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10 애국열사' 유가족 대표 이씨“2년간 침묵… 그러나 이젠 진실 밝힐 것”
  • ▲ 대한애국당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 애국열사 5인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이기륭 기자
    ▲ 대한애국당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 애국열사 5인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이기륭 기자
    ‘좌파 시민’의 죽음이었어도 이렇게 외면당했을까. 

    2017년 3월 10일 서울 한복판에서 5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던 ‘우파 시민들'이다. 하루 아침에 5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지만 금세 대중으로부터 잊혔다. 도리어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과 비하가 극에 치달았다. 가장 상처받은 이들은 다름 아닌 3.10 희생자들의 유가족이다.  

    29일 서울 광화문 모처에서 3.10 희생자 이모씨(남‧70대)의 아들 이모씨(47)을 만났다. 사건 발생 후 언론 노출을 꺼리던 그가 2년 만에 처음 언론을 만난 것이다. 이씨는 "그동안 아버지 죽음에 대해 의문점이 많았지만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고 했다. 희생자들을 향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익명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까닭이다. 

    "의문이 많았지만...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

    이씨는 “아버지 죽음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현 정권에 완전히 등을 돌리는 모양새기 되기 때문이었다. 불이익을 받을 게 뻔하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분위기 자체가 탄핵에 반대하면 ‘적폐’로 몰아갔다"고 했다. "인신공격성 비하 발언도 심했다”고 했다. 3.10 희생자들에 대해 ‘틀딱’ ‘노친네’라는 모욕성 발언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같은 조롱을 규제하는 곳조차 없었다. 

    “나라사랑 유별났던 아버지... 뜻 갖고 시위 참여"

    이씨는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희생자들을 향해 ‘알바비 5만원을 받고 동원된 인력’이라고 폄훼하는 루머가 가장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한 우파단체의 고문이셨다"며 "나라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셨고, 그래서 뜻을 가지고 매주 시위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이씨는 부친에 대해 “시위에 참여한 분들 중에 식사를 못한 분들에게 밥도 사주고, 젊은 친구들에게 간식거리도 나눠주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우파 시위를 참여하기 위해 올라오는데 찜질방에서 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들을 위해 잠잘 곳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품었던 분”이라는 것이다. 

    참다 못한 이씨는 2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비하한 네티즌 200여 명을 고소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큰아들의 학교 생활마저 침해받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울산남부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 직접 고소를 했다. 그중 25명이 기소됐고, 21명이 처벌받았다. ‘취중 상태에서 댓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전부 욕하니 나도 했다’며 사과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적 분위기·우파단체 와해 속 진실규명 난항

    하지만 정작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이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탄핵 정국 이후 우파단체가 와해되며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고 했다. "사회적 분위기 탓에, 소방당국의 총책임자인 서울시청에 정보공개를 요청할 여력도 없었다”고도 했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경찰 조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 7~8개월 만에 돌아온 답변은 “과격 시위로 인한 것이고, 응급처치는 군중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하루아침에 시민 5명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경찰은 '할 만큼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은 ‘군중들이 많아 응급처치가 쉽지 않았고 우회해서 (서울 백병원으로) 갔다고만 했다. 생각해보면 아주 원론적인 설명이었다. 7~8개월 동안 조사가 진행돼 아버지 사망신고도 늦췄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분개했다. 

    이씨의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바로 응급처치가 이뤄졌는지, 왜 가까운 서울대병원을 놔두고 응급차가 서울백병원으로 갔는지, 응급처치 매뉴얼은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 그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2년 만에 서울시에 정보공개 공식 요청

    다른 유가족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파 단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두려웠고,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현실 탓에 진실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희생자 김모씨의 경우엔 유일한 유가족인 그의 아내가 지적장애인"이라고 했다. "현재는 그의 조카가 유일한 부양자인데, 조카마저 지적장애인이다. 장애인 수당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진실규명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희생자 김모씨의 유가족인 외동딸 김모씨는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그 역시 언론에 나서는 게 쉽지 않다. 이씨는 "사회적 시선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며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월호 추모 공간과, 3.10열사 진상규명을 위한 대한애국당 천막만 비교해 봐도, 우파와 좌파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랬던 그가 2년 만에 진실규명에 나서기로 했다. “응급처치가 원활했다면 아버지가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뉴데일리와의 인터뷰 직전 서울시청을 방문해, 2년 전 사건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했다. 서울시청은 이씨에게 “열흘 안에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119구급차 배치 상황 등 자세한 정보를 받아본 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