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광복회》의 [좌우합작] 노림수는 무엇?김구·김규식,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노선] 배척그들 등 돌린 2년2개월 뒤, 김일성 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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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통성]과 [적법성]

    공산당 말고 누가 1919년의 3.1 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에 고개를 저을 것인가?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도 [임정 법통]을 선양했다. 
    다만 [법통 계승]의 뜻풀이로는, 여러 다른 관점들이 있다. 
    그중 한 관점은 이렇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계승] [정통성]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지, 헌법 질서에서 [적법성] 계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학자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의 말이다.

    ■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 8.15

    그렇다면 [정신 계승] 아닌 [실제 건국]은 언제였나? 
    1948년 8월 15일이라 했다.

    ※ 1949년 《독립 1주년 기념식》
    ※ 1958년 《건국 10주년 기념식》
    ※ 1998년 김대중 정부의 《건국 50주년 기념사업》 
    ※ 2003~2007 노무현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1948년에 민주공화국을 세웠다"라고 한 구절.

    이 모두가 [1948년 8.15 건국]을 기정사실로 쳤다는 것이다. 

    ■ 왜 이리 집요하게 [대.한.민.국.] 지우려 하는가

    그러나 필자가 정작 주목하는 바는 이런 법률적 문제보다는, [1948년의 대한민국]을 적대한 [좌익 + 중간파]의 끝날 줄 모르는 [대한민국 지우기] 집념이다.

    극좌는 독립운동 당시도 3.1운동을 [민족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격하했다. 
    그들은 공산당 계급혁명만이 옳다고 우겼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8.15 해방공간에서도 남로당은 이승만·김구 두 민족지도자를 [반동] 이라고 매도했다. 
    그런데 이승만·김구 두 분이 분열했다. 
    비통한 일이었다.

    김구·김규식 두 분은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노선]에 등을 돌렸다. 
    그리곤 1948년 2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2년2개월 후 김일성은 남침했다.

    남한 중간파 지도자들은 북으로 끌려가 수용소에 갇혀 북한통일 방식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다가 생을 마감했다. 

    ■ 이종찬 광복회, 대한민국 흔들기 그쳐라

    그로부터 30년.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극좌 NL 운동권이 야당의 실세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 [그 태어남의 정당성] [국가적 지위 자체]를 아예 지우려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1948년의 대한민국 만들기]에 반대했던 [민족주의] 계열을 또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묻는다!

    [이종찬 광복회] 는 이 [합작] 으로 또 갈 것인가? 
    마오쩌둥 과 합작하다 장제스 는 망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 정체성을 추호의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
  •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김구와 홍명희, 김일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미《인공기》를 만들어 놓은 [평양것들]은 이때는 《태극기》를 내세우며 남한좌우합작파 인사들을 속여 먹었다.
이 회의 2년2개월 후, 저들은 《인공기》흔들며 남쪽으로 쳐내려왔다.
    ▲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김구와 홍명희, 김일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미《인공기》를 만들어 놓은 [평양것들]은 이때는 《태극기》를 내세우며 남한좌우합작파 인사들을 속여 먹었다. 이 회의 2년2개월 후, 저들은 《인공기》흔들며 남쪽으로 쳐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