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에게는 "얼굴 보니 티없이 맑은 얼굴" 安 향해서는 "담백·솔직·순수"
  •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청구동 자택에서 접견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진DB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청구동 자택에서 접견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진DB

    특정 정치권 인사를 가리켜 종종 '풍향계'라는 말을 쓴다. 본래는 일본 정계에서 유래한 말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내각총리대신이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내각을 '반쪽 허파 내각' 등으로 맹비난하다가, 마침내 내각이 개조되자 운수대신으로 슬그머니 입각, 이후 방위대신을 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포스트 사토'의 자리를 꿰찬 것을 놓고 붙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와 친분이 깊기로 유명한 정치인으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있다. 그러나 김종필 전 총리는 '풍향계'보다 한 수 위다.

    신민주공화당과 삼당합당 이후의 공화계를 출입했던 정치부 대기자 출신인 국민의당 이용호 의원은 그의 저서 〈권력의 탄생〉에서 "이기는 곳에 그가 있고, 그가 가는 곳이 이긴다"라며, 단순히 바람을 쫓을 뿐인 '풍향계'와 JP의 근본적인 차이를 표현했다.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JP의 통찰력은 비범했다. 36세의 나이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끌어 '루비콘강'이나 다름없었던 한강을 건너 하나의 정권을 창출했다.

    제주도에 일본 귤나무를 들여왔고, 서산 일대가 하얗게 될 정도로 석회를 뿌려 미국식 낙농업을 추진할 정도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늘 고민했다. 정무와 민생이라는 정치의 양대 축 뿐만 아니라 시·서·화·악 사절에 문무사철까지 두루 빼어나지 않은 분야가 없었던 JP다.

    JP는 이후로도 김영삼·김대중의 두 정권을 직접 창출했고, 노태우·이명박의 두 정권을 간접 창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의 '2인자 처세술' 전수가 없었더라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자당 내에서 'YS만은 안 된다'는 박태준·이종찬·박철언 등 민정계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지만, 공화계 수장인 JP가 손을 들어주면서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DJP연대가 없었더라면 결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이치였다.

    2007년 정초, 한나라당에서 이명박·박근혜 간의 대선후보 자리를 사이에 둔 전운이 짙어질 무렵 김종필 전 총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승하길 바란다"며 "5년간 할 일이 있다"고 덕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사촌형부·처제 사이인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고, 결과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미 정권을 창출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JP와 떨어지면 끝장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JP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를 정계은퇴시키려 흔들다가, 되레 자민련이 분당(分黨)되면서 그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조기 레임덕에 빠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각제 개헌의 약속을 어기고 JP의 자민련과 결별했다가 역시 레임덕에 빠졌다.

  •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해 8월 청구동 자택에서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의 예방을 받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안철수 후보와도 함께 하는 3자 냉면 회동을 제안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해 8월 청구동 자택에서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의 예방을 받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안철수 후보와도 함께 하는 3자 냉면 회동을 제안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구순(九旬)이 넘었지만 JP의 냉철한 판단력은 아직도 정확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이 펼쳐지던 지난해 11월 중순, JP는 한 미디어그룹 사주와의 대화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다"며 "5000만 국민이 '네가 무슨 대통령이냐'며 달려들어 내려오라고 해도 거기 앉아 있을 여자"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나를) 형부라고 부를 정도로 정서가 정돈된 여자가 아니다"라며 "막상 의지하고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텐데도 '나보다 더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니 어쩌겠나"라고 답답해했다.

    이후 탄핵정국의 흐름을 보면 JP의 예언은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수십 차례의 '자진하야설' '중대결단설' 등이 유포됐지만, 결국 사태는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까지 흘러갔다.

    이러한 우리 정치권의 거목을 폄훼한 사람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올초 펴낸 대담집에서 "정치는 흐르는 물과 같고, 고인 물은 흐르지 않고 썩는다"라며 "JP는 오래 전의 고인 물"이라고 극언했다. "언제 때 JP냐"며 "JP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충청과 호남을 동시에 모독한 것이다. JP가 정치 활동을 시작한 이래, 충청과 충남은 그와 고락을 함께 하며 아낌없이 밀어줬다. 그를 지지했던 550만 충청권 인구가 졸지에 '썩은 물'을 들이킨 '썩은 사람들'로 전락했다.

    DJP연합으로 정권을 잡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 결단을 지지했던 호남인들도 모욕당했다. 김대중정권을 '썩은 물'과 손을 잡아 창출된 적폐정권으로 치부했다. 문재인 후보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호남에 대한 인식이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JP는 이렇듯 자신을 모독한 문재인 후보에 대해 그래도 점잖게 대응해왔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후보에 대해 "문재인, 이름 그대로 문제"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수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5일에는 작심 비판에 나섰다. JP는 자신을 예방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면전에서 "뭘 봐도 문재인 후보는 안된다는 생각"이라며 "어떤 점이 좋아서 지지자들이 모여있는 것이냐"고 개탄했다.

    아울러 "얼마 전 한참 으시대고 있을 때, 당선되면 김정은을 만나러 간다고 하더라"며 "김정은이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느냐. 이런 놈을 뭐하러 지지하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반면 반문(반문재인) 진영의 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는 우호적이다.

    앞서 김종필 전 총리는 지난해 8월 김대중정부에서 국무총리와 문화관광부장관으로 호흡을 맞췄던 박지원 대표의 예방을 받았다.

  •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5일 청구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예방을 받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문재인 후보가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역정을 내며, 홍준표 후보의 관상을 칭찬하는 등 덕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5일 청구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예방을 받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문재인 후보가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역정을 내며, 홍준표 후보의 관상을 칭찬하는 등 덕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박지원 대표는 김종필 총리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총리로 모실 때, 나를 얼마나 귀여워해주셨나"라고 깍듯한 예우를 다했다.

    이에 김종필 전 총리도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얼마나 국민을 설득했느냐"며 "안철수 전 대표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매일 국민을 설득하라"고 DJ에 빗대 안철수 후보를 호평했다.

    나아가 "(박지원 대표가 주말에 목포에 내려갔다가) 서울에 돌아오면 안철수 전 대표도 데려오라. 함께 냉면을 먹자"며 먼저 회동을 제안했고, 이후 10월에 소공동 롯데호텔 일식당 모모야마에서 회동이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JP는 "반기문 총장이 귀국을 하더라도 생각한대로는 어려울 수 있다"며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로 들떠가지고 왔다갔다 하는데, 어렵다. 와보면 알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예언'을 했다.

    그러면서 "(안철수 전 대표는) 한 정당을 이끄는 책임자로서는 참 괜찮더라"며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으니 똑똑히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덕담했다. 배석한 박지원 대표를 향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듯 안철수 전 대표를 잘 도우라"며 다시 한 번 DJ에 빗댔다.

    JP의 심중은 한 달 뒤에 유출된 미디어그룹 사주와의 대화에서 보다 또렷히 나타난다. JP는 이 때 안철수 후보를 놓고 "아직 구렁이가 꽁지를 틀고 들어앉은 것 같지 않더라"며 "인간 안철수는 담백하고 솔직하고 아주 순수해서 괜찮다"고 평가했다.

    행간까지 읽어보면 그의 '순수함'이 양날의 검이 될 것이라는 점을 내다본 것으로 읽힌다.

    5일 있었던 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예방에서도 그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난다는 평이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홍준표 후보가 청구동 자택으로 들어서자 "대통령이 오는데 왜들 서 있느냐"며 "절들을 해야…"라고 말문을 열어 단숨에 분위기를 녹였다.

    아울러 "문재인 후보 같은 얼굴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홍준표 후보를 바라보고서는 "얼굴을 보면 티가 없는 맑은 얼굴"이라고 덕담했다.

    '이기는 곳에 그가 있고, 그가 가는 곳이 이긴다'는 JP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JP의 예언이 이번 대선의 향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흥미로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