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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47-64번지 일대 옥인1주택재개발정비구역내 한 폐가. 주민들은 해질녘 이곳에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든다고 했다.ⓒ권영수 기자
28일 오후 2시께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47-64번지 일대 옥인1주택재개발정비구역.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어야 할 재개발구역이 조용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허름한 집들이 줄지어 서있다. 사람이 떠난 집들엔 쓰레기와 폐건축자재들이 쌓여있다. 방치된 지 수년은 돼 보였다.
5년동안 이곳에서 거주한 50대 주민 김씨는 “해가 지면 불량 청소년들이 빈집으로 모여든다”며 “담배피고 술 먹고, 본드도 한다고 들었다. 애들이 간 뒤 낮에 가보면 비닐봉투와 담배, 술병들이 버려져 있다”고 했다.
“비행청소년·부랑자들 빈집에 어슬렁”
70대의 또 다른 주민 이씨는 “우리집 뒷마당에 모르는 사람들이 스티로폼을 깔고 잠까지 잤다”며 현장을 보여줬다. 그는 “너무 무서워 아들이랑 스티로폼 깔개와 담배 꽁초들을 다 치웠다”며 “주변의 불량 청소년들의 소행 같다”고 했다.
이씨는 “재개발 중단으로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빈집이 늘었다”며 “서울시와 경찰도 아무런 신경을 안써서 직접 CCTV까지 달았다”고 했다.
이씨 집 맞은편에도 주민이 직접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CCTV가 보였다. 서울 종로경찰서 옥인파출소를 방문해 물어보니 해당 지역의 경찰 CCTV는 2대 뿐이라고 했다. 미로처럼 얽힌 낙후된 골목을 모두 감시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28일 저녁에 찾은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인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1-1번지 일대 ‘충신1구역주택재개발정비구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좌우로 1m 정도 밖에 안 되는 좁은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창문이 깨져있고 담도 반쯤 허물어진 폐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인기척이 없고 문이 열려있는 한 폐가에 들어갔다. 천장 콘크리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처럼 뜯겨져 내려와 있었고 창고로 보이는 곳엔 폐건축자재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담배와 소주병들도 방 안에 널부러져 있었다. 다른 몇 곳의 폐가들을 둘러보니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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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1-1번지 일대 ‘충신1구역주택재개발정비구역’내 한 폐가. 천장 콘크리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처럼 뜯겨져 내려와있다.ⓒ권영수 기자.
골목길에서 만난 60대 주민 이씨는 ‘경찰이 순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주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문을 활짝 열어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며 “너무 무서웠다. 아무도 살지 않은 빈집을 찾으려고 부랑자들이 이 동네 주변을 자주 어슬렁 거린다”고 하소연했다.
“폐가엔 담배, 술병만 널부러져… 경찰도 외면”
또 다른 주민 조모 씨는 “이곳에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솔직히 무섭다”며 “골목길이 미로처럼 되어 있고 치안 상태도 좋지 않아 밤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옥인1구역과 충신1구역에 도심 슬럼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 탓이다. 박 시장은 2012년 임기 초부터 탈(脫)재개발 정책 기조를 내세웠다. 2016년부터는 '재개발 정비구역'의 지정을 '시장 직권'으로 직접 해제해왔다.
옥인1구역과 충신1구역도 ‘재개발정비구역 직권해제’를 당한 곳이다. 옥인1구역의 경우, 2007년 말 정비구역으로 처음 지정된 후 2009년에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았다. 하지만 2011년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가 전면 재개발이 아닌 보존에 중점을 둔 도시재생 정책에 힘을 실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시는 2016년 3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 조례'를 개정해 역사문화유산 보존 필요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곳은 서울시장 직권으로 정비구역 해제를 가능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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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신1구역주택재개발정비구역’내 골목길. 사람 한 명 지나가기 빠듯한 골목을 따라 폐가들이 줄지어 있다. 주민들은 밤에 혼자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권영수 기자
개정된 '서울특별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조례'의 제4조의3(직권해제 등)의 제3항에 따르면 재개발 정비구역에 주민 3분의 1이 해제를 요청하고 찬반투표를 통해 찬성표가 전체의 50% 미치지 못하면 서울시장이 시장 직권으로 정비구역의 지정을 해제할 수 있게 됐다.
종전에는 주민 50% 이상이 해제를 요청하고 사업 반대표가 50% 이상이어야 정비구역 해제가 가능했다. 시는 이 조례를 근거로 2017년 3월 옥인1구역의 정비구역을 직권해제 했다.
박원순 ‘재개발 직권해제’ 후 도심 슬럼화 ‘가속’
옥인1구역조합은 서울시의 일방적 정비구역 해제가 부당하다며 즉각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017년 12월에 재판부는 1심에서 조합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조합 측은 오래된 재개발 지연으로 인해 더이상 조합을 끌어갈 운영비조차 없다며 재개발을 포기한 상태다.
충신1구역도 2017년 3월 재개발정비구역 직권해제 결정을 받았다. 옥인1구역과 같은 ‘역사 문화 가치 보존’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후 폐가로 둘러쌓인채 2년째 방치돼있다.
문제는 옥인1구역이나 충신1구역 같이 도심 슬럼화 현상이 나타나거나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 서울지역에서만 393개소에 이른다는 점이다.
6일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2018년 서울시 빈집 실태와 관리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내 총 9만5000호의 빈집 중 장기 방치된 곳의 비율은 70%이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박원순 시장이 지난 6년간 ‘서울시장직권’으로 해제를 결정한 재개발정비구역 393개소를 현장조사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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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연구원은 '정비구역 해제'에 따른 빈집 장기화가 커뮤니티 해체를 가속화하고 주거환경을 악화하며 우범지대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서울연구원
서울연구원은 정비구역해제지역 393개소 중 빈집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 다섯 곳을 선정해 심층조사도 벌였다. 그 결과 도봉3구역, 옥인1구역, 성북4구역, 충신1구역, 사직2구역 등 다섯곳의 평균 '우범 우려 빈집 비율'은 54.9%로 집계됐다.
서울연구원 “직권해제 393곳, 우범 우려”... 대법원 “직권해제 조례, 무효”
서울연구원은 “빈집이 재개발 해제지역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우범 우려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빈집 정비 계획 등 관리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의 ‘직권해제’에 대해 법원도 제동을 걸었다. 서울시의 ‘시장직권 정비구역 해제’ 조례가 위법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달 25일 박 시장과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상고한 서울고등법원의 '종로구 사직동 238-1 일대 사직2구역 직권해제와 조합설립인가 취소 무효 결정'을 기각했다.
대법원은 “역사문화적 가치 보전을 이유로 한 서울시장의 직권해제 조례는 상위법인 '도시 및 주거 환경정비법'을 초월한 것으로 무효”라며 “무효인 조례에 근거했던 행정처분은 불법”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