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애국심과 포부였지만, 개인·가족·유엔 명예에 큰 상처만"
  •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국회를 빠져나가고 있다. 급작스러운 불출마 선언에 취재진이 몰려든 모습이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국회를 빠져나가고 있다. 급작스러운 불출마 선언에 취재진이 몰려든 모습이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제가 주도해 정치교체를 이루고 국가의 통합을 이루는 결정을 접겠다"면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반 전 총장은 1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만난 직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저 자신에 혹독한 질책을 하고 싶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난 12일 귀국 이후 지방 도시들을 방문하여 종교, 사회, 학계 및 정치 지도자 등 다양한 계층의 국민을 만나며 민심을 들었다"면서 "국민 통합과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말씀드렸지만,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는 가짜 뉴스와 인격 살해로 개인·가족·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됐다"고 토로했다.

    반 전 총장의 이날 불출마 선언은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반기문 전 총장은 국회를 떠나면서 "오전에 혼자 결심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를 보좌했던 보좌진들도 반 전 총장의 기자회견 직전에서야 불출마 선언을 인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왜 그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을까.

    그는 불출마선언 기자회견문에서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하고 이기주의적 태도도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언급했다.

    이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유아독존식 태도 역시 버려야 한다"고 정치권 전반에 직격탄을 쐈다.

    기성정치권에 큰 실망을 느낀 나머지 염증을 느꼈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태도는 실무를 담당했던 참모진들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 전 총장은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 하더라"라고 했다.

    그는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 쪽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는데, 말하자면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면서 "나는 보수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수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내 양심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한 직후 차량에 탑승한 모습. 차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한 직후 차량에 탑승한 모습. 차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의 지적은 새누리당과 바른 정당은 물론 야권까지 정치권 전반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먼저 반 전 총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다. 친노진영인 문재인 전 대표 측과 페어플레이 선거를 기대했겠지만, 야권은 '위안부 합의' 발언 등을 문제 삼으며 친일파인 양 매도에 나섰다.

    "보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보수진영 역시 반 전 총장에 달가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순실 사태로 정치권에 형성된 '정권교체'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후보였지만, 이날 오전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은 '낙상 주의' 발언으로 반 전 총장에 경고를 날렸다. 바른 정당에서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여러 잡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반 전 총장으로서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대통합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급급해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며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설명으로는 외교부 장관을 비롯해 쭉 관료생활을 해온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정치권의 흠집 내기 등 네거티브를 견디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항상 틀에 짜여 상명하복의 생활을 하던 반 전 총장에게 아랫사람이어도 나름대로 셈법이 있는 정치권의 복잡한 구조에 질려버렸다는 이야기다.

    정치권 관계자는 "보수가 유리한 것도 아니고, 캠프가 잘 꾸려진 것도 아닌 상황에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라면서 "모든 어려운 상황 속에 구원투수로 나섰는데도,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지지율 변화에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고 짚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