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가담도 않은 김재규를 혁명주체로 묘사…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를 영웅으로 그려
  • ▲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한 장면이다. ⓒ뉴시스
    ▲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한 장면이다. ⓒ뉴시스
    Ⅰ. 김재규의 ‘의인 또는 영웅화’는 반역사적 행위다

    김재규(金載圭, 1926-1980)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국가원수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자신의 권총으로 시해(弑害)한 대역무도(大逆無道)의 국사범(國事犯)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안보와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지급된 총으로 대통령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패륜행위를 저질렀다. 6.25전쟁 37개월을 겪으면서 북한군에게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서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될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살해하는 참담한 만행을 자행했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김재규는 재판정에 제출한 ‘항소 및 상고이유서’에서 자신의 패악적(悖惡的) 행위에 대해 참회는커녕 오히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패륜적 행위를 ‘10.26구국혁명’ 운운하며 미화하는 인민수심(人面獸心)의 뻔뻔함까지 보였다. 그런 그를 박정희 대통령은 군 시절은 물론이고 5.16이후부터 죽는 그날까지 아끼고, 보살피고, 챙겨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같은 군인으로서, 때로는 부하로서, 때로는 동기생으로서, 때로는 막내 동생처럼 여기며 부족한 것을 메워주고, 모난 것을 덮어주고, 서투른 것을 보듬어주고 다독거려가며 보살펴 준 햇수가 무려 20년이 넘었다.

    기껏해야 육군준장으로 끝났을 김재규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무리를 해가며 중책을 거듭 부여했다. 5.16이후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은 18년에 거쳐 김재규에게 호남비료사장을 시작으로 6사단장, 6관구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단장,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의 분에 넘치는 요직을 부여하며 국가에 헌신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다른 군인에 비해 능력과 경력 면에서 뒤떨어진 김재규를 육군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김재규는 특이하게 6.25전쟁을 치르면서 이렇다 할 전공을 못 세웠다. 그러다보니 군인으로서 전쟁 때 당연히 받아야할 무공훈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군인이면서 군인답지 못한 군인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받은 무공훈장들은 모두 5.16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받은 훈장들이다.

    김재규는 그런 박정희 대통령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나 겨냥할 총부리를 대통령 가슴팍과 뒷머리에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중앙정보부장은 고사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국가원수에 대한 시해였고, 명백한 국가반역 행위였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동기는 어이가 없다. 대통령이 자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호실장의 말을 더 신뢰한다고 판단한 충동행동이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내고 그만 두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언강생심, 김재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차례로 살해했다. 장관 및 중앙정보부장 시절 그 누구보다 박 대통령을 찬양하고, 심지어는 종신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그가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경질설이 나오자, 그동안 수 십 년에 걸쳐 자신을 고위 장성 및 고위 관료로 키워준 박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고, 그것도 부족해 확인 사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는 인간적으로나, 같은 고향사람으로서, 또 군 출신으로서, 그리고 자신을 국회의원에 이어 장관과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해 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이었다.

    그런데 국가원수를 그렇게 무참히 살해한 패악무도(悖惡無道)한 김재규의 그런 국가반역 행위를 ‘의인 또는 영웅’으로 추켜세우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 바로 2020년 4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다. 대법원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수괴 미수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김재규를 ‘영웅화’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영화를 갑작스럽게 상영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훼손하는 반국가적 행위이자, 대한민국 현대사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행위이다.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이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잘 살아보자’, ‘수출만이 살길이다’, ‘할 수 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기치 아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자주국방을 건설하며 이룩한 대한민국 발전의 대명사인 한강의 기적과 조국근대화를 폄하 또는 부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결코 제작되어서도 상영되어서도 안 될 대한민국에 해악만을 끼칠 반(反)역사적, 반(反)국가적, 반(反)사회적 영화라는 것을 똑똑히 밝힌다.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Ⅱ. 김재규는 5.16혁명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혁명동지’도 아니었다

    김재규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처럼 5.16혁명의 모의자도, 참여자도, 더군다나 5.16새벽 박정희 장군과 함께 총알이 난무하는 한강교에 서 있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김재규는 5.16혁명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5.16과는 전혀 무관한 자이다. 5.16혁명에는 엄선된 군의 유능한 장군 및 영관급 장교들이 참여했다. 5.16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 국무총리 김종필(金鍾泌)의 증언에 의하면, 5.16혁명에 참가한 핵심 멤버, 즉 혁명동지는 29명뿐이다. 여기에 김재규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5.16혁명 동지들은 혁명 모의(謀議)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김재규의 이름이 거론되거나 참여시키자고 의견을 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볼 때 김재규는 군대 내에서 별로 신망도 없었고, 또 실력도 인정받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군인’이었다.

    그렇다면 평범한 군인 김재규는 과연 5.16혁명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 바로 그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는 육군본부에서 작성한 김재규의 27년간의 군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김재규 장교자력표〉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5.16이 일어난 그날 그때, 김재규는 ‘임시(臨時) 준장’으로 국방부 총무과장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진급 규정에는 임시진급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임시 진급제도는 장교가 진급할 때 어느 한 계급에서 차상위(次上位) 계급으로 바로 진급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시 계급’을 거쳐 정식으로 진급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때 바로 준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임시 준장으로 있다가 그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정식으로 준장이 되는 제도이다. 그래서 김재규도 1959년 육군대학 부총장 시절 육군대학 총장이던 이종찬(李鍾贊) 중장의 ‘지나친 배려’에 힘입어 임시 준장이 되었다. 그러다 5.16직후인 1961년 6월 1일, 박정희 장군의 도움을 받아 정식 준장이 되었다.

    김재규의 임시 준장 진급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군에서는 진급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며 뒷말이 무성했다. 그것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던 김재규 대령이 준장 진급 심사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교통사고가 있었다. 김재규는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군용차량에 여자를 태우고 부대복귀 중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가 나서 탑승했던 여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 대령은 장군 진급은 고사하고 예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군기위반 사건을 무마하고 김재규를 대령으로 진급시킨 사람이 바로 당시 육군대학 총장이던 이종찬 중장이었다.

    6.25전쟁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 장군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를 파병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맞섰던 기개 높은 장군이었다. 그런 관계로 당시 군의 고급장교들은 이종찬 장군을 따르며 존경했다. 그 중에는 육군본부 작전국차장으로 있던 박정희 대령도 있었다. 그런 이종찬 장군이 김재규 대령을 감싸고 돌뿐만 아니라 장군 진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자, 예편 위기까지 몰렸던 김재규는 위기를 모면하고, 비록 임시 준장이지만 장군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김재규의 떳떳하지 못한 장군 진급에 군내에서는 부정적인 말이 나돌았다. 한때 3사단에서 김재규를 참모로 데리고 있었던 최석(崔錫, 일본 와세대 대학 졸업, 육군중장 예편) 장군은 그해 장군 진급자 명단을 받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이런 일이 있나, 원 세상에 김재규가 장군이 되다니…살다보니 별꼴 다보네. 뭐, 김재규가 장군이 돼? 정발로 별꼴 다 보네…”하면서 뒷짐을 지고 한참 동안 집무실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위의 사실로 볼 때 김재규는 장군 진급은커녕 대령으로 강제 예편되어야 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영화에서 5.16혁명을 주도한 사람으로 그려진 것은 역사의 진실과 가치를 부정하는 어불성설이다. 5.16혁명은 반공을 앞세우며 배고픔에 허덕이는 나라를 바로 살리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아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에 가득 찼던 엘리트 중견 간부들이 일으킨 ‘구국의 군사혁명’이었다. 그런 국가거사에 중대한 군기위반을 한 김재규가 감히 끼일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런데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김재규가 5.16혁명에 처음부터 참여한 혁명 주체로 그리고 있다. 또한 김재규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혁명을 같이 한 동지로 묘사함으로써 김재규가 마치 5.16에 직접 가담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깔린 ‘역사 기만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김재규를 혁명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똑같은 혁명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부마사태를 전후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급기야는 “이러려고 혁명했습니까? 혁명의 배신자를 처단하겠습니다”라며 마치 김재규가 나라를 위해 ‘정당한 행위’를 한 것처럼 보여 주고 있다. 김재규가 그런 인물도 그런 역할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업무추진면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역사사실을 왜곡 날조한 행위다. 참으로 분개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대한민국 영화 수준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더군다나 그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역사의 범죄행위’에 동원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혼신을 다하여 연기하고 있으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이는 남산의 부장들에 참여한 배우들이 역사적 사실을 모른 채 “잘못된 영화에 잘못된 배역을 맡아 잘못된 역사를 연기하고 있는 잘못된 배우”라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럽다. 다시는 그런 불행한 영화도, 그런 불행한 배우들도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작사는 이 영화의 상연을 즉각 중단하고 대한민국 국민들과 유가족들에게 정중히 사죄(謝罪)해야 될 것이다.

    Ⅲ. 뛰어난 군인 박정희 vs 앞 가름 못하는 군인 김재규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는 고향이 같다. 둘 다 경북 선산군 출신이다. 박 대통령은 낙동강에서 떨어져 내륙에 위치한 선산군 구미읍 출신이고, 김재규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선산군 선산읍 출신이다. 당시 구미읍은 행정구역상으로 선산군에 속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보다 9살이 더 많다. 집안의 큰 형님뻘이다. 박 대통령이 1917년생이고 김재규는 1926년생이다. 두 사람의 공식적 만남은 해방된 후인 1946년 9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군인이 되겠다는 웅지를 품고 만주의 4년제 사관학교인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일명 만주 육군군관학교이다. 그때가 1940년이다. 신경군관학교에서 박정희는 예과과정에서 수석 졸업하여 그 특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였고, 졸업 후 만주국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정희는 임관 후 중국 만리장성 인근에 위치한 만주군 제8단(團, 연대급 규모의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 중위로 진급한지 얼마 안 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박정희는 북경과 천진에서 우리 교포들의 귀국을 돕다가 1946년 6월 뒤늦게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얼마 안 돼 미 군정청에서는 장차 독립될 나라의 간성을 육성하기 위해 태릉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창설하여 2기 생도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박정희와 김재규는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때가 1946년 9월경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를 거쳐 군인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김재규도 고향인 선산보통학교를 나와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 특별간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김재규는 모교인 선산보통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다가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생이 되었다.

    임관 후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는 그 능력만큼 군대생활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가 능력을 발휘하며 뛰어난 군인으로 성장한 반면에 김재규는 앞 가름도 제대로 못하는 군인이었다. 박정희 소위는 전방의 38도선 경계를 맡는 제8연대 소대장에 보직되어 전방생활을 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후방인 대전의 2연대에서 근무 중 1947년 6월에 연대장에 의해 파면되었다가 1948년 10월 말 군에 다시 복귀하였다. 군에서 파면된 김재규는 고향으로 내려가 김천중학교와 대구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했다. 대륜중학교 체육교사 시절 그의 제자가 바로 10.26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던 박선호 육군대령이다.

    군에 복직한 김재규는 주로 후방의 예비부대를 전전하였다. 6.25전쟁 초기 3사단 인사참모로 이종찬 사단장을 3개월 정도 보필하다가 이후에는 전선을 떠나 주로 한직(閑職)인 국민방위군을 관리하는 국민방위국, 106예비사단 및 예비5군단, 육대 총장보좌관 등 후방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전쟁 중에 전투를 하지 않은 특별한 군인에 속했다. 그 과정에서 김재규는 제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육군대학 총장으로 밀려난 이종찬 장군으로부터 보직과 장군 진급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김재규가 이종찬 육대 총장 밑에서 총장보좌관, 교무부장, 부총장으로 50개월을 같이 근무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5.16이전 김재규는 능력과는 관계없이 정(情)이 많은 이종찬 장군에 의해 출세했다고 할 수 있다. 5.16이후 김재규는 이종찬 장군의 바통을 이어 받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군에서 뿐만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소위 때부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군의 촉망받는 장교로 성장했다. 그것은 박정희 소위가 제8연대 교육 참모로서 작성한 국군최초의 야외기동연습계획인 ‘대대진지공격현지전술계획’ 때문이었다. 이 계획에서 박정희는 연습개요, 주요 국면별 훈련 상황, 훈련 후 강평 등을 상황도(狀況圖)과 함께 작성함으로써 훈련을 참관했던 유동열(柳東悅) 통위부장(미군정기 국방부장관 직책)을 비롯하여 전군 지휘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박정희는 전군에 알려지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했고, 보직도 육군사관학교 생도 중대장 겸 전술교관으로 발령받았다. 여기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여순10.19사건 때는 공비토벌사령부 작전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그는 남로당 가입혐의로 재판을 받고 전역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군인으로서 박정희의 출중한 능력을 안타깝게 여긴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육군대장 예편,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역임) 대령의 선처로 정보국에 근무하게 되었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당시 정보국장이던 장도영(육군중장 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대령의 적극적인 건의로 다시 소령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전투정보국장으로 복직한 박정희는 낙동강 전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복직 2개월만인 1950년 9월 중령으로 진급했고, 신설 9사단장으로 임명된 장도영 장군의 요청으로 사단참모장으로 영전했다. 전쟁 중 박정희 참모장은 빈번히 교체되는 사단장을 대리하여 실질적으로 사단을 지휘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전공을 세우며 군인으로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 중령 진급 7개월 만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쾌속의 승진이었다. 대령으로 진급한 박정희는 육군정보학교 교장을 거쳐 군의 요직인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전보되었고, 그 뒤 포병으로 전과하여 장군이 되었다. 그때 포병 전과교육을 책임졌던 육군포병학교 교장이 10.26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김계원(육군대장 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준장이었다. 두 사람의 공식적인 인연은 여기서 맺어졌다.

    포병 전과 후인 1953년 11월 박정희 대령은 드디어 장군으로 진급했다. 이후 미국 유학, 2군단포병사령관, 육군포병학교장, 5사단장, 육군대학 입교, 6군단 부군단장을 거쳐 7사단장 때인 195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5사단장 때 박정희 준장은 다른 부대에 있던 김재규 대령을 요청하여 예하의 56연대장으로 불러와 근무케 하였다. 박정희가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자 1군사령관 송요찬(육군중장 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중장은 박정희 장군을 군사령부 참모장으로 기용했고, 그때 박정희 참모장은 채명신(육군중장 예편, 2군사령관 역임) 준장 등을 군 참모로 발탁했다. 이후 박정희 소장은 6관구사령관, 군수기지사령관, 1관구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군의 요직을 거쳐 2군 부사령관 때 5.16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어 제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일하고 또 일했다.

    Ⅳ.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고위 장성과 고위관료로 발탁한 배경

    5.16후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를 본격적으로 챙겼다. 그 덕분에 김재규는 1961년 6월 1일, 정식으로 육군준장이 되었고, 이어 호남비료사장에 이어 6사단장으로 보직되어 사단장 때 육군소장(1965.1.15)으로 진급하였다. 그때부터 김재규의 군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그는 사단장을 마치고 수도권을 책임지는 6관구사령관에 이어 육군방첩부대장과 초대 육군보안사령관의 중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보안사령관 때 김재규는 소장 진급 4년 만에 육군중장(1969.4. 21)으로 승진했고, 얼마 후 중동부전선 및 동부전선을 책임지는 육군3군단장(1971.9.23)에 임명되었다. 1973년 3월 3군단장을 마치고 육군중장으로 전역한 김재규를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바로 유신정우회(維新正友會)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임명했고,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 그리고 얼마 안가 건설부장관에 임명하여 국무위원으로서 국정을 보필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가정보 수장(首長)인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그때가 1976년 12월이다. 
      
    5.16혁명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능력도 출중하지 못했던 김재규가 군에서 장군이 되어 육군중장까지 진출하고, 군에서 전역한 후에는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등 국가요직에 오르게 된 데에는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왜 김재규를 그토록 보호하며 군뿐만 아니라 정부의 중요한 요직에 중용하였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를 감싸고 보호하며, 능력 이상의 중요 직책을 주며 국가에 헌신하게 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를 능력과 관계없이 막내 동생처럼 여기고 챙겼다. 박 대통령은 7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그래서 항상 동생이 그리웠다. 이것은 막내들의 공통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말이 없고 순박해 보였던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그런 정서에 적격이었다.

    그래서 김재규가 6사단장 시절인 1965년 4월 박 대통령은 1군사령부 순시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1군사령관 김계원 장군에게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김 사령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하고 말했다. 당시 6사단은 경기도 퇴계원 북쪽의 가평군 현리에 있었다. 김재규 사단에서 저녁을 먹고 복귀하면서 박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김계원 장군에게 “김 사령관! 재규, 저 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를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꼭 고향집의 집안 막내 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라고 말하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도 이에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김종필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고향이 경북 구미인 김재규를 젊어서부터 따뜻하게 살펴줬다. 박 대통령에게 김재규는 5.16때 만난 차지철과 비교하면 인연의 깊이가 달랐다. 아랫사람을 두고 좀처럼 하대하지 않았던 박 대통령도 김재규에게 만큼은 ‘재규’, ‘재규’하며 편하게 불렀다. 혁명 뒤 김재규는 6사단장, 6관구사령관, 육군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3군단 중장으로 예편해 바로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는데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영전의 연속이었다”고 증언했다.(김종필,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 김종필 증언록』1, 와이즈베리, 2016, 489쪽)

    둘째, 박 대통령은 김재규의 우직한 면을 좋아했다. 김재규는 성격이 우직하면서 가끔 팩하고 쏘는 불뚝 성질이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을 잘 몰랐다. 알았다하더라도 우직하거나 착한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처럼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마냥 좋게만 여겼다. 장점만 본 것이다.

    그런데 김재규의 그런 순진한 이면에는 표독스러운 성깔이 감춰져 있었다. 바로 욱하고 튀어나온 돌발적인 성격에서 나온 거친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것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김재규가 박정희 준장이 지휘하는 5사단에서 36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연대 부사관 한 사람이 수렵금지 명령을 위반하고 총으로 꿩을 쏴서 잡았다. 그때 연대장실에서 미 군사고문관과 함께 총소리를 들었던 김재규는 미 고문관이 부대를 떠나자마자 꿩을 잡아 의기양양하게 내려오던 부사관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가 그 부사관의 무릎을 연거푸 구둣발로 걷어차며 씩씩거렸다. 이에 그 부사관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곧 땅바닥에 쓸어졌고, 이를 지켜보던 부연대장 김봉준 중령은 평소 인자하게만 보였던 김재규 대령에게 저런 모질고 표독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김재규의 그런 충동적인 불뚝 성질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1979년 10월 어느 날 부마사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차지철이 강경발언을 하자 김재규는 옆에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위 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은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 않고, 내게 무조건 불리하게만 말씀드리니 각하께서 중정이 올리는 보고를 통 믿으셔야지요?”라고 거칠게 말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차지철은 4선 국회의원에다 외무위원장과 내무위원장을 지낸 중진 정치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양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아 나름 정세를 관망할 줄 아는 정치적 혜안(慧眼)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차지철은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할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거기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였다.

    그런 차지철에 대해 생전에 육영수 여사도 대통령에게 차지철같은 사람을 한 번 기용해 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정치 감각을 갖고 있고 청렴결백하면서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차지철을 신뢰했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배경이다. 그런데 김재규의 차지철에 대한 생각은 계속 1961년 5.16 당시에 머물러 있었다. 김재규는 자신만 군단장을 역임한 3성 장군이고, 건설부장관을 지낸 장관이라는 것만 알았지, 5.16이후 차지철이 박사학위를 받고, 국회에서 4선 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한 중진 정치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여전히 5.16당시 박정희 장군을 경호하는 ‘무식한 공수부대 출신 차지철 대위’로만 생각했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를 결정적으로 보호해주고 싶었던 이유는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김재규는 홀로서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는 누군가 옆에서 부모처럼 아니면 큰형처럼 뒤에서 보살펴주고 다독거려 줄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그 역할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연대장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실력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재규의 군사지식에 대해서는 1950년대 말 육군대학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대용(육군준장 예편, 월남 패망시 주월공사, 육사총동창회 회장) 장군은 “군사지식이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김재규가 실력이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은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에 의해서다. 김재규가 1957년 3사단 부사단장으로 근무할 때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에게 무능장교로 낙인찍혀 보직 해임됐다. 당시 이 사건은 군대에서 유명했다. 해임 이유는 사단을 방문한 송요찬 1군사령관에게 부사단장이던 김재규가 브리핑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단장이 부재중이라 송요찬 장군은 부사단장인 김재규에게 브리핑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김재규는 사단업무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말을 더듬거렸고, 사령관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도 못하자, 화가 잔뜩 난 송요찬 사령관이 큰 소리로 “1군 산하에 이렇게 무능한 장교가 있나? 24시간 내로 보따리를 싸서 군을 떠나라”고 질타했다. 그렇게 해서 김재규는 진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옛 상사인 이종찬 장군을 찾아갔고, 이종찬 장군은 “전역할 수밖에 없다”며 의기소침해 있던 김재규에게 학생감독관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종찬 장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리수를 써가며 김재규를 장군으로 진급시켰고, 5.16 이후에는 자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재규를 추천까지 했다.

    Ⅴ. 은혜를 원수로 갚은 김재규의 배신

    김재규에게 있어 이종찬(李鍾贊, 1916-1983) 장군은 스승이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김재규는 죽는 날까지 이종찬을 스승과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종찬과 김재규의 인연은 6.25전쟁 초기로 이어진다. 낙동강 전선이 한창일 무렵인 1950년 9월 1일 이종찬 대령은 동해안의 포항지구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3사단장에 임명되어 부임하게 된다. 그때 사단 인사참모가 김재규 소령이었고, 부임한 사단장을 비행장으로 모시러 온 사람이 바로 김재규였다.

    그때부터 김재규와 이종찬의 인연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사단장과 인사참모로서 3사단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반격작전에 이어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할 때 함께 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단장 이종찬 대령이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을 얼마 앞두고 이종찬 장군은 부산에 있는 병기행정본부장으로 전출되었고, 곧이어 김재규도 국민방위군을 관장하는 육군본부의 국민방위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김재규는 소령 계급장을 달고 국민방위국에서 근무하다가 방위1사단 1연대장, 106예비사단 참모장으로 재직 중에 중령으로 진급하고, 이어 예비5군단, 2보충대, 여수계엄사령부 등 전선에서 떨어진 후방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그 무렵 김재규가 사단장으로 보좌했던 이종찬 장군이 당시 이기붕 국방부장관의 추천으로 제6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종찬 참모총장은 부산정치파동으로 1952년 6월 물러나 1년 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때 김재규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이종찬 장군 밑에서 총장보좌관과 교무부장을 역임하였다. 이는 모두 이종찬 장군의 ‘지나친 배려’였다.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 장군이 지휘하는 5사단장 56연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박정희는 동향 후배인 김재규를 특별히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5사단으로 불러 연대장을 맡겼다. 이때도 박정희는 김재규를 살려줬다. 어느 날 56연대 병기 창고에서 불이 나서 연대 주요 병기가 모두 불에 타버린 커다란 사고가 났다. 연대장이 옷을 벗을 정도의 대형 사고였다. 사색이 된 김재규는 박정희 사단장에게 가서 “각하, 죄송하게 됐습니다. 큰 사고를 책임지고 연대장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보고를 받고 있던 박정희 사단장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김재규를 데리고 현관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사단장 차에 김재규를 태우고 사단장 공관으로 갔다. 공관에 도착하자 박정희 장군은 양주병을 꺼내들고 맥주잔에 술을 가득 따른 다음 김재규에게 줬다. 김재규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으나 죄인이 된 몸이라 꼼짝없이 마셨다. 그렇게 해서 연거푸 두 잔을 마신 김재규는 쓰러졌다. 김재규가 술에서 깨어보니 껌껌한 밤중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은 사단장 침대에 누워있고, 박정희 장군은 옆의 부관 방에서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자고 있었다. 대신 부관은 취사반장 방에서 잤고, 취사반장은 취사병 방으로 가서 함께 자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박 사단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을 먹으러 온 김재규에게 또 다시 맥주잔에 양주를 가득 붓고, “입을 떼지 말고 마셔”라고 했다. 밤중에 똥물까지 토해낸 김재규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또 마셨다. 그러던 중 사단 참모장이 와서 “각하, 준비가 다 됐습니다”라고 하자, 박 장군이 김재규에게 “연대장은 이제 가봐”라고 했다.

    그때 김재규는 “이제 옷을 벗고 나가라는 것이로구나”하고 체념하고 연대로 복귀하는데, 길목에는 사단 참모들이 도열해 있고 군악대가 연주하며 그를 맞이했다. 이에 김재규는 “이임 환송행사로구나” 생각하고 연대장실로 들어갔다. 연대장실에 들어서자 군수참모가 “어제 화재로 불에 탄 화기들은 모두 각 연대와 타부대의 협조를 받아 충당했고, 소소한 장비는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해 채워 놓았습니다. 병기고는 밤새 전 장병이 동원돼 깨끗이 완성시켜 놓았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김재규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처벌받아 마땅한 나를 사단장 각하는 이렇게 배려해 주셨습니다. 백골난망, 이 은혜를 입고 사나이로서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라며 다짐했다. 그랬던 김재규가 20여년 후 은인이던 박정희를 무참히 살해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인면수심(人面獸心)에서 나온 배은망덕(背恩忘德)이었다.

    김재규는 연대장을 마치고 인접 3사단 부사단장으로 전출했으나, 그곳에서 보직해임을 당했다. 사단장 부재중 부대를 방문한 군사령관에게 브리핑도 더듬거리며 제대로 못하고, 질문에 답변도 제대로 못하자 ‘타이거 송’으로 유명한 송요찬 장군은 당장 부대를 떠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김재규는 이종찬 장군을 찾아왔고, 이종찬 장군은 그런 김재규를 측은지심으로 챙겨 보직도 마련해 주고 나중에는 장군으로까지 진급시켜줬다.

    이종찬 장군에게도 김재규의 우직한 면이 그냥 착하기만 한 막내 동생 같은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마냥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김재규는 이종찬 장군이 전역한 후에도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부동자세로 서서 “각하, 별고 없으셨습니까?”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마치 일등병이 현직 육군참모총장에게 인사하듯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건설부장관으로 있을 때 이종찬 장군에게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운영권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넘겨줬고, 이종찬이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나름 관여를 했다. 그런 김재규를 이종찬은 5.16이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적극 추천하여 중용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보다 이종찬 장군을 존경하고 신뢰했다. 이종찬 장군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군 선배이자 직속상관이었다. 이종찬 장군이 육군총장일 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있었다. 박정희가 군 선배 중 가장 존경한 분이 이용문 장군과 바로 이종찬 장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종찬 장군은 닮은 데가 많았다. 성격 면에서 두 사람은 정의감이 강했고, 청렴 강직했으며 인정에 약한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은 또 서예와 그림 그리고 음악에 일가견이 있었고, 폭넓은 독서 취미도 비슷했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도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읽어 중요 구절을 외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藏書)도 5천여권으로 엇비슷했다. 좋아하는 노래도 황성옛터와 타향살이였다. 거기다 두 사람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남다른 정리벽(整理癖)도 꼭 같았다.

    그런 이종찬 장군이 김재규를 추천하자, 박 대통령 자신도 고향 후배로서 동생처럼 여겨왔던 김재규를 능력을 떠나 중용하게 되었다. 국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부족한 것은 자신이 충분히 메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의 부족한 직무 수행에 대해서는 잘못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1979년 정국을 요동쳤던 김영삼 총재 제명과 부마사태 등 미숙한 업무처리에도 오히려 전화를 걸어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늘 마음이 넉넉하고 자상한 집안의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김재규는 그런 은인이자 형님 같은 박 대통령을 적(敵)보다 더 잔인하게 살해했고,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때까지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거나 사죄한다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비정함을 보였다. 오히려 뻔뻔스럽게 자신이 죽고 난 후 겨울에 입는 ‘장군 동정복(冬正服)’을 수의(壽衣) 대신 입혀 달라고 부탁했고, 묘비에는 ‘김재규 장군 묘’라고 써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는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도리마저 저버린 행위였다. 그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는 씁쓸한 한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은혜를 저버리고 국가원수를 잔인하게 살해한 ‘배은망덕한 망나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Ⅵ. 김재규가 죽기 전에 꼭 했어야 할 일들

    김재규는 죽기 전에 꼭 했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것은 10.26현장에서 자신이 살해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자신 때문에 사건에 연류되어 옥고를 치른 김계원과 정승화 장군에게 사죄를 하고 죽어야 했다. 그런데 김재규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사죄하지 않고, 사후(死後)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만 구차한 부탁만을 남겨놓고 떠났다. 김재규가 사죄를 해야만 하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그들에게는 죄도 없고 김재규에게 빚진 것도 없다. 그들은 단지 김재규의 무능과 충동질적인 그의 불뚝 성질에 희생됐을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재규와 김계원, 차지철, 그리고 정승화는 10.26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김재규와도 적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계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대령 때 포병으로 전과하여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준장 계급의 학교장이었다. 그때부터 김계원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병과를 매개로 인연이 맺어졌다. 하지만 5.16이후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되면서 상하 관계가 역전되었다. 김계원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전역 후에는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자유중국 대사를 오래 역임한 후 김정렴 비서실장 후임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그때가 1978년이었다.

    차지철은 5.16때 공수부대 대위로 박정희 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하다가 1962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고, 이후에는 국회의원으로 진출하여 4선 의원을 지내면서 내무 및 외무위원장을 거치며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이후에는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데에는 생전에 육영수 여사가 박 대통령에게 했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육 여사는 술도 안하고 담배도 안 피우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차지철을 좋게 봤다. 거기다 차지철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였다. 그래서 육영수는 대통령께 차지철 같은 사람을 옆에 두고 쓸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육 여사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생전의 말을 상기하고, 박종규 후임의 경호실장에 차지철을 임명했다고 한다.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대통령을 성심성의껏 보좌했다. 비록 군대 경력 상으로는 육군중장으로 전역한 김재규나 육군대장으로 전역한 김계원 보다 낮았으나, 정치적 식견만큼은 4선의 의정(議政) 경험을 쌓은 중량급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을 여전히 5.16당시의 공수부대 대위로 보고, 자신은 마지막 계급인 육군 중장의 위치에서 차지철을 대하였다. 그러다보니 차지철을 무시하는 언행이 은연중에 나타났다. 예를 들면 업무적으로 부딪칠 때마다 김재규는 “새까만 대위 출신인 차지철이 3성 장군 출신의 자신에게 버릇없이 대들고 까분다”는 식이었다.

    김재규와 정승화는 고향이 비슷하다. 김재규는 경북 선산 출신이고 정승화는 인접의 경북 금릉 출신이다. 금릉은 지금의 김천이다. 군대에서 두 사람은 직접 또는 앞뒤로 보직을 주고받기도 했다. 정승화는 김재규 보다 앞서 방첩부대(뒤에 보안사령부로 개칭) 부대장을 했고, 3군단장은 김재규가 전임이고 정승화가 후임으로 인계인수를 했던 사이다. 경북 장성(將星) 모임회장도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물려줬다. 그 때문인지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정승화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자 제일 먼저 전화로 축하를 하며 친근감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정승화는 김재규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오히려 3군단장으로 취임했을 때 전임이었던 김재규가 군단 지역 곳곳에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을 보고, 김재규가 허세가 있고 명예욕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탓으로 김재규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김재규에 의해 ‘10.26’에 본의 아니게 엮이게 되었다.

    이들 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은 김재규에 의해 10.26현장에서 살해당했고, 김계원과 정승화는 이로 인해 재판을 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나중에 사면으로 풀려났다. 그 중 비서실장 김계원은 재판과정에서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각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총애와 신뢰를 받아오던 저입니다. 하해 같은 은덕으로 본인 자신이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영광된 자리에까지 저는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각하께 홍모의 조언도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에 국립묘지까지 모시고 가지 못한 불충을 지금 백번, 만번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각하의 명복을 빌고 그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가호가 같이 하길 바랄뿐입니다.”라며 진술하였다.

    김재규가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살려, ‘10.26구국혁명’ 같은 망령된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김계원 비서실장처럼 가슴에서 우러나온 사죄의 말을 드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김재규는 끝까지 박정희 대통령이나 유족에게 단 한마디의 사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죽은 후에 장군 동정복을 입혀 장사를 지내고, 묘비에는 ‘김재규 장군 묘’라고 쓸 것을 당부했다고 하니, 어찌 20여년을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런 인간답지 못한 자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평생을 바쳐 쏟은 인정과 배려 그리고 국가원수로서 베푼 은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탁 막히며 미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김계원의 10.26현장에서와 이후의 우유부단한 행동과는 달리, 법정에서 했던 그의 최후 진술이 계속해서 귓전을 울린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시해하고 민주주의가 쉽게 획득된다면 이런 사건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두고두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명분이 제 아무리 좋고 여하한 미명하에서도 이와 같은 인륜 도덕을 무시하는 모반사건이 다시는 이 나라에서 재연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의 말은 김계원이 아니라 김재규가 대한민국 국민과 역사 앞에 속죄하는 뜻에서 반드시 했어야 할 말들이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함께 그 자리에서 자결했어야 했다.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책을 조금이라도 수행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하지 말아야 할 일들만 잔뜩 하고 갔다. 실로 대한민국 역사에 참담한 비극과 오점만을 남긴 채 갔다. 그것도 구차스럽고 뻔뻔스럽게 갔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의 치욕이자 후세가 단단히 경계해야 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다시는 이 땅위에 김재규 같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 나와서도, 또 나오게 해서도 안 되겠다.

    그런 점에서 조금이라도 역사의식이 있는 대한민국 정부라면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3류 저질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상연을 즉각 중단시키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국민들에게 백배 사죄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또한 정치권도 더 이상 문화예술 활동의 자유를 빙자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불순한 세력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대승적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될 것이다. 국민들도 대한민국의 번영과 후손들의 밝은 미래를 바란다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저질 역사왜곡 문화예술이 우리 후손들의 역사의식을 황폐화시키도록 방치해서는 결코 안 되겠다. 이것만이 경제대국을 넘어 선진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며 영원히 발전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남정옥/6.25전사연구가/역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