북한군의 전면공격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마치 준비된 매뉴얼을 보고 하듯,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인상을 주었다.  

    한편 신성모 장관은 채 총장으로부터 07:00시에 보고를 받았는데, 왜 대통령에는 10:00시가 넘어서야 보고를 했을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이 문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이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07:00시에 육군총장으로부터 남침을 보고받은 후 경무대에 들어간 시간이 09:30분경이니 약 2시간 30분 정도가 빈다. 그 중에서 채 총장에게 보고받은 시간(30분)과 경무대에 들어갈 준비(30분), 그리고 경무대까지 이동시간(30분)을 고려해도 1시간 정도가 빈다. 
    그러면 경무대로 오는 길에 당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의 무초 숙소에 들렀을 가능성이 크다. 신성모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들어온 상황과 미국의 대책을 알아보기 위해 장관공관에서 경무대의 중간에 위치한 반도호텔에 들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초 대사도 경무대를 방문하기 전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 관리들(Korean officials)’을 만났다고 했는데, 그 관리들 중 한 사람이 신성모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채병덕 육군총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시간 이후부터 경무대에 오기 전까지 신성모의 동선(動線)이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모의 정확한 행적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 군사고문단도 09:00시에 북한의 전면남침을 확인하고, 무초 대사가 10:00시에 이를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점을 고려하면, 신성모는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측의 정보 즉, 무초 대사가 알고 있는 남침내용에 대한 미국의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를 확인한 후 경무대로 들어와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이 신성모와 무초와의 친분관계다. 무초와 신성모는 남침 이후 자주 만났다. 25일 야간에 이 대통령이 무초에게 경무대로 오라고 전화했을 때도 신성모는 무초대사와 있다가 함께 경무대로 들어갔고, 27일에 아침에도 신성모는 무초 대사를 찾아가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났다고 알려줬다. 그래서인지 이 대통령이 대전에 있을 때, 장택상과 신익희가 국방장관을 이범석으로 바꾸라고 건의하자, 옆에 있던 무초 대사가 나서며, “지금 국방장관을 바꾸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며 반대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29쪽)
     그런 점으로 볼 때 남침직후 신성모는 무초에게 의지했을 개연성이 있고, 무초는 언어 소통이 쉽고 붙임성있게 대하는 신성모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대포...전투기...군함...미국을 닥달하다

    Ⅳ. 남침 보고 이후 이승만의 전시활동

    1. 이 대통령, 국무회의 소집, 무초 대사 연락, 손원일 제독 귀국지시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申性模)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은 다음, 국무회의의 소집을 지시했다.
     황규면(黃圭冕) 비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 대통령은 신성모의 미지근한 전황보고와 대책에 화가 나자 이범석(李範奭) 전 총리와 허정(許政) 전 장관을 경무대에 들어오라고 했고, 이어 자신을 불러 “장관들에게 연락하여 빨리 경무대에 모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 이 대통령은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국대사로 하여금 경무대로 들어오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무초에 대해서는 누가 연락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무초는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대통령과의 ‘약속에 따라(by appointment)’ 경무대를 방문했다고 했다. 실제로 무초대사는 경무대에 들어와 11:35분에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전쟁 상황을 논의했다. 
     
      또한 이승만은 호놀룰루 총영사인 김용식(金溶植)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해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손원일(孫元一) 해군총장에게 하와이에서 예정으로 체류할 군함(3척)들을 끌고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손원일 해군총장은 미국에서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해군장병과 국민들이 모든 성금 1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준 45,000달러를 가지고 미국에서 전투함을 구입했다. (오진근·임성채, 『해군창설의 주역 손원일 제독』상, 2006, 273-274쪽)
     
      이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자마자, 당장 군함이 필요할 것을 생각하고 하와이에 1주일 예정으로 머무를 예정이던 군함을 빨리 출발시키라고 했던 것이다. 이때 호놀룰루에 있던 손원일 제독은, “군함과 함께 해로로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고 무기를 장착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7월 16일 진해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 군함들은 대한해협 해전과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한국 해군의 위신을 살렸다. 

      한편 11:00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재했다. 국무회의 회의참석자는
    임병직 외무부장관, 백성욱 내무부장관, 김유택 재무부차관(최순주 재무부장관 출장), 이우익 법무부장관, 백낙준 문교부장관, 윤영선 농림부장관, 이병호 상공부차관(김훈 상공부장관 출장), 구영숙 보건부장관, 이윤영 사회부장관, 김석관 교통부장관, 장기영 체신부장관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12:00시에 산회했다. 
     다음 국무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경무대에서 14:00시에 다시 개최됐다. 

    2. 이 대통령, 무초 대사와 회담 위한 준비, 신성모로부터 남침보고 받은 후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에 의해 국무회의가 열릴 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와의 회동을 위한 구상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승만이 남침보고를 받은 후 11:35분에 있을 무초 대사와의 회동을 앞두고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는 이 짧은 틈을 이용해 앞으로의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방안을 구상했다. 이승만의 구상은 무초와의 회담을 통해 밝혀졌고, 이는 향후 이승만이 수행할 전쟁지도의 틀 내지는 전쟁수행방식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무초와의 회담을 앞둔 그 짧은 시간에 향후 대한민국 정부기 지향해야 될 전쟁지도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아울러 지금 당장 전쟁에 필요한 시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될 내용도 함께 구상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메모를 작성하여 무초와의 회담에 임했던 것 같다. 이승만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어떤 참모의 조언도 없이 전쟁을 수행해 나갈 구상을 스스로 했던 지도자였다. 
      이때 이승만이 정리했던 내용은 회담 후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쟁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한국군에게 부족한 탄약과 무기를 요청하고, 필요할 경우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전개하고, 전쟁목표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통일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승만은 무초대사와의 회동을 통해 한국정부가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알려주고, 필요한 군사지원 등을 미국에 요청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 6.25남침 이틀후 6월27일 수원비행장에 나간 이승만(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은 맥아더가 급파한 처지 준장(왼쪽)을 맞아 무초 미대사(오른쪽)와 함께 전황을 논의하고있다.(NARA 제공. 남시욱 지음 [6.25전쟁과 미국]화보에서)
    ▲ 6.25남침 이틀후 6월27일 수원비행장에 나간 이승만(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은 맥아더가 급파한 처지 준장(왼쪽)을 맞아 무초 미대사(오른쪽)와 함께 전황을 논의하고있다.(NARA 제공. 남시욱 지음 [6.25전쟁과 미국]화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