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통해 노출된 보수진영의 이념적 허약함… 조선조 대의명분적 사고를 보는 듯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시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각)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바이든이 승리하면 백악관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몇일 전 “정권 이양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한 데 이어 사실상 선거결과에 승복할 것임을 연이어 밝힌 것이다.

    그가 각 주에서 제기했던 30건 이상의 선거부정 관련 소송은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대부분 기각이나 철회된 상태다. 미 대선 선거인단은 다음달 14일 투표를 진행하며, 대통령 취임식은 내년 1월 20일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도 ‘기현상’을 하나 남겼다.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불복해서 부정선거, 사기투표를 주장하고 나오자 국내 보수우파가 프럼프를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한 전에 없던 특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이른바 애국보수 층의 지식인 그룹 상당수와 구독자 20만~60만명 이상을 자랑하는 국내의 대형 보수 유튜브 채널 대부분이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국내 보수우파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의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 구도를 통해 미국의 정치권과 대선을 파악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서는 미국 대선을 선(善)과 악(惡)의 구도로 이해하는 이른바 우파 오피니언 인사들의 글로 도배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필자가 가입된 보수우파 성향의 한 카카오톡 단체방(단톡방) 회원들은 아예 미국의 부정선거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사이비 보수로 매도되는 분위기였다. 아마 다른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국내 이념대립 구도로 미국 선거를 바라보다


    미국 대선의 부정을 믿는 우파진영의 많은 이들은 이번 미국 대선을 중국(中國)의 영향력 하에 놓인 좌파진영과 이에 맞서 자유민주의를 지키려는 우파진영의 대결 구도로 인식하는 듯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이른바 우파인 공화당과 트럼프가 대선에 패배하는 것을 곧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자유민주주의 패배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렇지 않아도 지난 4·15 총선을 부정선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국내 일부 보수진영에게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필자가 미국 대선이 끝난 후 지난 3주간 구독자 수십만명을 보유한 대형 보수 유튜브 방송을 유심히 관찰하고 분석해 본 결과 지난 4·15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고 주장해온 곳 대부분이 이번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에도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보수진영 다수가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에 쉽게 휩쓸리게 된 것은 ▲국내의 좌파정권에 대한 혐오 ▲우리의 이념대립의 구도를 미국에 투영 ▲4·15 부정선거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이 겹치면서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낸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수진영의 희망으로 떠 오른 집권 초반의 트럼프


    국내 우파진영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된 그의 집권초반 시절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7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은 UN총회 연설에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김정은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로켓맨’이라 부르며 “김정은은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뒤 목숨을 잃은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과 일본인 납치 사건도 언급했다.

    2017년 11월 8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국회에서 아주 인상 깊은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의 58%를 북한 체제와 인권유린 실상을 비판한 것에 할애했다.

    2018년 1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 의회에서 진행한 시정연설 도중 탈북민 지성호씨(현 국민의 힘 국회의원)를 국회의원들과 관중에게 깜짝 소개했다. 또한 탈북민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그들의 탈북 이야기를 듣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 세 번의 연설은 국내 우파진영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뒤이은 주사파 정권의 탄생에 절망하고 있던 국내의 애국보수진영은 트럼프의 이 연설에서 깊은 위로와 감명을 받았다.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에 싸인한 트럼프


    하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이 갑자기 평화공세를 펼치면서 상황이 급반전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화해 제스처는 북한이 지난 수십년 간 반복해온 긴장고조와 평화공세라는 대남혁명전략의 뻔한 패턴에 불과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진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위해 북한에 특사로 다녀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3월 8일 미국으로 건너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 실장을 만난 트럼프 대통령은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정은과 금년 5월까지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훗날 밝혀진 것이지만 이 정상회담은 트럼프의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때 트럼프-김정은 두 사람이 서명한 미북 공동합의문의 내용을 본 국내의 보수진영은 그야말로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합의문에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핵우산 폐지가 다 포함된 북한식 용어로 북한이 지난 수십년 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대남혁명전략의 한 부분이었다.

    미북정상회담 다음날인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남북평화공세 분위기에 밀려 그야말로 대참패를 당했다. 국내에서 중요 선거를 앞둔 날 미북정상회담을 잡은 것은 북한의 뻔한 의도였겠지만, 트럼프는 국내 애국보수 세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이 날짜를 굳이 피하지 않았다.

    보수진영의 희망과 달리 미북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문제에서 오히려 좌파인 문재인 정부와 철저히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조 대의명분적 사고방식을 보는 듯


    2018년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이후에도 트럼프는 김정은을 두 번이나 더 만났다. 그결과 바로 1년 전까지 깡패국가 지도자 취급받던 김정은의 대내외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안보 참모나 국방부 관계자와 협의도 없이 한미군사훈련을 축소하거나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트럼프는 김정은의 편지를 수시로 공개하면서 “편지가 아름답다”거나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독재자를 상대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었다.

    훗날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난 것은 오직 재선을 위한 사진찍기 용 쇼였을 뿐”이라고 폭로했다. 결과적으로 북미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이 아니라, 김정은에게 핵무기 완성과 운반체계를 고도화·정밀화 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되었다.

    하지만 국내 보수우파 상당수는 미북회담 후의 실망스러운 트럼프의 행보에도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그 사이 중국과 대립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 트럼프를 한반도를 넘어선 세계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 등가시켜서 이해하는 일종의 대의명분적인 사고방식이 더 크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과 우리의 문제는 10년 뒤 혹은 100년 뒤 생사(生死)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문제는 물어볼 것도 없이 당장 내일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임이 명확하다. 그런데도 트럼프의 대(對) 중국 정책을 우리 눈앞의 생존문제보다 더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보수우파 다수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조선 인조 때 신하들처럼 대의명분의 논리에 갇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트럼프의 모든 대북 정책을 우리의 이해관계가 아닌 트럼프의 대전략 일부로 이해하며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 힘, 결코 가볍지 않아


    미국인들은 세계를 선도하는 모범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어 왔다. 오늘날 같은 민주주의를 만들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미국의 역사는 세계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을지 몰라도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1620년 9월 메이플라워호가 미국에 첫발을 뒤디기 전 배 위에서 이미 미국식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우리의 병자호란 이전부터 수백년간 그들은 자신들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선거부정이 있었다면 그들 나름의 민주적인 방식과제도, 그에 따른 절차로 그들이 해결할 문제인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미국의 정통 주류 언론이 트럼프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보여준 냉정한 자세와 대통령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선거관련 공무원들의 중립적 태도, 트럼프의 무차별적인 소송에도 과학적 사실에 견지해 판결을 내리고 있는 법원의 모습 등은 미국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미국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우리는 외교를 통해 우리의 국익에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