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6월13일부터 7월까지 단파방송

    1942년 1월 한미협회를 결성하면서 이사장 해리스 목사(미국상원 원목)등 대표3명은 미국 전쟁부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장관에게 ”이승만과 2,300만 한국인들을 대일전쟁에 활용해달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한시간 ,일분 일초가 아쉽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한국인들에게 울려퍼지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지에는 이승만이 참여한 미국 정보국(COI)과 이미 합의한 대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방송할 단파방송 연설문 등 참고문건들을 동봉하였다.

    드디어 D-데이가 정해졌다. COI의 요청에 따라 개국한지 얼마 안되는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에 방송하게 되었다.
     ‘미국의 소리’는 한국에 갔다가 미국간첩 혐의로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선교사 쿤스(Eewin W. Koons, 한국명 君芮彬)가 한국어 방송 감독을 맡았다. (유병은 [단파방송연락운동:일제하 경성방송국] KBS문화사업단, 1991.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5권, 앞의 책)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을 듣난 이는 잘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허랴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천3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충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1942년 6월13일, 단파방송 전파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전해지는 이승만의 목소리는 ‘드디어 일본을 물리친다는 67세 독립운동가’의 흥분과 감회에 떨렸지만 어느 때보다 힘차게 울렸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라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楊楊自得:뜻을 이루었다고 뽐냄)하야 왼 세상이 다 저의 것이으로 알지만은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원봉,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에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중략)....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하고 있는 한길수나 김원봉 연계세력을 의식하여 임시정부의 좌파 김원봉까지 거론하며 ‘일치단결’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 ▲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제작)
    ▲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제작)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수 있난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장군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적을 물리친 역사를 열거하는 이승만은 자신의 미주 외교위원부의 활동도 소개하며 동포들의 분발을 열정적으로 호소한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미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여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3백만 동포여!” 

    절절한 호소와 투지를 뿜는 이승만 목소리는 지금 녹음테이프로 들어도 소름이 돋을 만큼.
    그 열렬한 유성의 진정성과 선전선동의 마디마디가 너무나 리얼하게 심장에 꽂힌다. 
    특히 ‘자유의 기초’ ‘자유의 회복’을 강조하는 의미를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 

    일본 총독부는 이미 그해 4월에 국내 방송전파관제를 일제히 실시, 미국선교사등 모든 외국인의 단파수신기도 압수하였으나 일부 선교사들은 숨겨놓은 수신기로 이승만의 방송을 들었다.
    그들은 한국 기독교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일일이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그때부터 7월까지 여러 차례 우리말과 영어로 방송하였다. 
    이를 몰래 듣는 한국인들을 검거하는 일본 당국은 외국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방송 뉴스를 전해주어야 할 신문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에 이미 폐간되어 있었다.

  • ◆OSS ‘한미 연합작전’ 시도...한인들이 방해...좌절

    “싸워라, 동포여!”를 외치는 이승만은 스스로 만든 ‘한반도 일본군시설 파괴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전쟁에 한인 무장부대가 참전하여 미국과 함께 승전국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서 한국의 독립국 지위를 획득하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세계1차대전후 파리강화회의 결과를 잘 아는 국제정치 박사 이승만은 그때 거부당한 미국의 협력을 얻는 길은 합동군사작전 밖에 없다. 
    이승만은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 전략을 위해 한미협회등 미국인 네크워크와 개인 인맥을 풀가동한다. 

    ★미국 전략첩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서 이승만에게 한국인 청년 50명을 추천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미 이승만은 정보조정국COI(OSS 전신)에 장석윤(건국후 내무장관)을 추천하여 장석윤은 일본군이 점령한 버마 밀림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때였다. 
    이승만은 OSS의 요청에 신이 났다. 그동안 이승만은 한인청년60명으로 ‘한인자유부대’(Free Korean Legion)를 편성하여 특수 훈련을 시킨 후 한국과 일본 점령지에 파견해달라고 집요하게 물밑작업을 벌인 결과, 드디어 미국이 호응한 것이다. 즉, “왜적은 반드시 한국 손으로 물리치자”하며 한미 군사엽합작전을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이승만의 집념 때문이다. 

    그 비밀 로비의 네트워크는 OSS 최고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novan) 아래 게일(Esson M. Gale), 그리고 친분 깊은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이다. 게일은 청년 이승만의 멘토이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1863~1936)의 조카였다. 20대 아승만의 계몽운동을 적극 도와주고 옥중 뒷바리지며 미국 유학 추천서와 세례 받을 목사까지 정해준 게일은 한국최초로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천로역정’을 번역하며 한글을 비롯한 각종 문화개선에 헌신한 한국의 은인이다. 
    이승만의 화려한 인맥은 이처럼 어디서나 구세주로 나타난다.

    OSS는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가운데 12명을 선발,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되었으나 대일전쟁에 한인들을 활용하자는 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한국인 게릴라부대’를 창설하기로 정해진 것이다. 이승만의 ‘한미군사동맹’ 실험의 꿈이 빛을 보게 되었다.
    12명중에는 대한민국 건국후 이승만이 각료로 기용한 사람들도 여럿이다. 
    장석윤이 내무장관을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장기영 (체신장관 역임), 이순용 (내무장관 역임), 김길준 (미군정장관 공보고문 역임), 한표욱 (주미공사 역임) 등 모두 이승만이 조직한 한인동지회 청년들이었다. 

  • ▲ OSS 훈련장, LA 앞바다 카탈리나 섬ⓒ월간조선
    ▲ OSS 훈련장, LA 앞바다 카탈리나 섬ⓒ월간조선
    ★한인들이 미군에 투서, 다 된 밥에 재뿌리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한인자유부대 편성을 위해 ‘무기대여법’을 적용하여 무장시켜달라는 이승만의 끈질긴 요구는 막강한 장애물을 만났다. 무기대여법을 적용하여 원조를 하려면 ‘임시정부 승인’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걸고넘어지는 게 아닌가. 
    좌우진영을 넘나들며 이승만을 방해하는 한길수(韓吉洙)와 흥사단 등 서북파 교민단체, 그들의 투서에 OSS내부 조사분석과 매큔(George M. McCune)은 이승만의 한인자유부대 편성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매큔은 좌성향인지라 한인 좌파에 동정적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5권, 앞의 책).

    이승만은 급해졌다.
    “친애하는 대령, 나는 정적들이 한인뿐만 아니라 나의 평판을 떨어뜨릴 언행을 일삼는 미국인들 사이에도 많다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있으면 그 잘못을 시정하거나 그 오류를 반증할 기회를 갖도록 꼭 알려달라는 말입니다.”(이승만이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 1943.2.9.)

    굿펠로가 나섰다. 그는 “미국정부 기관들이 각기 다른 한인들을 통하여 한국문제를 다루어왔기 때문에 꼬였다”면서 한길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계속 추진하는 것이 한인 파벌들을 결속시킬 것”이라고 옹호론을 폈다. 이승만과 둘이서 한인부대편성을 추진해온 데블린 소령도 공감하였다. 한편 미국 정보기관들의 실무자 회의에서는 “한길수는 배제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승만은 헐(Hull)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음날엔 스팀슨(Stimson) 전쟁부장관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들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은 굿펠로에게 부탁하여 정보참모부에 재촉하는 비망록을 보냈다. 헐 장관에게 면담 요청을 하자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다급한 이승만은 전쟁부 매클로이(John J. McCLoy) 차관보에게 전보를 쳤다.
    “한국인들은 일본말을 할줄 말고 쓸줄 알며 일본인으로 통할 수 있다. 그들은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증오하는 민족입니다. 미국에서 성장하고 훈련받은 한인부대는 미군 또는 연합군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줄수 있습니다.” (이승만이 매클로이에게 보낸 전보, 1943.3.16.)

    매클로이의 답장이 왔다. “귀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였다.
    이유는 미국내 한인청년들의 숫자가 부족하므로 한국인 대대 편성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다만 개인적으로 입대한다면 정보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미국의 대일군사전략이 바뀌었다. 이승만의 주미외교부나 김구의 임시정부를 거치지 않고 소규모의 한국인들을 직접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냅코작전(NAPKO Project)과 독수리작전 (Eagle Project)을 미국과 중국에서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냅코작전은 재미한인과 전쟁포로를, 독수리작전은 중국내 광복군과 일군 탈출 학도병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훈련을 마치고 중경으로 파견 예정이던 한인청년 9명은 주저앉았다. 그러나 미네소타주 소재 군사정보단 언어학교(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Language School)이 이승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한인계 미군부대를 편성하니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승만은 대기중인 9명을 포함 30명의 명단을 보냈다. 
    OSS의 새로운 작전에 따라 중국내 임시정부 휘하의 한인선발 업무가 시작된다. 이에 버마 전선에서 첩보활동 중인 OSS대원 장석윤이 중국으로 들어가 김구와 조소앙을 돕는다. 

    ★일본과 싸우는 ‘한미연합 군사작전’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은 너무나 강했다. 
    ‘무기 대여법’ 원조관리처에 편지를 보내, 한인부대 청설 자금 50만 달러를 요청한다. 미국내 및 중경 임시정부 산하에서 500~1,000명의 부대를 조직 활용하겠다는 계획서를 첨부했다.
    원조관리처는 전쟁부에 떠넘겼다. 이승만은 전쟁부 장관에게 또 편지와 계획서를 보냈다, 전쟁부는 중국 관련은 중국 대사관에 내라고 했다. 이승만은 중국무관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호의적으로 검토하겠다며 귀국하였다.
    이번에는 합동참모본부 의장 마셜(Geoge D. Marshall)에게 같은 계획서를 보냈다. 이를 검토한 일본정보 담당 관리는 ‘한국승인은 안된다“고 냉혹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그 계획서를 보냈다. 일주일이 넘어도 답이 없자 독촉 전보를 또 쳤다. (방선주 [미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1993)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