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타의 위치(오른쪽 위 빨간풍선 표지). 미국에서 출발한 루즈벨트 대통령 함대는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들어와 왼쪽 아래 몰타(Malta)에 기착. 하룻밤 자고  비행기로 바꿔타고 크림반도에 도착, 자동차로 6시간 달려 얄타 회담장에 들어감. 휠체어를 탄 '환자' 루즈벨트는 직선거리 약 1만㎞를 여행하고 녹초가 되었다.(구글지도 캡처)
    ▲ 얄타의 위치(오른쪽 위 빨간풍선 표지). 미국에서 출발한 루즈벨트 대통령 함대는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들어와 왼쪽 아래 몰타(Malta)에 기착. 하룻밤 자고 비행기로 바꿔타고 크림반도에 도착, 자동차로 6시간 달려 얄타 회담장에 들어감. 휠체어를 탄 '환자' 루즈벨트는 직선거리 약 1만㎞를 여행하고 녹초가 되었다.(구글지도 캡처)
    '냉전의 잉태' 얄타, 한반도 분단의 불씨 피우다

    레닌이 혁명직후 한때 포기했던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
    2차대전까지 20여년간 반쯤은 외세 지배를 당했던 우크라이나,
    스탈린이 점령한 뒤 40여년간 공산주의 식민지 우크라이나,
    독립 20여년 만에 지금 다시 푸틴이 먹으려 덤비자 필사의 방어전을 벌이는 우크라이나, 그 기구한 운명의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 크림(Crimea)반도 남단 얄타(Yalta)에서 2차 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1945년 2월(4~11) 냉전시대를 열었다는 얄타회담, 미국 루즈벨트가 소련 스탈린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내주어 동유럽과 중국대륙과 한반도까지 “팔아먹었다”는 그 얄타로 다시 가보자.

    ★스탈린의 독무대...‘중환자’ 루즈벨트 장거리 여행시켜 ‘농락’
    휠체어(wheel chair)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63세 대통령 루즈벨트, 1945년 1월20일 그는 연속 네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큰 아들 제임스에게 유언장을 남겼다. 
    그리고 22일 밤, 수행원들을 데리고 방탄열차에 올라 워싱턴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8시30분 미해군 중형 순양함 퀸시(USS Quincy)호는 뉴포트 뉴스(Newport News) 항을 출항, 휠체어를 탄 루즈벨트는 구축함 8척과 순양함 9척의 보호를 받으며 대서양을 건넌다. 그는 언제나처럼 최측근 홉킨스(Harry Hopkins)와,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대신 외동딸 애나 루즈벨트 베티커(Anna Roowsvelt Boettiger)를 동반하였다. 
    1년2개월 전 카이로와 테헤란을 왕복한 장거리 여행을 했던 루즈벨트의 이번 목적지는 흑해연안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 ‘친구’로 만들어야 할 스탈린이 회담장소로 얄타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세르히 플로히 [얄타:8일간의 외교전쟁] 허승철 번역, 역사비평사, 2010)

    스탈린은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처음 루즈벨트를 만났을 때 “이 친구 오래 못 살겠군” 직감하였다고 한다. 카이로 회담후 곧바로 테헤란에 온 휠체어의 미국 대통령은 지쳐있었다. 카이로 선언에 두 말 없이 찬성한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대일전쟁 참전을 요청하며 전후 한반도 신탁통치 이야기를 하자 흔쾌히 화답하면서, 부동항으로 부산(釜山)의 할양(割讓)을 떠보았다. 확답은 못 받았지만 거부도 없었다. 이번 얄타 회담에서 결심해야 할 문제이다. 

    ‘중환자’에 가까운 루즈벨트를 추운 겨울 얄타까지 끌어들여 영토적 야심을 채우려는 스탈린의 완벽한 음모,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 루즈벨트는 야수의 그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 얄타 회담이 열린 미국대표단 숙소 리바디아 궁전(자료사진)
    ▲ 얄타 회담이 열린 미국대표단 숙소 리바디아 궁전(자료사진)
    ◆루즈벨트의 마지막 꿈 ‘유엔 창설’...“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좋다”

    불과 29세에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된 루즈벨트는 39세때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뉴욕 주지사가 되었고 1932년 40세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념의 사나이 루즈벨트는 전무후무한 3선 대통령에 이어 4선에 올랐다. 그동안 루즈벨트는 휠체어에 탄 모습을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대중 앞에 서는 행사엔 남모르게 부축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회담에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독일 패망이 눈앞에 다가서자 영국 처칠과 소련 스탈린을 불러 전후저리 회담을 여는 루즈벨트의 회담 의제는 ⓐ독일 영토문제와 국제제재 ⓑ소련의 대일참전 수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가장 큰 필생의 목표는 ‘전후 평화로운 세계 만들기’ 즉 국제연합(Uniter Nations: UN) 창설이다. 그것은 윌슨 대통령이 실패한 국제연맹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자 루즈벨트 정치철학의 실현이었으므로 “유엔만 창설된다면 다른 어느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스탈린의 야망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영토 회복은 물론, 레닌의 국제공산당 이상주의를 넘어서 소련 역사상 최대의 ‘스탈린 제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스탈린은 이미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하는 대로 공산화 작업을 진행하였고, 루즈벨트 생일 1월30일엔 독일 수도 베를린 70㎞에 교두보를 설치하였다.
    노르망디 상륙후 서부에서 독일로 진격하는 미-영 연합군은 소련군의 동부전선에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감사 아닌 아첨까지 서슴치 않았다. 스탈린의 신뢰를 얻어놔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유엔 참여를 성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상이몽, 스탈린은 가능하다면 미-영과 3국수뇌회담 중에 베를린을 점령했으면 좋겠고 영토협상에 앞서 최대한 점령지를 넓혀야한다는 목표로 독전하는 판이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루즈벨트를 육해공 1만㎞가 넘는 여행으로 녹초를 만들어 ‘추운 겨울’의 얄타에서 뜻대로 요리하려고 작심, 이 목적을 위해 스탈린은 “항공여행을 못 한다”는 거짓말로 루즈벨트가 원하는 회담장소 ‘따뜻한 지중해’ 로마 등을 거부했던 터이다. 

    ★입벌린 채 멍한 루즈벨트의 표정==독일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얄타에서 조금 떨어진 회담 장소 옛 왕궁들만이 성한 건물이었다. 영국 처칠은 투덜거렸다. “우리가 10년 걸려 찾는다 해도 세상에서 얄타보다 더 나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뒷날 회고록에 썼다. 
    처칠의 주치의와 소련 의사들은 루즈벨트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대통령은 나이보다 너무 늙고 야위고 핼쑥해 보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만 본다” (세르히 폴리히, 앞의 책). 
    루즈벨트 외동딸 애너는 아버지 건강을 챙기느라 처칠 수상의 중요만 면담조자 기피한다. 처칠도 딸 사라(Sarah Churchill)를 동반,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도 딸 캐스린(Kathleen Harriman)이 따라와서 회담을 도왔다.
    우크라이나 대사를 역임(2006~8)한 허승철(고려대)교수가 번역한 역사의 현장 증언록 [얄타의 딸들](The Daughters of Yalta, 캐설린 그레이스 카츠 지음, 책과함께, 2022)에 그 세 여성은 생생한 목격담과 체험의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 

    ★사면팔방 도청 감시==얄타의 3개 궁전은 리바디아 궁(미국), 보론초프 궁(영국), 유스포프 궁(소련)으로 3개국대표단 수백명이 나누어 머물렀는데, 이들 궁전들은 모두 소련 정보당국이 미리 도청장치를 빈틈없이 설치하고, 지향성 마이크로폰(directional microphone)까지 동원하여 먼 거리 대화까지 녹음했다. 넓은 궁정과 도로마다 소련 경비병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출입 검사와 비밀탐색을 벌였다. 이 국제첩보작전의 총책임자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두목(내무장관) 베리야(Lavrentiy Beria,1899~1953), 현장 총책은 외아들 전기공 세르고(Sergo Beria)가 맡았다. 세르고를 불러 직접 지령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그는 테헤란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얄타에서도 회담 전에 이미 미국과 영국의 계획들을 속속들이 보고받았다. 미국과 영국 선발대는 도청장치를 탐색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 얄타회담의 스탈린과 루즈벨트.(자료사진)
    ▲ 얄타회담의 스탈린과 루즈벨트.(자료사진)
    ◆‘알아서 미리 주는’ 루즈벨트...스탈린은 ‘더 달라’ 몽니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던가, 유언장을 써놓고 회담에 임한 루즈벨트의 관심은 오로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엔 창설에 소련을 참여시키는 것, 또 하나는 대일전쟁에 끌어들이는 것. 미군부는 소련의 참전에 대하여 대통령을 졸라대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달성한 루즈벨트는 회담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난다.

    유엔 투표권 ‘1국1표’ 원칙 깨고 소련에 3표 주다
    유엔 창설에 대하여 스탈린은 안정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반대하였다. 협상카드였다. 목적은 소비에트 연방의 16개 공화국을 모두 독립국으로 대우하여 투표권16표를 요구하였다. 루즈벨트는 난감하다. 스탈린은 “병자를 짜증나게 하면 이긴다”며 시간을 끄는 몽니를 부린다. 소련외상 몰로토프와 측근 홉킨스 등 실무회담에 넘겼지만 결론은 루즈벨트 몫이다. 마침내 루즈벨트는 우크라이나 1표와 벨라루스 1표를 더 주기로 결정한다. 
    유엔 회원국 투표권 ‘1국1표’ 원칙을 깨버리고 특별히 소련에만 3표를 선물로 준 것이다.
    반대하던 목소리도 쑥 들어갔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발소리에 미국도 영국도 2차대전의 스탈린에게 맡긴 듯, 음흉한 독재자 앞에 큰 소리를 낼 용기는 없어진지 오래다.
    필생의 꿈을 이룬 루즈벨트는 안도하였다. 스탈린이 감사하다며 유엔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인생 최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럽 전후처리 ‘핵심’ 폴란드 포기...국경도 스탈린이 그리다
    1939년 독일침공 이래 반나치 투쟁을 벌이던 폴란드는 스탈린이 침공하자 소련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쓴다. 즉, 골치 아픈 폴란드의 반란군을 독일군이 진압하도록 방관하고, 독일군이 물러가자 남아있는 폴란드 지식계층 2만2천여명을 집단 학살한다. 1940년 카틴 숲 학살(Katyn Forest Massacre)이다. 그리고 공산당 정권(루불린 정권)을 세웠다. 폴란드 민주세력은 파리에서 망명정권을 세우고 전쟁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한다.
    얄타에서 영국 처칠은 “폴란드 때문에 참전했다”면서 런던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스탈린은 완강하다.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시켰고 루불린정권은 해방정권이므로 인민의 지지가  높으니 다른 정권을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처칠은 폴란드 문제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중재안을 낸다. 기존 정권은 제외하고 ‘새로운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자는 것, 바로 해방 한국에 진주한 미국이 남북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스탈린은 기다렸다는 듯 폴란드의 자유선거를 통해 새 정부를 만들겠다며 배짱을 퉁긴다.
    결과는 스탈린의 승리였다. 처칠의 흥분한 웅변도 루즈벨트의 맥빠진 중재도 무력하다.
    독일과 폴란드의 새로운 국경 오데르-나이세 강 연결선도 스탈린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세르히 플로히, 앞의 책). 결국, 루즈벨트나 처칠은 ‘반대는 하였으나 체념’으로써 ‘미필적 고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독일 항복후 영토분할 점령에 프랑스 참여, 독일의 전쟁 배상, 동유럽과 발칸 국가들은 저절로 ‘스탈린의 제국’ 영토로 승인받게 되었다. 발칸반도 국가 중 그리스 하나만 영국의 영향력이 겨우 인정되었다.
    유명한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1941)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14개조항 중 첫 3개항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양국은 영토나 기타 어떤 세력 확장도 추구하지 않는다.
    Ⓑ양국은 국민들의 자유롭게 표현된 소망에 어긋나는 어떠한 영토적 변화도 원치 않는다.
    Ⓒ양국은 모든 국민이 그 속에서 영위할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한다. 또 양국은 강압적으로 빼앗겼던 주권과 자치 정부를 인민들이 다시 찾기를 원한다.
    과연, 얄타의 영토거래는 이 원칙들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 두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러면서도 루즈벨트는 이 대서양헌장을 기초로 유엔 헌장을 만들었다.
  • 얄타회담 스탈린, 루즈벨트,처칠. 루즈벨트 뒤에 앨저 히스(원내).
    ▲ 얄타회담 스탈린, 루즈벨트,처칠. 루즈벨트 뒤에 앨저 히스(원내).
    ★암호명 ‘알레스’=앨저 히스...소련의 훈장 받고 10년간 간첩질
    스탈린을 ‘친구’로 만들려는 루즈벨트가 얄타회담에 앨저 히스를 데려간 것은 당연하다. “변호사 중의 변호사”라며 루즈벨트는 국무부 고위관리(특별정무국 부국장) 하버드 출신 젊은 변호사 앨저 히스를 총애하여, 그에게 유엔 창설 작업을 맡겼다. 얄타에서는 특히 소련의 유엔참여를 위해 스탈린을 ‘유혹’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앨저 히스는 루즈벨트의 충실한 심복이 되어, 유엔 헌장과 조직, 강대국간 갖가지 조율에 앞장 선 주인공이었다. 그는 거기서 미국의 대소전략이 담긴 ‘블랙북’(Black Book)의 관리자, 유엔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창안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 방첩부가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일환으로 암호를 해독한 소련 비밀문서에 ’얄타의 알레스‘가 나타났다.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소련 스파이망에서 10년이나 일했고 소련의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얄타회담 후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소련 외우차관 비신스키의 감사표창을 받았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알레스‘는 누구? 앨저 히스였다.
    앞장에서 설명한 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가로막은 소련간첩이 얄타에 가서 ’유엔병‘ 걸린 루즈벨트를 움직여 그 많은 ’선물‘들을 스탈린에게 제공한 것일까? 소련에게 유엔 투표권 3표를 준 것도 앨저 히스의 장난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유엔창설이 확정되자 루즈벨트는 얄타에서 앨저 히스를 유엔 초대 사무총장으로 지명한다. 미국 언론들은 ’평화시대의 젊은 세계 지도자‘를 반기며 대서특필하였다.

  • 얄타회담 3거두, 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시거를 들고 있는 처칠 옆에 루즈벨트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자료사진)
    ▲ 얄타회담 3거두, 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시거를 들고 있는 처칠 옆에 루즈벨트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자료사진)
    ◆스탈린의 마지막 먹잇감 ‘코리아의 운명’

    루즈벨트의 꿈 ‘유엔 창설’이 이루어지자 그는 너무나 관대한 자선가로 변한 것일까.
    회담 초기부터 소련의 대일참전 이슈를 던져보았지만 스탈린은 막판까지 묵묵부답, 짜증나고 초조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개인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스탈린은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다. 거기엔 테헤란 회담 때부터 요구했던 대일참전의 대가,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복음이 쓰여져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또 딴청이다. 영유권 문제와 대일전 참전 협상은 별개로 해야한다. 
    일본에 선전포고 한다면 일본땅 만주국과 한반도로 쳐들어가 점령하게 되지 않는가.
    만주엔 청일전쟁때 차지했던 요동반도 대련, 여순이 있고, 러일전쟁 때까지 건설한 남만주 철도가 있다. 게다가 한반도는 10년간 품속에 안았다가 일본에 빼앗긴 황금알 같은 땅, 이미 루즈벨트에게 부동항 부산을 갖고 싶다는 말까지 건넨 터였다.

    ★스탈린, 루즈벨트와 단독 밀담...30분도 걸리지 않았다
    2월8일 오후 3시30분, 중요한 담판일수록 루즈벨트와 단둘이 사적인 만남으로 해결하는 스탈린은 이날도 외상 몰로토프만 데리고 리바디아 궁전의 루즈벨트 방으로 숨듯이 들어섰다.
    이미 모든 걸 다 주고 다 갖기로 작심한 남녀처럼, 두 사람은 의미있는 웃음의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았다. 
    “우리가 대일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은 무엇인가요?”
    스탈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돌진한다.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가 종전 후에 소련에 양도되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루즈벨트는 이미 편지로 알려준 내용을 확인해준다. 스탈린이 참전을 결정했나보다.
    그러나 스탈린은 못 들은 사람처럼 전혀 다른 표정으로 루즈벨트를 정시한다.
    “요동반도의 대련,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한 만주철도를 소련이 관할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외몽고의 현상유지도 지지해 주시오.” 
    루즈벨트는 사전에 해리만을 통해 양해를 구했던 말 ‘장제스’를 꺼내 설명한다.
    “그것은 중국과 협의해야할 문제인데...장세스와 논의할 기회가 없었다”고 얼버무린다.
    스탈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소련과 일본은 지금 불가침조약국이다. 이런 상태에서 소련 국민들에게 참전할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내가 말한 조건이 충족되면 국민들도 이해할 텐데...안 되겠네요”
    협박이다. 루즈벨트는 당황했다. 고질인 혈압과 열이 오르고 참기 힘든 짜증이 난다. 
    “중국과 이야기하면 세계가 다 알게 될 텐데...” 그는 ‘비밀거래’를 암시하는 말을 던졌다.
    흥정은 성립된다. 3개국만의 서면 결의로 확정하자는 스탈린의 말에 루즈벨트가 끄덕였던 것이다. 드디어 소련의 참전이 결정된 순간이다. 스탈린은 병든 미국대통령을 농락하며 남의 땅 주어먹기에 바빴다.
    소련의 참전일자는 다른 날 결정된다. 독일 항복 후 소련군을 극동으로 이동하려면 3개월쯤 걸리니 그때로 하자고 스탈린이 정했다. 

    ★스탈린이 노리는 남은 땅 ‘한반도 흥정’
    한국의 산탁통치 문제를 루즈벨트가 꺼냈다. 
    “필리핀은 신탁통치 40년 만에 독립시켰는데 한국은 20~30년은 해야겠지요?”
    “아닙니다. 기간은 짧을수록 좋겠지요.” 스탈린은 신탁통치 따위 안중에도 없다.
    테헤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의 독립준비기간 ‘신탁통치’(trusteeship)에 동의하면서도 스탈린 자신은 뜻이 다른 ‘후견’(tutelage)이라고 적었다. 소련이 후견인이 되어 위성국을 만드는 기간은 길 필요가 없다. 수십 년 써먹은 코민테른 수법이다. 
    그해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김일성정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까지 1년도 아닌 만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은 앞으로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겁니까?” 스탈린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단박에 부정하는 루즈벨트는 그때 스탈린이 한반도를 소련의 보호령 이상으로 구상하고 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보호령은 아니라 해도 미국 군대는 한국 내에 주둔시키겠지요.” 스탈린은 집요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각적이고 분명한 대답에 스탈린은 또 한번 놀랐다.
    ‘좋아. 아주 좋아’ 스탈린은 심각한 얼굴과 달리 뱃속에 웃음이 폭발한다. 
    ‘그렇다면, 패전 일본 영토 중에 열도는 미국, 한반도는 소련...좋았어, 아주 좋았어...’

    이때 루즈벨트-스탈린의 비밀회담은 소련의 참전 흥정에서 마지막 ‘한국 거래’가 끝나기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얄타:8일간의 외교전쟁]을 저술한 세르히 플로히(Serhii M. Plokhy)는 그날 배석자 몰로토프, 해리만과 두 통역자의 증언이 '30분내'로 일치했다고 책에 써 놓았다. 
    그 30분에서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몇 분이 걸렸을까? 절반 15분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