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언론'과 '지식인'의 오보(誤報)와 역사
  • ▲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열린 제64회 이승만 포럼에는 이동욱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열린 제64회 이승만 포럼에는 이동욱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제64회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에서는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우리 시대에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언론’인들이 기사를 통해 만든, 우남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거짓의 역사'를 돌아봤다. 


    <제64회 이승만포럼 이동욱 기자 강연 전문>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 오보(誤報)와 역사 - 이승만 망명 기사의 허구 - 


    ◈들어가는 말 

    유언비어로 역사를 쓰는 나라, 대한민국 건국 70년이 다 되어가는 대한민국은 세계 일류급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 기간 중 국민소득은 거의 500배나 증가해 물질성장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는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라는 실증적 자료와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는 오늘의 현실로 입증된다.

    반면, 대한민국의 지식 성장은 세계 몇 위나 기록하고 있을까? 노동계급의 생산성은 수익성으로 가름되지만 지식계급의 생산성은 기록물의 객관성과 공정성으로 평가된다. 문맹률 80%에 육박했던 건국 당시 지식계급들의 객관성과 공정성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오늘날의 지식계급들과 어느 정도의 격차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노동계급의 위대한 성취만큼 지식계급도 그러한 성취를 자랑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려면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997년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실록’이 조선왕조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기록 유산이어서 지정된 것이 아니다. 일본, 중국, 월남도 자기 나름의 실록이 있었지만 유독 ‘조선왕조실록’만이 유네스코에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25대 472년에 걸친 기록의 방대함뿐만 아니라 중앙정치는 물론이고 민간의 사사로운 사건들조차 정확하게 기술해 놓아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되기 때문이었다. 

    즉, 객관성과 공정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수준이기에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왕조실록의 내용을 두고 신뢰할 수 없다며 시비를 걸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기록문화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기록 문화도 그만큼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며 기록되고 있는 것인가. 작금에 벌어지는 국사 교과서 파동이나 각종 현대사 왜곡사건들, 심지어 2014년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기록물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지식계급 혹은 기록 문화의 수준일 것이다. 

    2016년 6월, 언론을 통해 사실과 다르지만 현대사로 굳어져간, 주요 항목들을 대강 추려 보자. 추가할 항목들이 더 있지만 논의의 신속한 전개를 위해 대강 추린다.

    1. 1960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망명 기사 (1960. 5.29) 

    2. 5.16 군사 쿠데타 (1993년 이후 ‘혁명’에서 ‘쿠데타’로 굳어짐) 

    3. 1987년 제 13대 大選 컴퓨터 부정선거 기사 (1987. 12.) 

    4.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가짜설(1987.12/ 2012에 반복) 

    5. 트럭 기사의 김대중 암살설 (1987.5 ~ 현재) 

    6.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8년 초~ 현재) 

    7. 북한 특수군 광주 사태 개입설 (2002년~현재) 

    8. 제주 4.3 사건 (1993년 이후 사태에서 사건으로, 내용도 달라짐) 

    9. 여수 ․ 순천 사건 (1993년 이후 사태에서 사건으로, 내용도 달라짐) 

    10. 장준하 암살설 (...) 

    11. 반공 소년 이승복 기사 조작설 (1992~2002) 

    12. 대선후보(이회창) 아들 병역 폭로 사기사건 (김대업 사건) 

    13. 노무현 대통령 탄핵 부당설 보도 

    14. 2008년 광우병 사태와 PD수첩의 선동 보도 

    15. 천안함 폭침 사건 유언비어 기사 

    16. NLL 상납 대화록 파문 

    17. 국정원 댓글 사건 파문 

    18. 유언비어 종합세트 세월호 사건 

    19. 메르스 사태 

    20. 박주신 병역 판정 의혹 시비 사건 

    21. 북한 땅굴 서울 통과설 


    역사의식이 명료한 지식인이라면 위에 열거된 내용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조립할 경우 1류 국가는커녕 3류 국가도 과분하다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 논쟁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의 지식계급들이 사실의 기록에 대한 게으름을 피운 결과이다. 

    지난 70년간 해방과 건국, 전쟁과 혁명을 거치면서 하급 노동자부터 재벌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경제 일선에서 노력한 노동계급들의 성취는 이미 세계가 인정해지만 한국의 좌우 지식계급들은 제자리걸음중이거나 오히려 퇴보중인 것이다. 

    단언하자면 노동계급들이 위대한 역사적 성취를 이룩하는 동안 지식계급들은 부끄러운 지식 불량품을 양산해 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노동계급에 대한 계급적 우위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노동계급이 불량하게 생산했을 경우, 공사라면 부실공사가 되어 건물이나 교량이 무너지고 그 피해가 확연하게 발생한다. 불량식품을 제조 및 판매했을 경우에도 그로인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사고가 터진다. 그 때문에 처벌과 단속, 제도의 점검과 개혁 같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같은 사고가 재발되지 않는 시스템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계급에서는 노동계급과 같은 시스템의 진화가 아예 없다. 거짓을 기록해 두고 그대로 방치해 놓아 시간이 흐르면서 ‘거짓말의 歷史化’가 발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이승만 망명 기사의 역사화에서 시작된 한국 현대사의 왜곡은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도 바로잡혀지지 않은 채 교과서나 언론이나 가릴 것 없이 ‘사실화’되어 있다. 

    국부에 관한 역사왜곡이 바로잡혀지지 않는 마당에 국가 정체성 운운 하거나 국사 교과서 국정 운운 한다는 것이 실소를 머금게 한다.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 관에서 발표하는 기회를 통해 1960년 5월29일 발생한 작은 사건의 실상과 허상을 구별해 보고 언론의 오보가 어떻게 역사화 되는지 그 과정을 차분하게 되짚어보고자 한다.

    ◈1부 國父를 추방시킨 《경향신문》의 오보 기사 거짓말과 진실의 교체작업이란

    역사화된 거짓말의 수정작업은 번거롭고 까다롭다. 거짓의 수정작업은 단순히 잘못된 문장의 퍼즐만 찾아 바꾼다고, 거짓을 유포한 자들을 비판한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역사로 굳어진 거짓말은 이미 그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 세포처럼 인접 문장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위에서 살아 있다. 읽은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이미 그런 식으로 기억이 되어 꿈틀댄다. 수정작업은 생체조직의 이식수술처럼 정교하고 끈질긴 교체작업이 요구된다. 그래서 어렵다. 

    역사화된 거짓말은 문장 몇 줄만 바꾼다고 복원되지 않으며, 지금의 사례처럼 전후과정을 재조사하듯 훑어 내리며 거짓의 문장세포들과 연결된 인접 세포들까지 일일이 걷어 내거나 의미부여를 새롭게 하며 위치 수정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을 제거한 자리에 이식된 ‘진실’이라는 새 조직이 다시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기억으로 뿌리내리고 살 때까지 ‘간병’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교체할 진실세포가 완전멸균된 것이어야만 후유증이 없다. 이런 난해한 작업을 하다보면 문득 우리를 감탄케 하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혜안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이제부터 그 지난한 작업을 시작해 보자. 지금은 아예 국민의 상식이 되다시피 한 <건국 대통령의 망명>은 《경향신문》의 오보로 인해 역사화 되어버린 사건이다. 

    먼저 이 사건의 실상(實像)을 들여다보려면 4·19가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959년 초, 아니 더 깊이는 1956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 무렵까지로 거슬러 가야 한다. 

    당시 이승만 정부를 떠받치는 관료들의 생각과 《경향신문》등 야당지향의 언론사 간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배경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1959년 무렵으로 가 보자.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 지금의 천주교 서울 대교구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이 창간한 신문사로 1959년 무렵엔 자유당의 독주를 강도 높게 비판하던 야당지(野黨紙) 중 하나였다. 문제는 비판의 객관성과 공정성에서 비롯됐는데, 1959년만 해도 1월부터 4월 중순까지 4개월 동안 무려 5건의 기사에서《경향신문》의 중요 실책이 드러났었다. 

    정부와 야당지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빚어진 《경향신문》의 연이은 실책은 이승만 정부로 하여금 법령에 의한 강제폐간 명령을 내리게 만들었다(1959년 4월30일). 

    당시 폐간의 이유가 된 다섯 건의 기사는 아래와 같다.

    ① 1959년 1월 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간의 면담 사실을 날조, 허위 사실을 보도. 

    ② 2월 4일자 단평 〈여적(餘滴)〉이 폭력을 선동. 

    ③ 2월 15일자 홍천 모(某)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처분 기사가 허위사실. 

    ④ 4월 3일자에 보도된 공산간첩 하(河)모의 체포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지원. 

    ⑤ 4월 15일자 대통령 이승만의 회견기사 〈교안법 개정도 반대〉가 허위보도. 


    《경향신문》은 ①번 2월 11일자 스코필드 박사 관계 사설과 ⑤번 4월 15일자 이승만의 회견기사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정정기사를 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해당 기사의 정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불완전한 정부에 대한 불완전한 야당지 간의 피 튀는 싸움이었을 것이다. 

    양측 모두 상대를 ‘절대악(絶對惡)’으로 상정하는 데 서슴지 않았을 것이며 동시에 자신들은 ‘절대선(絶對善)’의 위치에서 군림했을 것이다. 

    《경향신문》에 의한 2건의 정정기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폐간령을 내렸다. 이로써 신문 발행이 중단되자 《경향신문》은 사법부를 통해 ‘행정처분취소 청구소송 본안(本案) 및 가처분신청’을 낸다. 그 해 6월, 사법부는 《경향신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59년 6월 26일, 서울고등법원이 <행정처분효력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부의 폐간령을 무시한 채 신문 발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법원의 판결 직후 폐간령을 철회하고 다시 ‘무기발행정지’의 행정처분을 내린다. 이로써 《경향신문》의 계속 발간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경향신문》으로서는 사법부의 판결조차 무시한 독재 권력의 횡포로 보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경향신문》으로 하여금 법정 투쟁을 불사하게 만들었고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까지 상고되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이듬해인 1960년 4월 중순 이후에나 내려질 것으로 보여 거의 1년 가까이 《경향신문》은 신문 발행을 하지 못했다. 

    우남 계열, 도산 계열, 인촌 계열의 극렬 투쟁 언론과 정부 간 극한대립 상황의 저변을 보다 온전히 살펴보려면 <경향신문 對 이승만 정부> 혹은 <민주 對 독재>와 같은 단순한 시각을 벗어나 ①이승만의 입장 ②각 진영 간 세력관계, ③폐간된 신문사 직원의 심리, ④우파 지식인의 시각 등을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망국과 식민시대, 해방, 분단, 좌우 대립, 건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건국 대통령으로서 12년간 재임했던 이승만은 문맹률 80%를 웃돌던 국민들을 다스리고 거느려야 했다. 동시에 ‘공산주의’와 대결하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전통적 정치문화와는 상이한 제도를 자신이 건국한 나라에 이식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갔다. 팔순을 넘긴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그 노고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이 입장이 이러하다면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군신유의(君臣有義)를 기치로 삼는 전통 유교문화권의 지배계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승만에 대해 장유유서나 군신유의 같은 젠틀한 가치관을 적용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가혹하리만치 매몰찬 비판을 가했다. 

    《경향신문》을 포함한 당시 언론들의 잔혹한 비판도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었다. 1948년 건국 이후 1960년 하야까지 12년간 한국의 정당 정치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최근에 이주영 선생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된 故김인서(金麟瑞) 목사의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주영 엮음, 비봉출판사 2016)>란 책이 매우 요긴했음을 밝힌다. 

    김인서 목사는 그의 글에서 이 문제를 '당파싸움에 기인한 민족적 비극'이라 불렀다. 발췌해 본다. 독립운동 집단 중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계열,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 계열,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계열의 세 계열(系列)이 지금까지 내려온 3대 주류이다. 

    이 박사와 도산 계열은 50년 이래 싸워왔고, 이 박사와 인촌 계열은 건국 이래 싸워 왔다. 과거는 어찌 되었든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해방과 건국 후에는 세 계열이 합력하여 건국대업(建國大業)을 완성하기를 전 국민이 기대했다. 그런데 도산·인촌 양파(兩派)는 민주당으로 합해 가지고 對 이 대통령 극한투쟁을 벌였다. 6·25 유혈 참극 중에도 싸우고 피난 중에도 싸움으로써, 적전(敵前)에서 이 대통령을 타도하는데 성공했다. 

    도산·인촌 양파(兩派)는 공동의 적(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후 도산계는 집권 민주당(民主黨:민주당 신파)으로, 인촌계는 신민당(新民黨:민주당 구파)으로 갈라져 맞섰다. 이 당파 싸움판에 방공(防共)질서는 무너져서, 국가 위기일발 상태에서 5·16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 박사의 죄가 아니고 도산·인촌의 책임이다.(하략)>(위의 책p.20) 

    그러니까 언론들이 내걸어온 <민주 對 독재>의 구도는 그들이 내 건 명분에 불과했고 50년 동안 혹은 건국 이후 내내 우남, 도산, 인촌 계파간의 극한 대립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계파간의 극한 대립 속에서 폐간 조치된 신문사 기자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심리까지 읽어내야 할 터인데, 아쉽게도 지금 현재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청취하기에는 시간의 이끼가 너무 두터워 난망하다. 오직 짐작으로 유추해 보건데, 誤報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언론사 기자들은 직장폐쇄와 실직의 원망을 이승만과 정부로 삼았으리라. 게다가 사법부조차 언론사의 편을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연이은 폐간조치는 기자들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는 4·19 전후와 이승만 망명에 관한 기록물들 속에서 동원되는 극단적 표현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산 계열 

    “이승만은 반역의 원흉이다”(최희송·崔熙松 의원)

    “사기꾼으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이승만”(장준하·張俊河) 

    “이승만은 독립운동도 자기가 대통령을 해 먹으려고 했고 또 건국도 자기가 대통령 해 먹으려고 했다”(신상초·申相楚) 

    인촌 계열  

    “똥은 비단보에 싸서 하와이에 보내고 이승만의 부하 똥 구더기들만 재판받고 있다.” (동아일보 1960년 7월 6일자, 구상·具常의 기고문) 

    동아일보에서는 이승만은 ‘독재자’, ‘폭군’, ‘깡패 정치가’ 운운하면서 12년간 매일같이 공격했고 4·19 후에도 절기(節期)따라 욕하고 있다. (김인서 목사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p. 25) 

    동아일보에서는 이승만에게는 ‘씨(氏 )’, ‘선생’, ‘전(前) 대통령’, ‘박사(博士)’ 등의 명호(名號)를 쓰지 말자고 했다. (김인서 목사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p. 25) 


    한편, 우파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건국 시기의 정부나 공무원 측의 심정도 헤아려야 한다. 이 대목에서 유력한 기록물로 삼을만한 책이 있는데, 4·19 이후 혁명재판에서 사형당한 최인규(崔仁圭) 전 내무부 장관의 수기이다. 가난 속에서 연희전문대학 상경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기업과 관료생활을 했던 그는 건국 시기의 우파 지식인이었다. 

    훗날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그가 군사정권 하에서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을 때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이 수기는 아쉽게도 미완성본이다. 죄수에게 수기를 쓰라고 권한 것도 군사정권이었고, 미쳐 다 쓰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형집행을 한 것도 군사정권이었다는 점은 다른 측면에서 고려해 볼 문제이지만, 여기서 이 문제의 언급은 생략한다.

    ▶우파 지식인 崔仁圭 자서전에 비친 시대상

    최인규는 1956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외자청장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1950년대 중반의 대한민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못지않은 1956년 5.15 제2대 정부통령 선거 역시 ‘실패한 선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인규 외자청장은 여당인 자유당이 수세에 몰린 선거 국면에서 야당은 가혹하리만치 여당의 실정을 비판하며 현실을 무시한 공약과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로 표몰이를 해 갔다고 한다. 그는 1960년 선거의 비극은 이미 1956년에 잉태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휴전 3년 뒤인 1956년 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자유당) 신익희(민주당), 조봉암(진보당) 3인이 등록했고 부통령으로는 이기붕(자유당), 장면(민주당), 박기출(진보당), 윤치영, 이범석, 백성욱, 이윤영 무소속 4명 등 7인이 등록했었다. 

    사형수로 시대의 기록을 남긴 최인규의 회고록을 발췌해 본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의 선거공약은 내각책임제 구현, 한일 간 문제 정상화, 현실적 환율 채택, 국방군의 대폭 감축, 국군의 현대화 등이었다. 민주당의 선거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후보자에 대한 극악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 

    특히 이대통령의 건강에 대하여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유포하여 전국적으로 교묘한 사발통문식 선거운동을 재개하였다. 민주당은 이 방법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이 박사는 ‘아랫목에서 밥먹고 윗목에서 XX는 산송장이다’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자유당은 이에 대항하여 이 박사 개인의 위대함과 과거의 치적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선전에 있어서는 민주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조직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진보당은 이 중간에서 별로 활발한 선거운동도 하지 않고 용공세력과 반정부 반보수층에 의존하였다. 부통령 후보 윤치영, 이범석, 백성욱, 이윤영 등은 그 정치성분이 친(親) 이 박사 내지는 친 자유당이므로 당초부터 자유당 공천 이기붕 씨의 표는 분산될 우려가 있었고 이 대통령께서는 당시 이분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사퇴하라는 권유도 하시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자유당이 민주당에게 부통령 자리를 빼앗기게 된 중대한(나는 결정적이라고 생각함) 원인이 되었다. 장면씨는 4백10만2천6백54표로 당선되고 이기붕 씨가 15만 표만 더 얻었다면 장면 씨를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중략>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전제군주 정치와 봉건사회 제도 하에서 ‘자유’라는 것은 향유하여 보지도 못하고 자유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책임도 없이 살아왔다. 40년간의 일본 식민 통치와 3년간의 미군정, 그리고 잠시나마 공산군 점령 하에도 살아보았다. 5.15 선거 당시에는 아직도 휴전이 성립된 지 얼마 안 됐고 6·25 동란의 가지가지 국민적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아니한 때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이 구호야말로 국민의 편에서는 구세주가 외치는 복음같이 들렸을 것이다. 못사는 모든 원인이, 불행의 모든 원인이 이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못하는 데 있고, 이 대통령만 물러가면 일시에 정치, 경제, 개인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 같이 선동하였고 국민은 그것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주당 후보들의 지방유세는 인기가 있었고, 청중이 운집하고 여당 후보의 유세에는 관심도 없을 정도였다. 이 박사는 선거 중 한 번도 유세하지 않고 이기붕 씨만 하였으나 인기도 없고 개인적인 매력도 적었다. 경찰을 동원하여 야당후보의 연설을 방해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이 신문이다.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위시하여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 국민이 돈 주고 사 보는 신문은 전부 ‘못살겠다. 갈아보자’, ‘타도 이박사’에 전력을 다하였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다.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언론인 여러분, 이제 그 당시의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내놓고 읽어보시라.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시라. 5.16 군사혁명으로 물러앉은 전 민주당 지도자 여러분, 그 당시의 신문을 보시라. 입장을 바꾸어 누가 그런 정세 하에서 치안을 유치할 수 있고 국가자체를 유지할 수 있을지! 

    나는 당시(1956년 -필자 注) 자유당 간부도, 내무장관도 아니었다. 따라서 내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냉철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야당의 공세는 5월3일 한강 백사장 연설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정확한 인원수는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신문은 30만 이상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계속적으로 ‘타는 불에 기름을 쳤다’ 여당은 서울에서 연설도 못하였다. 민주당의 독무대였다.

    (최인규 옥중 자서전, 1984년, 중앙일보사 간, pp 185~189.) 


    ▶개념 분화가 되지 못했던 시대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단순히 여야 갈등이라는 표현으로 정부와 《경향신문》간의 갈등으로만 묘사하면 실상과의 오차를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1959년 가을,《경향신문》사태가 법정 공방으로 넘어가면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중에 해가 바뀌어 1960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이 선거는 관례대로 5월 중순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유력한 대항마인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서 머물던 2월3일, 정부는 선거일을 무려 두 달이나 앞당겨 발표해 버린다.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농번기는 7월 이후에도 피할 수 있다”는 야당의 즉각적인 반론은 정부와 자유당의 답변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이승만-이기붕’ 對 ‘조병옥-장면’ 간의 정·부통령 선거 구도는 ‘지키려는 여당’ 對 ‘분노하는 야당’간의 대결, ‘守權’ 대 ‘忿怒’의 구도로 고착하는 중이었다. 

    ‘지키려는 여당’에게는 대통령과 부통령 두 사람 모두의 당선이 목표였는데 야당에 비해 몹시 초조했다. 여당인 자유당이 초조했던 이유는, 당시 86세였던 노구의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 마지막 출마여서 그의 연임을 통한 향후 집권은 요원하다는 점 이외에, 대통령 재임 중 노환 등으로 사망할 경우 부통령에게 권력이 승계되는 절차 때문이었다. 

    특히 1956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 후보에게 부통령 자리를 내어준 경험이 있던 자유당으로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대통령 비서로 오래 일했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 놓아야만 권력이 안정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기붕 후보의 상대는 이미 부통령을 지낸 민주당의 장면 후보여서 경쟁이 되질 못했다. 

    이런 자유당이 안고 있을 초조감과 6·25 동란과 휴전으로 인한 戰後 불안감 등이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자유당 선거캠프로 놀랄만한 소식이 들어온다. 선거를 한 달 앞둔 1960년 2월15일,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육군 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던 조병옥 박사가 병상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이로서 이승만 대통령 후보는 단독출마가 되니 자유당으로서는 그의 선거운동은 불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자유당은 오직 부통령의 당선만이 목표가 되었다. 이때부터 자유당은 부통령 당선을 위한 부정선거에 집중한다.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약 1년 전인 1959년 3월 20일 취임하면서 취임사를 통해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었다. 자유당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부정선거를 피할 길이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김인서 목사의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주영 엮음-비봉출판사 2016)』에서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전 법무장관 홍진기 씨의 옥중수기에 의하면, “이 박사 당선은 물론 이기붕 씨 당선도 염려 없었는데, 당시 내무장관이 자기 공(功)을 세우려는 작란이었다”고 하였다. (위의 책 p. 38) 

    김인서 목사가 인용한 홍진기 법무장관의 진술은 이기붕 후보를 과대평가하고 장면 부통령의 진영을 과소평가하면서 동시에 최인규 내무장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다. 이승만의 부정선거 의도가 없었음을 입증하려던 김인서 목사의 실수로 보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정리해 보자.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 둔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 후보의 당선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낙선도 명약관화한 일이 되고 있었다. 집권 여당으로서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지만 86세의 대통령이 유고(有故)시엔 부통령에게 권력이 이임되는 절차가 자유당으로서는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은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부정한 방법들을 최대한 동원해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비극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유당 

    지금 와서 이런 모습을 보면 블랙 코미디 같아 실소를 자아내지만 1951년 12월에 창당된 자유당이 대한민국 정당 정치 사상 최초의 여당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볼 필요가 있다. 

    해방 당시 80%이던 문맹률이 15년 간 20% 미만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12년 밖에 안 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10년도 채 안 된 정당 정치의 짧은 체험기간은 국민의식을 성장시키는 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국민에게는 ‘임금’과 ‘대통령’의 개념 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유교 문화의 유산이던 忠의 개념과 임금인 君의 개념도 여전히 남아 있어 대다수 국민들은 대통령을 임금의 다른 표현 정도로 여기던 시대였다. 

    ‘국가’라는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권력자’라는 개인에 대한 충성의 개념 분화, 公(Public)과 私(Private)의 개념 분화가 성리학적 유교문화 속에서는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일제 36년간 조선총독부를 통해 습득된 정치문화가 어느 정도 상쇄보충해 주기는 했으나 그것도 천황제라는 전체주의체제여서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공무원의 정치중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뜬구름 같아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시대였다. 헌법과 선거법을 포함한 모든 법률과 법규들은 이상적인 목표를 두고 정해졌지만 대다수 국민의 법의식은 아주 낮았다. 고무신과 막걸리 없이는 여야 모두 선거를 치루기 어려웠던 현실인데 반해 약 10만여 명으로 짐작되던 1960년 당시 대학생을 포함한 야당과 반정부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법의식은 거기에 비하면 매우 이상적이었다. 아니 비현실적이었다. 

    게다가 지식인들의 법의식이 일반 국민에 비해 높았던 것은 지당한 사실이지만 그들 역시 공정성이란 측면에서는 여전히 후진적이었다. 

    당시 시판되는 모든 언론이 야당 편에 서 있었고 상대 정당의 반칙에는 엄정했던 반면 자당의 반칙에는 너그럽게 보도하던 시대였다. 언론사마다 내 걸었던 공명정대, 불편부당 같은 사시(社是)는 극단의 형식 같은 레토릭에 불과했던 시대였다. 

    태어난 지 열두 살, 이념대결과 전쟁을 겪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은 대한민국의 선거판에서는 부정선거로 인한 불법, 탈법 등 피할 수 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노정되어 있었고 이는 정치발전선상에서 치러야 할 성장통일 수밖에 없었다. 

    느슨한 선거 법 문화의 시대에 대한민국 최초의 여당인 자유당은 단 한 번도 정권이양의 경험이 없었다. 창당 순간 입에 금수저가 물려 있던 셈이었다. 

    선거 패배가 어떤 풍경을 그려낼지 그저 불안한 상상만으로 버티며 9년째 집권해 온 자유당으로서는 가중되는 정권 피로도를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세 번째 집권 연장을 목표로 선거에 임하자니 초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음미해 보자. 부정선거를 앞장서서 지휘했던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李박사만큼 존경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부정선거’와 ‘법대로’의 양 진영 간에는 미국에서 이식된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피치 못할 비극의 함정이 열려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선거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의 공간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를 가리는 생존의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이 처한 입장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사람들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이 곧 ‘자유당’이라고 믿는 최인규 같은 우파 지식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문제였다. 

    이들에게는 권력 연장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데 이르고 보면 손쉽게 효과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부정선거와 규탄시위는 마주 보고 달려오는 두 대의 기관차처럼 언젠가는 충돌해서 난리가 나게 돼 있었다. ‘서로 다른 정당성이 마주보고 달려오는 비극’이 내재된 시대였던 것이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호헌혁명 


    3·15 선거는 그렇게 치러졌고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88.7%)와 이기붕 후보(79%)가 당선 확정됐다. 하지만, 어느 말단 경찰관이 문서로 작성된 <부정선거지령서>를 민주당에 제공하면서부터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졌다. 드디어 두 대의 기관차가 충돌해 버린 것이다. 

    연이어 마산에서 학생 최주열 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어 누가 보아도 가해자는 경찰임을 알게 해 주었다.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반정부시위로 급변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가 아닌 부통령 선거의 부정으로 4월26일 하야하게 된다. 4·19는 좌·우 대결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 집권당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지식인과 학생, 야당 및 언론 그리고 일반 국민이 가세하여 집권당과 대결하면서 시작된 충돌이었다. 이들이 지향했던 바는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노선과 ‘시장경제’ 체제로의 ‘헌정질서’ 회복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집권당에 대한 비판은 ‘이승만’ 개인으로 대치되는 수가 많았다. ‘이승만 타도’ 같은 슬로건이 빈번했고 시위 도중 그의 동상을 끌어내려 부수는 등 ‘개인 이승만’을 부패의 원점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노선과 ‘시장경제’ 체제의 ‘헌정질서’를 도입해 국가를 창건한 주인공도 ‘개인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선과 체제를 담은 ‘헌법 체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헌법 체계’를 수호하는 ‘호헌 혁명’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4·19정신은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 호헌 혁명’이라고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애쓰기보다 사태 수습에 앞장섰다. 특히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들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란 말로 반응했다. 

    그는 병원을 찾아 부상자를 위로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맞았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 불의에 대항해 고종 퇴진운동을 벌이다 사형수가 되기도 했었기에 이승만 다운 반응이었다고 평가된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야 직전까지 군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군의 무력진압을 강하게 요구한 바 없었다는 점이다.

    4·19 혁명은 헌정질서의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국민에 의해 시작’되었고 ‘통치자의 하야’를 통한 ‘국민의 요구를 수락’하면서 ‘완성’되었다. 4·19 혁명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순간을 완성된 호헌 혁명으로 보는 이유는 이승만과 시민과의 敵對 상태가 해제되고 자연스런 인간관계로 복구되었기 때문이다. 

    4월26일 오후 하야한 이승만이 자신의 거처였던 이화장으로 돌아가자 학생과 시민들은 그에 대한 신임을 되살려 “노후에 편안하시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이화장 담장너머로 시민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민들을 향해 “놀러들 오시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 순간, 지식인들이 ‘4·19 자유민주혁명의 완성선언’을 했었다면 후일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이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명의 의미도 퇴색해져 오늘날까지 ‘민중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두 계파로 갈라져 갈등중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 일반 국민들의 이승만에 대한 애정과는 달리 언론인과 반정부 지식인들에게는 ‘개인 이승만’에 대한 증오가 여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 년 전 폐간 조치를 당해버린 《경향신문》은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다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운명이 걸렸던 《경향신문》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2부 실상과 허상


    ▶진실과 추측

    憤怒의 노예가 되어있었을 《경향신문》은 판결을 기다리던 중 4·19를 맞는다. 사건 사고가 언론인들의 주된 먹잇감이라면 폐간 조치되어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기자들로서는 자신들의 직장을 폐쇄시킨 ‘개인 이승만’이 무척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경쟁사들이 연일 4·19 데모로 특종을 쏟아내고 있을 때 직장 폐쇄로 경쟁지 기자의 기사를 읽고 있어야 하는 《경향신문》기자들의 괴로웠던 심정도 이해할 대목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위는 그칠 줄 모른 채 가을 가뭄에 번지는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더니 급기야 대통령 하야에 이어서 자유당의 몰락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상황을 맞는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던 4월26일,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몰락이 확연해지자 대법원 연합부는《경향신문》에 대해 '발행허가 정지의 행정처분 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로써《경향신문》은 정간된 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자 조간(朝刊)부터 복간되었다. 4월28일 새벽, 경무대 관사에서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자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는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5월29일 하와이로 출국한다. 

    <하야-칩거-출국>까지 약 한 달 동안 허정 내각 및 이승만 전 대통령 측의 움직임과 이를 탐문했던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는 두 개의 흐름이 존재했다. 하나는 ‘진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단에 의한 ‘추측’이었다. 진실이 실상이며 추측은 허상이었지만 언론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허상을 따라간다. 이제부터 그 두 개의 흐름, 실상과 허상을 추적해 보자.

    ▶실상: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장

    요약하자면, 대통령 직에서 하야(1960.4.26)한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는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겨(4.28) 생활하다 5월29일 새벽에 요양 차 하와이로 떠났다.

    하와이 체류기간은 2주내지 한 달 정도를 보았다. 그래서 짐도 간단했다. 이 같은 실상을 입증하는 기록들을 확인해 보자. 

    먼저 내각 수반을 지낸 허정 씨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는 기간 중 주변 여론 등을 살펴볼만한 내용을 발췌해 본다.

    <(4월25일-필자 注) 서교동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우리 집에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총성이 들려왔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총성에 귀 기울이며 사태가 급전직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국 수습의 유일한 길은 이 대통령의 하야 하나 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튿날인 26일 아침 6시 경,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경무대로 갔다. 경무대 입구에는 밤새도록 데모를 한 학생과 시민이 몰려 있어서 간신히 인파를 해치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경무대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술렁술렁하고 침통했다. 

    비서관들이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가 하면, 이미 사표를 낸 김정렬 국방부 장관이 모습도 보였다. 나는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보아 이 대통령이 하야를 결심했음을 짐작했다. 

    사실 그때 이 대통령은 구(具)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밤에도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물러나야지’하며 하야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후에 그에게 하야를 권고한 것은 김정렬 씨니 또는 매카나기 미국 대사니 하는 말이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 대통령 자신이 ‘불의를 부고도 궐기하지 않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라고 하며 독자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허정 회고록 - 내일을 위한 증언 p.218> 


    이번에는 프란체스카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에서 하야 무렵의 분위기를 발췌해 보자.

    대통령을 사임하였으니(1960.4.28) 남편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서 집(이화장)에 가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무대로 달려온 사람들의 만류로 결국 우리는 차에 오르게 되었다. 길 가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화장 앞의 마당에서는 동네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 주었다. 대통령도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감격으로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나도 목이 메었다. 차에서 내리자 대통령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담 옆으로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 집으로 놀러들 오시오.”하고 말했다.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 대통령은 한없이 서 있고 싶어 했지만 나는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무거운 짐을 벗게 되어 편해지긴 했지만,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무척이나 염려했던 남편은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공산당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나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영향력 밑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어떠한 곤경에서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줏대 있는 지도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였다. (위의 책. p. 103) 


    위 내용들에서 딱히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을 해야만 하는 긴박한 사정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이화장에서 머물다가 하와이로 떠나게 된 배경은 어떤 내막이 있었던 것일까. 

    허정 수반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과도정부를 맡고 있는 동안 매카니기 대사와 매그루더 사령관을 자주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5월16일로 기억하지만, 그날도 두 사람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카나기 대사가 자기 비서를 내보내고 매그루더 사령관에게도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와 단 둘이 남게 되자 매카나기 대사는 불쑥 말했다. 

    “마담 리(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리 집사람에게 몇 번 전화를 걸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이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하와이로 휴양을 갔으면 좋겠다고 마담 리가 말하더랍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 박사가 국내에 있으면 구 자유당의 일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모르고, 또한 불가피하게 열릴 일종의 혁명재판에서 이 박사의 형편이 무척 불편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므로 “그거 참 잘 되었습니다. 노경에 큰일을 당하셨으니 충격인들 오죽 했겠습니까.” 하고 곧 찬성의 뜻을 밝혔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미 군용기를 제공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런 그는 그것은 어렵고 하와이의 한인 교포들이 이미 전세 비행기를 얻어 놓았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서 여권을 내어주면 자기는 곧 비자를 내 주겠노라고 함축성 있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나는 곧 이수영 외무부 차관을 불러 이 박사의 뜻을 확인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 차관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매카나기 대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 차관에게 비밀리에 직접 여권을 내주도록 지시했다. 

    이 박사가 무사히 하와이에 도착할 때까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박사의 출국을 알게 할 생각이었다. (위의 책. pp.229-230) 


    비슷한 기간을 기록한 프란체스카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화장으로 옮겨온 후, 더 자주 만날 수 있게 된 친척들이 생일이나 명절 때만 해 왔던 음식들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 왔다. 경무대 시절에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식혜를 내 손으로 만들었는데, 이화장에 와서는 친척들이 만들어 보내오는 바람에 내가 만들 기회는 거의 없었다.(중략)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이화장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위의 책. pp. 103-108)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
    금 여기에서는 그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1960년 5월24일, 하와이 한인동지회 회장 최백렬 씨로부터 초정 전보를 받았다. 대통령께서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해 드릴 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위의 책. p. 109> 


    당시 하와이 총영사를 지냈던 오중정씨(작고)를 필자(이동욱 기자)가 1994년 2월 중순 무렵 국제전화로 인터뷰했었다. 그 전말을 들어보자.

    이동욱 -최백렬 씨가 초청장을 이승만 박사에게 보낸 경위가 궁금합니다. 

    오중정- “사실은 내가 외교행랑 편으로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허정 씨가 정부를 이끌고 있을 때였지요. 그 분도 한 3주간 요양할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 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재정보증서와 초청장을 보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박사의 제자였던 월버트 최 씨와 최백렬 씨 이렇게 셋이서 상의해서 보내긴 했지요.” 

    이동욱 -이 박사님은 그렇게 해서 하와이로 가신 것이군요. 

    오중정-“그것도 아닙니다. 초청장은 흐지부지 됐고 휴가처럼 그냥 들르는 것처럼 오게 됐어요.” 

    이동욱 -그런데 3주가 지난 뒤에도 이 박사의 귀국이 거부된 것은 당시 허정 내각이 거부했기 때문입니까? 

    오중정- “그럴 수가 없습니다. 허정 씨는 이 박사가 하와이 기독학원을 운영하고 계셨을 때 선생으로 와 있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는 데 그럴 수가 있을까요. 당시 여론 때문에 못 들어가신 걸로 압니다”

    이동욱 -그렇다면 이 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 분이 살아생전에 귀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있었습니까? 

    오중정- “아무도 몰랐지요. 우리도 그 후에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어요” 

    이동욱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오중정-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어려웠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봐요. 여론도 그렇고....” 

    이동욱 -이 박사가 하와이에 계실 때 전직 대통령에 관한 예우 차원에서 돈이 지급되었습니까? 

    오중정- “그런 건 없었지요. 그저 여기서 교포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셨어요"


    ▶허상: 동아일보의 시각


    결국, 이승만 박사 부부는 휴가처럼 간단히 준비하고 출발한 여행이란 사실이 실상이다. 그런데 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도산 계열이 경향신문이고, 인촌 계열이 동아일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자. 

    망명이라는 최초의 허상이 기사화된 것은 《경향신문》보다 약 12시간 앞 선 《동아일보》의 이웅희 기자(훗날 문공부 장관 역임, 작고)가 쓴 1면 특집 기사였다. 그의 기사를 엄밀히 살펴보면 언론들이 하야 후 이승만 부부의 행동을 어떻게 예단하고 오해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기사의 요건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살펴볼 수 있다. 1960년 5월 29일자 조간 동아일보 1면 기사를 전재한다.

  • ▲ 1960년 5월 29일, 동아일보는 조간에 '이박사부처 해외 망명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자료 사진
    ▲ 1960년 5월 29일, 동아일보는 조간에 '이박사부처 해외 망명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자료 사진


    "이 박사 부처 해외 망명설" "맥 미 대사가 알선?" "측근자는 부인"
    "조국서 여생 보낼 결심"


    이 박사 부처 해외 망명설 1960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조간에 실린 ‘이승만 부부 해외 망명설’ 특집 기사. 4면 체제의 신문에서 1면 톱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다는 점에 비추면 당시 동아일보는 작심한 듯 망명설을 톱기사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확인 차원에서 매카나기 대사, 정부 고위층 인사의 반응도 1면에 두 꼭지를 할애해 실었다. 확인된 답변들은 ‘망명 계획 사실 무근’이었지만 ‘~카더라’식의 기사로 망명을 부정하는 답변들은 거짓말처럼 읽히게 돼 있었다. 한 신문이 이 정도 지면을 할애한다면 독자들로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대통령 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와 그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해외로의 망명을 계획 중에 있다는 미확인된 소식이 최근에 갑자기 유력하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박사의 망명계획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로서는 지난 십팔일 (일설에는 십사일)에 이 박사 부처가 함께 정동에 있는 ‘맥카나기’ 주한미대사사저를 방문하였다는 점과 이십사일 하오에는 ‘후란체스카’ 여사가 단독으로 재차 ‘맥’ 대사사저를 방문했다는 점 및 이십칠일에는 이박사가 용산에 있는 미8군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은 일이 있었다는 등 3개점이 미 대사관과 가까운 정통한 소식통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이 박사 가족이 망명을 계획하고 있다는 설이 진실이라면 망명예정지는 대략 미국이 확정적이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위해서는 주한미국 외교요로와의 빈번한 접촉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 박사 부처의 ‘맥’ 대사사저방문이 직접해외망명과 관련성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믿을만한 확증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同 방문이 하야 이후의 인사를 차리기 위한 단순한 예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니 4·19 사태이후 이 박사의 해외망명의 필요성을 주장한 도하 몇 신문의 논설과 기타 독자투고를 게재한 신문보도에 관해서 미국 대사관은 이례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고 미 대사관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말하였다. 

    ‘후란체스카’ 여사가 단독으로 ‘맥’ 대사사저를 방문하였던 이튿날 이십오일 밤에 미 대사관에서는 ‘맥’ 대사를 비롯하여 ‘그린’ 참사관과 ‘메이휠드’ 영사 ‘레이나드’ 정치과장 및 대사 특별보좌관 등이 합석하여 밤 12시까지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바 同 회의가 이 박사 가족의 해외망명과 모종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령의 이박사가 장거리에 걸친 비행기 편을 이용하여 해외망명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건강이 필수조건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이화장에서 이박사를 면접한 일이 있다는 모 인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박사의 건강상태는 경무대시절과 비교하여 상당히 악화된 것 같다. 전부터 널리 알려지고 있었던 이박사의 顔(안)경련증은 더 심해졌으며 시력과 청력이 현저하게 감퇴된 것 같다고 前記 인사는 말하였다. 

    이박사의 해외망명설에 관해서는 이화장의 일측근소식통은 “나도 그러한 풍설을 듣기는 했으나 여생을 조국에서 보내겠다는 이박사의 결심에 아무런 변동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 박사의 부인 ‘후란체스카’는 입장을 좀 달리해서 이박사에게 해외망명을 강력하게 권유할 수 있는 처지에 노여 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만일에 주한미국외교요로에서 이박사의 해외망명을 알선하고 있다면 미 대사관은 同 문제에 대해서 과도정부와 사전에 모종 양해에 도달치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박사의 해외망명설이 유력하게 전파되자 일부 학생을 비롯한 젊은 지식층의 많은 인사들은 이 박사가 평안하게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게 될 것을 희망한다는 견해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정계 측에서는 現 혁명단계에 있어 舊 지배체제의 영도자요 상징인 이 박사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해외망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박사가 그의 집권당시 심어놓은 많은 악의 요소에 대해서 국민으로부터 최종적인 추궁을 받게 될 대상인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아일보 1960년 5월29일자 조간 1면 톱기사 전문-


    ▶맥 대사 否認 李 박사 夫人의 往訪 사실 

    주한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자 ‘사블로스키’씨는 이십칠일 이 박사의 부인 후란체스카 여사가 지난 이십사일 하오에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를 방문한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맥카나기 대사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고 답변하였다. 동 공보담당자는 최근에 이 박사 부처가 맥 대사사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는 풍문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1960년 5월29일자 조간 1면 2단 기사)

    “들은 바 없다” 정부고위층 언명

    정부 고위당국자는 28일 상오 이박사 해외망명설과 관련해서 아직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나 접촉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동 당국자는 과도정부 자신이 현재로서는 이박사의 망명설에 관한 확인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박사의 고집으로 보아 그가 해외로 망명할 것 같지는 않으며 국내에서 여생을 보낸다하여도 국민 중 그 누구도 이박사에게 해를 주려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여 말했다. (동아일보 1960년 5월 29일 1면 하단 2단) 

    앞서 살펴본 여러 회고록과 증언들을 비춰 보면 동아일보 기사는 허상을 쫒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오히려 더 우기는 경향이 있다. 

    조선일보 월간조선부 허용범 기자가 쓴 ‘한국언론 100대 특종’(나남출판, 2000년 6월)에서는 이웅희 기자와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여기서 동아일보의 망명설 기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보자.

    사실 동아일보 이웅희 기자의 ‘망명설’ 기사는 이 박사가 망명을 결행하기 이미 보름 전에 이 박사 부처가 야심한 밤을 틈타 미 대사관을 두 차례에 걸쳐 극비 방문했다는 사실을 며칠 뒤에 알고 온갖 노력과 끈질긴 취재로 얻어낸 값진 특종이었다. 

    다만 그는 ‘예고특종’을 써놓고 “설마 일요일에야 떠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실수였다. 

    역사적 특종을 90%까지 이루고서도 ‘설마’라는 생각 때문에 최후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던 이웅희 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는 “특종을 하는 것은 하여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이 박사가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떠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이 박사가 타고 갈 CAT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일요일 날 떠나버렸고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진짜 특종은 놓쳐 버린 셈이다. 더 기막힌 것은, 나중에 이수영 외무차관이 얘기하는데,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외무부 가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기자가 누구라도 오면 흘려주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도 안 오더라는 것이다. 기자는 운이 좋아 특종을 하기도 하고 운이 나빠 특종을 놓치기도 하지만, 하여큰 특종은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그것을 통해 또 깨닫는 바였다"


    이 박사 부처가 야심한 밤에 미 대사 관저를 두 차례 극비 방문한 사실만으로 망명과 연결 지어 기사화하는 일은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결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닐 경우 소송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 당시엔 소송 비용 같은 개념조차 없었다. 

    기자가 작심하고 몰아 쓰면 허상도 실상이 되는 시대였다. 실상은 불명예스럽게 하야한 대통령 부부가 하와이로 요양차 출국해야 하니 조용하게 일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인데 기자들은 망명 낌새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빠뜨린다. 

    특히 이수영 차관이 ‘망명 소식’을 알려주려 했는지 아니면 ‘하와이 요양차 출국 소식’을 알려주려 했는지에 대한 확인절차도 없고, 시도도 없었다. 그저, 언론이 바라는 바대로 비행기로 떠났으니 ‘망명’으로 간주 한 채 기사를 썼고, 누가 비슷한 이야기라도 하면 ‘망명’에 견주어 짐작한 것이다. 이웅희 씨는 평생을 그렇게 믿고 살다 2014년 작고했다.

    실상: 5월 29일 아침의 진실 

    5월 28일 저녁, 동아일보의 망명설 기사가 나간 뒤 다음날 아침까지 이화장에서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프란체스카의 기록을 보자.

    5월29일 상오 7시 우리는 이화장을 출발했다.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줘”하고 부탁했다. 

    김포비행장으로 가는 길 가에는 평화스러운 초여름의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 가지런히 심어 놓은 모를 바라보며, 대통령은 풍년을 비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간 동안, 기자들이 비행기 안으로 와서 회견을 요청했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기내에 세관원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하였다. 우리의 짐은 전부 4개였는데, 대통령의 옷이 들어있는 트렁크 하나와 내 옷과 소지품을 챙겨 넣은 트렁크, 그리고 마실 것과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와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였다. 세관원이 보지 않은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내가 이화장 현관을 나오기 전에 응접실 탁자 위에서 무심코 집어넣은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통령이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것을 집어넣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프란체스카,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pp.109-110-


    이번에는 허정 수반의 수기를 보자.

    이틀 만에 여권은 이 박사에게 비밀리에 수교됐고, 하와이 교포가 전세낸 CAT 항공기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이화장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동안 일어날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고 매그루더 사령관을 불러 미군 헌병의 경호를 부탁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신임하던 국군의 모 장군을 신교동의 내 집으로 불러 한국 헌병의 경호를 지시했다. 이 장성은 그렇게 하면 말이 새 나갈 염려가 있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5월29일 새벽, 이수영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가서 이 박사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나는 직접 김포 공항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이어서 공항 직원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아, 나는 그들을 깨우게 하고 이 박사 출국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이 박사 내외를 태운 차가 새벽이 어둠속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향신문》의 취재진이 뒤따르고 있지 않는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박사 출국의 눈치를 채고 경향신문에서는 밤을 새워 이화장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나의 손을 잡고 “바쁜데 여기까지 왜...”하며 말을 맺지 못했다. 짐은 서너 개의 슈트케이스뿐으로 잠시 휴양 차 출국하려는 이 박사의 진의를 짐작게 했다. 

    뒤따라온 신문 기자가 이 박사에게 소감을 묻자, 옆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신 대답했다. “그는 한국 국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듯해서 이 박사 내외를 기내로 안내했다. CAT 전세기는 정비 관계로 약 한 시간 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넓은 비행기 안에는 이 박사 내외와 내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앉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박사나 나나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 박사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멨다. 비행기의 정비가 끝나고 출발을 알리자, 이 박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 “염려 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 이 말 이외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박사와 내가 직접 나눈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나는 바로 공보실을 통해 이 박사의 출국을 발표했고, 국회와 언론과 국민은 이 박사의 출국 문제로 논란을 일었다. 

    나는 국회에 불려가서 이 박사 출국의 경위를 설명했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이 박사 출국 조치에 대한 나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설명을 마치고 하단하자, 곽상훈 의장과 그 밖의 많은 간부들은 “영감 잘 내보냈오”하며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 후에도 이 박사 출국 문제로 논란이 많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출국 조치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pp.230-232


    허상 : 경향신문의 시각 

    1960년 당시 동아일보 5월29일자 조간은 하루 전날인 28일 토요일 오후 7시부터 가판(街版)이 시중에 깔린다. 가판은 서울 시내의 모든 언론사에도 가장 먼저 배달된다. 그러니까 이화장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트렁크에 옷가지들을 챙겨 담고 있을 무렵, 동아일보의 예측 기사가 시중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 《경향신문》 숙직실에서 숙직근무를 하던 윤양중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윤양중 기자는 1957년 중반에 《경향신문》 공채 1기로 입사해 국방부 수습기자와 법조 출입기자를 거쳐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부 기자가 아니어서 저간의 사정에 대해 밝지 못했다. 오히려 현역 군인들이 그의 주된 정보통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전화를 건 사내는 이화장에서 다음날 새벽에 대통령 부부의 해외출국 소식이 있음을 알고 제보하는 것이다. 

    허정 수반이 군 장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는 기록에서 미루어 보면 제보자가 허정 수반과 의논했던 군 장성 본인이거나 그의 입을 통해 정보가 새 나갔을 것이다. 전화를 받은 윤양중 기자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이 부분은 허용범 기자의 책 ‘한국언론 100대 특종’에서 발췌해 본다(허용범 기자와 인터뷰했던 2000년 당시 윤양중 씨는 간행물윤리위원장이었고 현재는 일민미술재단 이사장이다-필자 注).

    “1960년 5월28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당시 나는 사회부 소속으로 국방부를 맡고 있었는데, 그날은 순번에 따라 혼자 야근 숙직이었다. 그때는 4·19가 일어난 지 40일 후로 전국이 비상계엄 상황이었다. 아마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비상계엄으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4·19때 120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1천 여 명이 부상을 당했었는데, 그것이 일단 잠잠해 질 때였다. 자유당은 이미 몰락했지만 이화장에 칩거하던 이승만은 4·19의 책임론에 늘 시달리고 있었다. 밤 11시 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중년남자의 목소리였다. 

    “《경향신문》 편집부 맞습니까? 내 얘기를 잘 들으시오. 내일 이화장(梨花莊·서울대 문리대 뒤쪽에 있었던 이박사의 거처) 쪽 동태를 잘 지켜보면 큰 기사거리가 있을 것이오.”

    그는 반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의아하기도 했지만 말하는 태도가 신중해 장난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그 날짜 동아일보 석간 1면에 난 ‘이박사 망명설’이란 제목의 큼직한 기사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 주변의 외교소식통을 인용한 기사로 이 박사가 조만간 망명할 듯 하다는 관측기사였다. ‘혹시’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동아일보의 그 기사를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 보았다. 일단 한 번 부딪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기자는 곧바로 사회부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리고서는 사진부장 김수종(金壽鍾·78세로 1999년 1월 작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시 《경향신문》 사진부는 부원이 모두 6명으로 전화를 가진 이는 부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 중요한 취재거리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바로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같이 갈 데가 있습니다” 

    그는 숙직 운전기사(梁義錫 씨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에게도 “통금이 풀리면 중요한 취재가 있으니 회사 깃발을 떼고 가자”고 일러두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조선호텔 맞은편에 있었다. 그는 새벽 통금이 해제되자 이화장으로 가기 앞서 먼저 광화문 동아일보부터 달려갔다. 셔터는 내려져 있고 특보(特報)게시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 가까운 중학동 한국일보로 달려갔다. 막 떠나려는 조간발송차를 잡고 한 장을 빼 보니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잘하면 어마어마한 특종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가 동숭동 서울대 법과대학 뒤 이화장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40분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경계는 그다지 엄하지 않았고 경찰관 두 명이 정원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우리는 지프를 골목에 숨겨두고 이화장 문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에게 “취재차 왔으니 양해해 달라. 물건을 좀 살 테니 잠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선 몸을 숨겼다. 

    날이 밝았으니 일요일인데, 5월29일은 마침 단오이기도 했다. 20여 분쯤이 지나자 지프가 한 대 도착했다. 경호원들 같았다. 10여분을 더 기다리자 검은 세단 한 대가 이화장으로 들어서는 데 내리는 사람을 보니 키가 훤칠하게 큰 이수영 외무차관이었다. 

    그는 검은 색 코트 차림이었는데, 육군대령시절 판문점 연락장교를 해군 출입기자로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당시는 허정 외무장관이 총리였으므로 이수영 차관은 사실상 외무장관이었다. 그 시간이 6시 20분쯤으로, 나는 그 순간 이제 이 박사의 망명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곧 벌어질 상황에 잔뜩 긴장하였다. 

    얼마가 더 지나자 드디어 여름용 중절모자를 쓴 코트 차림의 이 박사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내려와 차에 동승했다. 앞자리에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김창근 경감이 앉자 곧바로 이 박사 일행은 이화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오전 6시 45분쯤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나중에 윤 위원장이 자신의 특종기를 쓰면서 몇 번이고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고관계자들을 조사해 완성시킨 것이다. 윤 위원장의 취재와 기억에 따르면, 당시 이화장을 출발한 이 박사의 망명길 행렬은 맨 앞에 경호차(지프)·이 박사의 차(검정색 뷰익세단)·이수영 외무차관의 세단·경찰 호위차(벤) 등 네 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맨 뒤를 《경향신문》차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일행은 이화장을 출발, 원남동 로터리와 비원 앞을 거쳐 중앙청, 세종로, 서울역, 삼각지, 한강인도교를 지나 김포가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은 그 당시만 해도 포장이 안돼 흙먼지가 뽀얗게 날렸다.

    “그날따라 신호등에도 걸리지 않고 5대의 차가 나란히 달렸습니다. 삼각지 로터리를 돌 때에는 미8군 영내로 들어갈까 봐 걱정이었죠. 용산에 미군 121 후송병원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입원할 수도 있고, 거기서 후송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산비행장으로 가는 것도 걱정이었지요. 그래서 여의도로 가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차량은 김포가도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계절로는 모내기를 하기 직전이었다. 김포가도 양편의 넓은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도로 올라섰는데 이 박사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뒤에서 보니 이 박사가 따라오는 신문사 지프를 가리키며 뭔가를 묻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이박사 앞자리에 탔던 김창근 경감이 말해주었는데, 자기가 먼저 ‘신문사 차량이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놔두게’라고 했다는 겁니다. 85세의 노(老) 정객인 이 박사는 자신이 고국을 떠나는 역사적 길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다음 이 박사는 달리는 차 속에서 북한산 쪽과 물이 가득찬 논을 가리키며 프란체스카 여사와 뭔가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윤양중 기자의 나이는 만 29세. 그런 이승만의 모습을 보면서 윤 기자는 문득 ‘춘수만사택 하운다기봉’(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이라는 시 구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중에 김창근 씨에게 물어보니 우연하게도 그때 이승만이 차안에서 무슨 한 시 구절을 읊조렸는데 바로 ‘춘수만사택’으로 시작하는 그 시였다는 것이다. 

    오전7시40분에서 50분쯤, 이 박사 일행을 태운 차는 가건물로 되어있는 김포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허정(許政) 당시 외무장관 겸 과도정부수반이 중절모자를 쓰고 단정한 정장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윤 기자는 허정 씨와도 그가 서울시장 때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고 한다. 윤 기자가 인사를 하자 허정 씨는 “음 기자 왔구먼”하며 호의적으로 대답했다. 쫓겨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곳에 같이 간 사진부장 김수종 기자는 이미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다. 활주로 입구에는 그날 새벽 타이베이에서 날아온 CAT전세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전세내 보낸 쌍발기로 좌석이 41개였다. 윤 위원장이 취재한 바로는 당시 기장은 록웰(Rockwell)이었고, 그 비행기 안에는 기장과 부조종사, 남자 승무원 단 세 명뿐이었다고 한다. 

    비행기는 이 박사가 공항에 도착하고서도 약 한 시간동안 정비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도중에 기장과 인터뷰도 할 수 있었다. 그처럼 꼼꼼히 정비를 한 것은 하와이 까지 17~18시간을 비행하기 위한 준비였다. 이미 사실상 취재는 끝났다. 

    윤 기자는 초조했다. 특종만 유지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이 박사도 마땅히 기다릴 곳도 없어 기내로 안내되었다. 이 박사가 트랩을 오르자 그 아래에서 윤 기자가 소리쳐 물었다. 

    “《경향신문》 기잡니다. 국민에게 한 말씀 남겨주세요” 

    이 박사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 얘기를 하면 내 생각이 달라질지는 몰라. 다 이해해 주고 이대로 떠나게 해주어” 

    허정 수반이 그만 하라고 만류했다. 윤 기자는 이 박사를 뒤따르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도 소감을 물었다. 

    그녀는 “Nothing. I love Korea."(아무것도 없어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박사가 기내로 들어간 뒤 나도 안으로 들어갔죠. 경호원들의 제지로 인터뷰는 못했지만 비행기 안은 자세히 보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이 박사가 앞줄에 앉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몇 줄 뒤에 따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 박사 내외가 휴대한 짐이라고는, 우산과 파라솔 한 개, 이 박사가 애용하던 단장(短杖)이 함께 묶여져 있었고 타이프라이터는 케이스도 없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밖에 네 개의 중형 보스턴 백이 전부였습니다. 

    8시 45분쯤에 비행기 시동이 걸리고 곧 이륙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허정 씨와 이수영 외무차관, 김 경감, 경호원 두엇, 비행기 정비사, 나 그리고 사진기자 김 부장 뿐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최후로 조국을 떠나는 자리는 그렇게 10명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중략) 윤 기자는 이승만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왔다. 허정 씨에게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신문사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30분쯤. 회사는 이미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곧바로 호외(호외) 제작에 들어가고 석간 4개면 중 13페이지가 망명기사로 채워졌다. 스트레이트기사와 스케치 모두를 윤 기자 혼자서 작성했다.

    -허용범, <한국언론 100대 특종>, pp69-74-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경향신문은 ‘세기의 특종’을 한다. 그날 오후 경향신문 석간은 전체 4면 중 3개면 전체를 할애해 <이승만 망명>을 보도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화 했다. 당시 신문 지면을 살펴보자.  

    경향신문 윤양중 기자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승만 박사 부부의 망명 기사. 윤양중 기자는 익명의 제보 전화-동아일보 이웅희 기자의 망명설 기사에 의해 ‘망명’이라는 선입견에 발목이 잡혔다. 

    그는 처음부터 줄곧 망명이라 생각했고 필자가 그와 인터뷰하던 2013년에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1면부터 소개해 본다.

  •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이박사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 오늘아침 김포공항을 출발 “이제 무슨 말을 하겠소. 그대로 떠나게 해주오.” 허 수석 등 전송·4개의 백 휴대 국회 문제화 할 듯 

    [김포공항에서 신태민·김수종·윤양중 본사 특파원발] 

    전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동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29일 상호 8시 45분 CAT 항공사 소속 전세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일로망명의 길을 떠났다.(호외재록). 

    이날 공항에서 허정 수석국무위원과 이수영 외무차관 그리고 그의 운전수와 경호원 수명이 전송할 뿐 16년 전 극가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동포의 환호성에 묻혀 환국할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파란 많은 그의 생애를 말하는 듯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 박사는 “지금 내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소. 얘기를 하면 내 생각하는 일이 달라질지 몰라. 다 이해해 주고 그대로 떠나게 해 주오.”라고 말했으며, 프란체스카 부인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나딩...아이 러브 코리아”(아무것도 없소...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41개 좌석이 있는 CAT사의 104호기는 이날 아침 7시 반 대북으로부터 비래(비래)하여 이 박사 내외와 그들의 휴대품인 4개의 중형 보스턴백, 2개의 양산과 이 박사가 10여 년 래 애용해 온 타이프라이터 1개와 단장 1개를 실었을 뿐 아무도 따라가는 이가 없었고 승무원으로는 기장 K.R.락웰 씨, 부조종사 티턴 및 핀카바 씨의 3명 외에는 한 사람의 스튜디어스(안내원)도 없었다. 

    락웰 조종사는 이날 기상 등 비행조건이 호적(好適)하다고 말하면서 순조로우면 21 내지 22시간 후에 하와이 호놀룰루 비행장에 닿을 것이며, 도중 웨이크 도(島)에 기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허 수석국무위원은 정비관계로 이날 예정보다 2시간여 연발하게 된 기내에서 이 박사와 얘기하였는데, 그것은 “별 얘기도 아닌 이런 저런 얘기였다”고 말하였다. 허 수석은 이 박사 부처가 “휴양차 하와이로 떠났다”는 것을 공보실을 통하여 발표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4월 민주혁명의 성공으로 12년간에 걸친 장구한 일인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은 완고한 노인은 뼈를 조국에 묻고 싶다던 하나의 소망도 거두지 못하고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을 이역으로 떠나갔다. 

    이승만 박사의 해외망명사건은 30일의 국회에서 일단 문제화 될 것 같다. 민주당 소속의 대부분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국회에서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9일 상오 민주당의 양일동 의원은 “모든 부정의 수사가 현재 고인이 된 이기붕 씨에게서 멈칫하고 있는데 대해 국민은 의혹을 품고 있다고 말하면서 김구 선생과 조봉암 씨의 살해사건 수사가 전개되면 그 대상의 정점인물이 될 이 박사의 망명을 묵인한 과도정부의 태도를 국회로서는 추궁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사견을 표시했다. 

    -경향신문, 1960년 5월 29일 석간 1면 톱 기사-


    졸지에 망명객이 된 이승만은 김구 살해 혐의는 물론이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 집행된 조봉암 씨의 죽음에도 살해 혐의를 받게 된다. 화보로 가득 채운 《경향신문》 2면은 밑에 그림과 같다.


  •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망명길 떠나는 이박사 부처의 표정 환송객도 있고, 허정 국무수석이 휴양 차 떠났다는 기자회견을 해도 기자는 망명이라 우긴다. 꼭 무엇에 홀리지 않고서는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이번에는 스케치 기사로 가득 채운 3면을 보자.

    "주인 잃은 이화장 싸늘하고 빈 무덤 같아" "책상 위엔 펼쳐 논 성경 한 권만" "저 개 좀 봐 저것만 남았군" "온돌방에는 파리채만 뒹굴어" "관음보살상 두 좌가 이채" 

    거실 

    두 시간 전까지 이 박사 내외분이 머문 침실에는 깨끗이 게워진 침구가 더불베드 밑에 놓여 있었다. 방은 비니루로 깔려 있었고 옆방에는 고린도전서 13장까지 보다가 둔 듯한 신구약성경 한 권과 아무 기록없는 지도수첩 한권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흔히 맡을 수 있는 노인들의 사랑방 냄새만 풍겼을 뿐 공기는 싸늘하였다. 서재앞 벽에는 주간행사표가 영문 타이프로 찍혀 있었다. 그리곤 다른 아무런 장식은 없는 서재 옆방에는 3인용 안락의자가 하나 온돌 바닥 한구석에 있었고 조그마한 테블 위엔 파리채가 하나 그리고 메모용지(대통령 비서실) 몇 장이 뒹굴고 있었다. 침실로 돌아가는 코너에 붙은 한간방에는 풀지도 않은 자개상·경대·꽃병 등 30점이 높이 쌓여 있었다.

    앞뜰 

    중고품 등의자 다섯 개가 나란히 놓인 앞뜰 마루턱은 양지바른 쪽이었다. 거기에도 파리채 하나가 있었고 그 밑에 쓰러진 파리 몇 마리가 보였다. 맞은 편 꽃밭에는 관음보살 석상 두좌가 등의자쪽을 보고 서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 잔디밭에서 시골서 찾아오는 노인들을 자주 만나셨죠!”라고 힘없이 말했다. 

    뒤뜰

    갑자기 떠났다는 증거는 뒤뜰에 있는 시종자들의 사택과 감벽 수리에 있었다. 약 한달전부터 이화장 안팎은 수천만완 예산으로 대폭수리를 시작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였다. 앞뜰과 같이 뒤뜰도 말쑥하진 못하였다. 

    경비실 

    두평 남짓한 경비실에는 오늘 아침 열시에 도착한 편지 30여통만이 수신인을 잃은 채 데이블위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이승만 박사님께”라고 된 꼬마글씨, ‘李博士 先生’ 이라고쓴 붓글씨 ‘유도인 일동’도 있었고 ‘대한비구니수도원의 위로서신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미국여론’이란 영문잡지사와 ‘기독봉화’란 신문, ‘미국하원’의 어떤 서신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책상위의 전화 다섯 대는 쉴새없이 ‘벨’을 울리고 있었으며 수화기를 받는 순경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들을 입고 있었다. 눈물을 담근 경비 순경, 비서들의 욕을 하는 순경, 입을 굳게 다문 경관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지껄이는 사복들...이런 네가지 종류들로 경비실 안팎은 법석대고 있었다. 

    이화장 밖 

    먼 산을 보고 섰는 헌병 둘은 무조건 출ㄹ입을 허락하건만 몰려든 시민과 동민들은 좀체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정말 떠났나봐” “저 개좀봐. 저것만 남았군” 이란 대화가 ‘휴일의 오전’을 장식하였다. “우린 새벽 일찍이 교회로 가시는 줄 알았지!” 50대 여인이 말했다. “또 오나요?” 꼬마들 중의 하나는 “아저씨, 또 오시나요?”라고 물었다. 수군수군하던 시민들은 11시를 전후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꿀먹은 벙어리’같았다. 신문사의 차 10여대만 바깥에 즐비한 가운데 주인떠난 이화장의 모습은 그저 처량하게만 보였다. 사진(상)은 이화장 전경과 이박사의 서재. 펼쳐진 성경책이 보인다.(하) 

    -경향신문 ,1960년 5월29일자 3면 우상단 톱-


    "이 박사 부처 쥐도 새도 모르게 출국" "56년 만에 또 다시 하와이로" "검은 안경에 옷까지 검어" "제2공화국 맞는 단오날 아침의 일" "쏜살같이 단숨에 김포공항으로"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하야, 집권 12년만에 경무대를 떠나서 지난 4월28일 하오 2시 이화장으로 몸을 옮긴 후 은둔생활을 계속해 오던 이승만 박사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동반 29일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망명을 하였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는 서른살 때(1904년) 서재필 박사와 같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45년 10월에 역시 비행기편으로 김포에 내려 환국하였었다. 

    그러니까 56년만에 또다시 망명길을 떠난 것이다. (김포에서 신태민 김수종 윤량중 특파원기) 이날 상오 6시15분 서울 자 997호가 급히 달려오자 안으로부터 문이 열렸다. 

    전 경무대서 수행계장 김창근 경감(순경시절부터 오늘까지 만 12년간 이 박사를 경호해 온 사람이다)이 오고 약 10분 후에 서울자 2848호로 이 외무차간이 총총히 안으로 들어갔다. 

    입초헌병에게 “주일마다 방문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그때 안에서 인기척이 나며 이 박사 내외가 차에 올라타면서 측근자들에게 무슨 말인지 건네고 있었다. 

    이 박사는 검은 아래 위 양복에 검은 구두 쥐색 코트를 입고 파나마 모자를 썼으며 검은 안경을 끼었고 프 여사는 짙은 고동색 투피스 위에 같은 갈색의 토크, 검은 하이힐에 검은 핸드백 그리고 갈색 안경을 끼고 있었다.

    서울 시내 

    상오 6시 50분. 이화장 정문을 나와 미술대학앞/수의과 대학/원남동/안국동으로 해서 중앙청 앞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고 일요일이어서인지 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중앙청 앞으로 지날 때 이 박사는 부인에게 무엇인가 말하면서 북악산쪽을 가리켰다.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역 앞 로타리를 지날 때도 교통신호등은 마침 파란 신호였기 때문에 일행은 속력을 늦추지 않고 단숨에 김포공항 가도로 접어들었다. 

    김포가도 

    아스팔트 길에 차도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차량의 대열은 속력을 낮추면서 천천히 달렸다. 한 차에 탔던 경호원 김 경감 말에 의하면 이 박사는 뒤따르던 본사 지프차를 가리키며 “누구냐”하기에 “신문기자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하자 “괜찮아. 따라오게 둬 두지...”하더라는 것이고 길 양쪽의 논에 물이 가득 고인 것을 보고는 “춘수만사택....”하며 “봄물이 네 못에 가득하군...”하고 다시 풀이해 주더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3면 만평 역사를 실은 김포가도 웃고 왔다 울고 가는 독재자의 종극 CAT 4발기는 이미 닿아 있었고 미리 와 있던 허 수석이 자동차 문을 열고 인사를 하자 “날씨도 찬데 뭣하러 나왔어...”하며 트랩을 올라갔다.

    기자가 “무슨 남기실 말씀이라도...”하자 흘깃 돌아보면서 오른손만 약간 흔들어 보였다. 뒤따르던 프 여사가 재빨리 “히 세즈 리스펙트 더 피플”(국민을 존경한다고 말합니다)라고 받았다. 

    비행기에 올라 이 박사는 오른편 줄 좌석 앞으로부터 넷째줄 기창 옆 5호A석에 자리잡고 프 여사는 왼편 네 번째 7호B석에 따로 따로 앉았다. 비행기를 정비하느라고 기다리게 된 약 한 시간동안 허 수석은 이박사와 나란히 얘기하고 있었으며 프 여사는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이 박사의 이날 갑작스런 망명을 자기들도 떠나기 직전에야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허 수석이 아침식사를 묻자 이 박사는 “아직 안했어. 이따가 비행기에서 먹지”라고 대꾸했다. 떨어지기가 아쉬워 경호원과 측근자들은 이 박사 옆으로 가서 고개를 숙인 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기장의 지시로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어 기자가 “漢詩라도 한 수 남기시지 않으렵니까”하고 다가가자 이 박사는 “예 까지 찾아와 주어 고맙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생각하는 일이 달라질는지 몰라 조용히 떠나고 싶소”라고 말했다. 

    이 박사의 혈색은 전과 다름없었으나 안면은 쉴새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왼눈을 잘 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향신문, 1960년 5월29일자 3면 좌 5단 톱 기사-


    "쉴새없이 얼굴은 경련 눈물보며 춘수만사택.... "
    "
    본사차 따라가자 “괜찮아 두어 둬”"       
    "
    공항 입구선 ‘체크’없이 통과" "적막한 내무부 안 보도 통해 알았다" 


    이 외무차관은 비행기의 대절은 당국에서 주선했으나 전세 요금은 본인들이 하와이에 가서 물기로 했기 때문에 그 액수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각 8시45분 승강구가 닫히고 프로펠러가 돌아가자 이 박사 내외는 전송객들이 보이는 기창가 좌석으로 옮겨와 10여명의 전송객을 쓸쓸히 내다보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자 이 박사는 자꾸만 손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었다. 이윽고 이륙. 

    이박사 내외가 날아간 뒤 때마침 구름속에 잠겼던 오월의 기름진 햇살이 보람찬 제2공화국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혁명의 피바람도 가신 5월29일 상오 8시 45분 주일이자 5월 단오 아침의 일이다. 

    서울시경은 이 박사 부처가 망명한 사실에 몹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시경은 이 박사 망명에 대한 사전 정보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날 아침거리에 뿌려진 본보의 호외를 보고 비로소 이 박사가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박사의 망명계획은 극비밀리에 실천되었다. 지금까지 모든 정보에 밝던 치안국 특수정보과도 이승만 박사 부처가 망명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특정과장을 비롯하여 중앙분실 사람들도 이날 아침 신문사의 벽보가 나붙을 무렵에야 그 사실을 겨우 알았을 따름이다. 

    29일 아침 내무부 장관이하 차고나 기타 직원들이 등청하지 않은 적막한 분위기였고 이날 아침 치안국장실에서 각과장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대내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옛날같으면 내무부 청사가 떠나갈 것처럼 소란스러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적막속에 싸인 내무부 청사는 금석의 감을 새삼 느끼게 했다. 

    육군본부보도국장 김병률 대령 = 29일 아침 보도를 통해 비로소 알았다. 군인으로서 그런 문제에 논평하고 싶지 않다. 

    -경향신문, 1960년 5월29일자 3면 좌중-


    ◈3부 이승만 망명 특종 윤양중 기자와 53년 만의 인터뷰 


    ▶인간적으로 어려운 인터뷰

    필자는 오래 전부터 언론계의 선배들에게 경향신문 보도에 관한 문제 제기를 해왔었다. 비판기사를 쓰더라도 나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기자보다 동년배 기자들의 몫이어야 온당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혹시 모를 필자의 오판 가능성에 대한 의견 수집도 포함됐었다. 

    무엇보다 언론사라는 조직 속에 매이면 작은 기사는 몰라도 큰 기사를 혼자 쓸 재간이 필자에겐 없었다.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에는 생계문제에 쫓기어 차일피일 미루는 게으름이 이끼처럼 내려앉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만나는 언론계 선배들에게 이 문제를 기사화 해보시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이런 식의 허송세월이 어느덧 필자의 머리도 피가 말라 딱지가 앉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필자가 나서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난 2013년 2월 초, 필자는 일민 미술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윤양중(당시 83세) 선배를 만나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언론계 대선배답게 그는 필자를 편하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터뷰하는 필자는 무척 어려웠다는 점을 고백한다. 필자보다 30년 가까운 대선배에다가 그의 인생 최대의 업적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적으로 필자를 힘들게 했었다. 

    인터뷰는 핵심을 에둘러 가야 했다. 무려 한 시간 가까이 핵심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 못한 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조금씩 아플 수밖에 없는 질문을 불손하지 않게 보이려 애쓰며 던져야 했다. 

    윤양중 씨는 당시의 대특종 상황을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글이 허용범 기자의 ‘한국언론 100대 특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덕분에 세세한 디테일들을 별다른 수정을 가하지 않아도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스토리의 줄기를 따라 가다가 필자는 가지 치듯 질문을 던졌다. 답변도 종종 옆으로 새어 나갔다. 본 줄기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망명은 기정사실화 됐을 때다” 

    이동욱 -이제 퍼즐이 조금 저한테는 퍼즐이 하나씩 나오네요. 제가 여쭤보고 싶었던 부분들이 몇 개 더 있는데 그 당시 우석근 경호원님이라고. 

    윤양중 -우석근 씨는 모르겠고 김경문인가 그런데 죽었을 겁니다. 

    이동욱 -예. 우석근 씨도 나중에 돌아가시는데 이 분이 남긴 글에 보니까 아침에 이박사께서 새벽에 빨리 어디 좀 가게 출발 준비를 하라고 하셔가지고 이 양반이 차량을 준비를 하면서 어디 가까운 곳에 산책을 가시나 하는 생각을... 

    윤양중 -그랬을 겁니다. 극비리에 가려고 했으니... 

    이동욱 -그랬는데 좀 있다가 이화장에서 돌다리로 이렇게 걸어 나오시면서 우석근씨에게 “아이젠하워가 올 때 내가 있으면 국내가 너무 시끄러워져. 그러니 늦어도 한두 달 후면 돌아올테니 집이나 잘 봐줘.”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윤양중 -그랬을 겁니다. 사회 일반에서는 망명이라고 단정을 했는데 본인은 그냥 장기 요양차 가는 걸로 잠시 피신하는 걸로 가셨어요. 그래서 짐도 소홀해요. 아무리 뭐래도 대통령을 10년이나 지낸 분이 떠나면 보스턴백이라도 몇 개 될 텐데 타이프랑 우산 그거 가지고 타이프도 치다 만 것 같아요. 뚜껑도 열려있는 채로 말이지요. (공항에서) 내가 “지금 한 말씀 국민에게 남겨 달라”고 내가 트레일 밑으로 다가가면서 얘기를 하니까 이박사가 “내가 지금 아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쉬러 나가는데 내가 이 마당에 무슨 말을 하면 이 영향이 잘못 전해질지 모르니까 이만 해 주게. 그런 줄이나 알게.” 이러더라고요. 나이가 그때 팔십 사 오세였을 겁니다. 우리보다 연장이니까. 

    이동욱 -또 프란체스카 여사는 낫띵하고 아이 러브 코리아라고 그거는... 그런데 저는... 

    다른 주제로 대화가 돌아가 버렸다. 오 분 쯤 뒤에 다시 주제로 돌아온다. 

    이동욱 -그러면 그 당시에 망명으로 이렇게 굳혀진 걸 어떻게 봐야 됩니까? 

    윤양중 -우리 사회가 망명을 공인한 거죠. 

    이동욱 -공인을 한 거다? 

    윤양중 -예. 누구도 “망명이 아니다” 라고 얘기를 못 해요. 허정 씨조차도 “망명이 아니다” 소리를 못 했어요. “돌아오는 거다”라는 것은 오프 더 레코드로 한 얘기지 그거는 그때 이미 기정사실화 했어요. 정계에서는... 


    윤양중 이사장은 당시 정계와 언론계의 보편적인 시각을 말하는 듯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가 이승만의 정적들이었고 이들과 보조를 맞추던 언론들 역시 자유당과 적대적이었던 민주당 구파(동아일보)와 민주당 신파(경향신문) 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왜곡되어도 되는 것일까? 필자는 질문을 더 이끌어 간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는 거니까...”

    이동욱 -어떻게 기정사실화되는 거지요? 

    윤양중 -이 박사를 처단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재판해서 유죄 선고를 차마 할 수 없으니까 국외로 내쫓은 거다. 그러니까 타의에 의한 망명이죠. 이 박사가 격에 차이가 있는 게 상해임시정부 때도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나중에 제명됩니다. 김구 씨하고는 양립이 안되요. 그만큼 너희들은 뭐 까부느냐. 뭐를 안다고. 이 사람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받았잖아요. 

    이동욱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박사죠. 

    윤양중 -예. 최초의 박사였지요. 그런데 독단적인 성격이 좀 강했던 모양이에요. 

    이동욱 -이렇게는 볼 수 없을까요? 실제 권력자는 제대로 걷고 있었으나 사회 분위기가 기울어짐으로 해서 망명으로 이렇게 비춰진 것은 아닐까요? 

    윤양중 -그게 아니고 사회적으로 벌써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치듯이 가는 거니까 망명으로 보는 겁니다. 자기가 끝끝내 안 가겠다고 버텼으면 못 가는 거죠. 그러면 학생들이 쳐들어오는데 하야도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거고, 학생들 서울대학병원에 병문안 갔을 때. 그걸 보고서 이 사태가 심각한 거를 알았다고요. 이 사람이. 노련한 정객이니까. 대통령을 3선까지 한 사람이니까 부산 정치 파동을 한번 추궁해 보면 아시겠지만 부산에서 쫓겨날 뻔 하지 않습니까? 우리 헌법이 기형적인 게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게 근본이 이승만 박사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민당에서 내각제로 하려던 거 아닙니까? 

    이동욱 -거기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 상당히 다를 수 있는데 저는 이 분이 끝까지 자기는 고국에 돌아가야 되는데 못 돌아가는 상황에서 한 4년간을 하와이에 있다가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5월28일 저녁에 동아일보에서 먼저 망명설 보도를 하지요. 

    윤양중 -보도 했어요. 그때는 민주당이 구파와 신파로 갈려 있었고 구파는 동아일보, 신파는 경향신문이었습니다. 서로 쌍벽을 이루었지요. 그 두 신문이 이 박사의 망명을 기정사실화 한 거지요.

    이동욱 -취재 경쟁이 있었나요? 

    윤양중 -예. 망명이라고 이의를 걸 수 없을 정도로 기정사실화 했던 거죠. 

    이동욱 -그러면 외람되지만 언론이 그 당시에 만들어 간 거 아닙니까?

    윤양중 -만들어 간 거는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어요. 스스로 하야했고 대통령직에서. 

    이동욱 -하야했으면 하야한 대로 그대로.... 

    윤양중 -그러면 데모꾼들이 몰려가는 거죠. 하야는 망명을 전제로 해서 하야하는 거지. 

    이동욱 -4·19 이후 이 대통령은 하야하고 이화장으로 옮겼는데, 이화장 담장 너머로 주민들과 담소하던 사진도 나오고 데모는 데모대로 그냥 흘러가서 나중에 결국은 군부 쿠테타를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까? 

    윤양중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이강석이고, 양자의 친부모가 이기붕 씨 내외고 이런 상황에서 이기붕 씨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부정 선거로 저질러졌고, 그 와중에 4인조, 5인조, 7인조식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했단 사실을 이 박사도 나중에 알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양자가 친부모와 동반 자살하지 않습니까? 망명 한 달 전에 자살하거든요. 이기붕 씨 가족이... 

    이동욱 -맞습니다. 그걸로 다 끝났다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요? 

    윤양중 -그렇게는 안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 분이 어렸을 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감옥살이를 했어요. 한성감옥에서 사형수로서 인생의 고초를 겪은 사람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내다봤죠. 그 분이 제일 염려한 거는요, 5.16 정치 파동에서 살아남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간선제였던 거를 직선제로 바꾼 거에는 제일 두려워한 것이 일본이에요. 일본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고 물론 공산주의 무력..통일 그거 .. 한 거예요. 


    연로해서일까. 본론에서 다시 어긋나고 있었다. 
    윤 이사장은 이승만의 위대성을 설파하는 답변으로 진행되다 허용범 기자의 책에 정리가 다 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참으로 미안한 인터뷰이긴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이 분이 자랑삼는 특종 장면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82세의 윤양중 이사장은 너그러운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한동안 피곤한 기색 없이 대화를 받아 주었다. 29살에 세기의 특종을 하게 된 과정, 신문이 만들어 지던 시절의 이야기로 한 참 돌았다. 조금 기력을 회복 하는 듯해서 필자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는 질문을 던졌다.

    “이 박사가 왜 망명했냐는 질문은 받아 번 적이 없고...” 

    이동욱 -지금 제가 언론을 탐구하는 후배 기자 입장에서 선배님 기사를 몇 번이나 살펴보면 그때 나였으면 어떻게 질문을 했을까? 하고 자문자답 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 질문 자체가 프란체스카 여사한테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라고 하셨는데, 이 질문을 던진 선배님은 망명을 전제로 한 질문이었던 거지요? 

    윤양중 -예. 

    이동욱 -그런데 이승만 박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동안 워낙 많은 일들을 겪어 지친 데다가 하와이로 휴양 간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입장이 아니고 해서 “I Love Korea." 라며 눈시울을 붉힌 것이 아닐까요. 

    윤양중 -그런데 전세기를 타는 걸 보니까 남자 스튜어디스가 하나 있고 기장하고 부기장이 있고 정비사가 있고.... 

    다시 이야기는 옆길로 샜다. 비행기의 승무원들 이야기에서 기종과 외형의 이야기로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계속 따라 갔다. 한 십 분 뒤 호흡이 가다듬어 질 때 필자가 다시 본 주제를 끄집어냈다. 

    이둥옥 -지금 와서 봐도 선배님 특종을 보면 이게.... 

    윤양중 -내가 이걸, 특종기를 쓴 것도 책마다 등장하고, 인터뷰를 이런 식으로 한 게 방송에도 지금 열 손가락도 넘어요. 식상한, 똑같은 얘기야. 

    이동욱 -그러면 그동안 이런 질문을 받아보셨습니까? 왜 이박사가 망명했냐는 질문 말입니다 

    윤양중 -그런 건 받아본 적 없고...저거 했느냐 그거 얘기죠. 이 박사가 하와이에 정착해서 그 뒤 ... 그거는 소관이 다르니까.... 

    이동욱 -소관이 다르니까 그거는 상관없죠. 그런데 그날 취재할 때 저는 오늘 선배님 만나 뵙고 나서 조금 더 선배님 입장이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선배님은 이미 그 당시에 (동아일보에서) 망명설을 다 뿌려놓고 그걸 읽고 치고 들어갔으니 당연히 이런 기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고 정리되는 데요. 

    윤양중 -의문을 가질 여지가 없는 거죠. 나는 그래서 허정 씨가 내가 서울시청도 출입을 했기 때문에 내가 허정 씨를 알아요. 사회부장이 시청일지를 보면.. 하지만 실제로 일은 내가 다 한 거죠. 

    이동욱 -그때 이승만 박사의 외유인지 망명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취재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때 선배님이 완전히 독점해서 취재를 하신 겁니다. 그게 참 대단한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넘버원이 된 거죠. 그런데 이게 과연 망명이냐 아니냐에 대한 해석은 분명히 언젠가는 했어야 되는데 말입니다. 

    윤양중 -하와이로 갔던 이 박사가 귀국을 시도하면서부터 조금씩 (그 쪽 소식이) 노출되죠. 그러지 않아도 기사화는 됐어요. 이박사가 호놀롤루 주재 총 영사관을 통해서 귀국을 할려고 한다는 첩보가 있었죠. 우리 외무부를 통해서.... 

    이동욱 -그런데도 기사화가 안 됐나요? 

    윤양중 -기사화는 안 됐어요. 이박사가 늙어서 망령이 난 거다. 이 박사 망령이 난 거다. 지금 와서 어디 이화장에 돌아가서 뭘 어떻게.... 

    이동욱 -아, 망령이라고 봤군요? 

    윤양중 -그렇게 봤어요. 

    이동욱 -망령이 났다고 본 거죠? 망령이 났다?! 

    윤양중 -거기서 돌아가는 거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만 해도 초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해 준 거다. 대세가 그렇게 기울었어요. 


    윤 이사장은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이승만 死後의 일을 生前의 일과 겹쳐서 진술하곤 했다. 필자도 몇 십 년 지나 나이가 들면 이럴 것이다. 시간관념에 앞뒤가 없어진다. 세월에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자락을 마지막까지 부여잡은 분에게 과거지사의 시비를 가리려니 필자의 마음도 무겁다. 다시 정리를 하면서 질문을 했다.

    “당시 민주당에서도 망명으로 보고 있었고...” 


    이동욱 -저 같은 후배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됩니까? 건국 대통령을 반 강제로 언론들이 망명시킨, 귀국도 거부해 버린 굉장히 매정한 국민으로 봐야 됩니까? 

    윤양중 -그때는 그러니까 이박사가, 여론을 리드하는 한줌밖에 안 되는, 서울에 거주하는 한 천명 정도 되는 엘리트가 리드하면 그 밑에 사람들은 그냥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이동욱 -그러면 그 흐르는 물의 방향을 잡은 것은 분명히 언론들이었네요? 

    윤양중 -그때는 언론이 주도했죠. 그 언론이 민중하고 개입이 될 수가 없고 그 언론이 민중의 흐름을 안 거죠. 이 박사는 일국을 통치하기에는 너무 연로하다. 나이가 많다. 망명 때 85세니까 그 사람이 돌아와서 무슨 영화를 보겠어요. 양자도 이미 죽었고 이인수는 그때 死後에 양자를 봅니다.

    이동욱 -死後가 아니고 하와이 계실 때. 

    윤양중 -예. 

    이동욱 -그런데 그 분은 마지막까지 고국산천을 보고 싶어 하지만 못 돌아오고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지내다 가셨는데... 

    윤양중 -무척 돌아오고 싶었죠. 외국에서 눈 감는 게 싫으니까. 

    이동욱 -그러면 선배님께서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승만은 망명했다’고 생각해 오신 거네요? 

    윤양중 -그렇죠. 나는 지금 이동욱 씨가 ‘망명이 아닐 것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나는 솔직히 납득을 못해요. 왜냐하면 그때도 여기서 해석을 민주당에서는 망명으로 보고 있고 당연히 이미 한물 간 세대로 보고 있었고... 

    이동욱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고도 그랬죠? 

    윤양중 -외국에 빼돌렸고...더 창피를 안 당하면 좋겠다. 이런 게 기정사실화 됐어요. 

    이동욱 -그것은 선동으로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민주당 쪽에서 하는? 

    윤양중 -선동은 아니고 그만큼 3선 개헌이 3선이 무리였죠. 3선 출마하는 게. 3·15 부정선거가 나고 김주엽이가 .. 최루탄...바케스 떠나오고 그 배경은 다...그런 게 있어요. 말기적 증상이 여러 가지가 있고 그러면 편을 지어서 사진에 나왔잖아요...(청취 불능) 표하고 (청취 불능)... 표하고 (청취 불능).. 표는 순전히 중앙일보 창간 때 편집부장하던 (청취 불능)..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경향신문에 사회부 편집장인데 그 사람이 만들어낸 말인데 다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인주 묻혀 가지고... 피아노 치듯이 피아노 한 거 있고 올빼미 표는 밤중에 바꿔치기 하는 거고 그때... 


    다시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했다. 거듭된 失政, 부정선거의 여러 사례들... 

    그러나 윤양중 이사장의 이야기 속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5월28일 저녁, 민주당 구파계열 언론사인 동아일보가 망명설 기사를 1면 톱으로 내건다. 다음날(5월29일) 새벽 이박사 부부는 하와이로 휴가를 떠난다. 이것을 민주당 신파계열 언론사인 경향신문의 윤양중 기자가 특종을 하면서 <이승만 夫妻 돌연 망명>이란 제하의 특집기사로 꾸며 시중에 배포한 것이다. 윤양중 이사장은 그 후 허정 회고록이나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정부도 이 박사가 참 골칫거리... 잡아넣을 수도, 구속할 수도, 감옥에 넣을 수도 없고...” 

    이동욱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라는 책도 쓰시고 또 허정 회고록<내일을 위한 증언>에서도 망명이 아니라 요양차 출국이란 말이 언급되는 데, 윤 선배님께서는 훗날 한 번씩은 다 보셨죠? 

    윤양중 -예. 그런데 그거는 어쩔 수 없이 허정 씨는 이박사에 측근이었고 그 밑에서 그때 관료를 쭉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거구요. 이 박사 식으로 사고를 할 거고, 세상 돌아가는 인심이나 이것은 초대 대통령으로써 너무 실책이 많다. 무력국제통일이라는 게 미국의 뒷받침 없이 될 수 없고 만주 폭격을 하면 모택동이가 가만히 있겠느냐. 붉은 중국 대륙을 만든 사람이 가만히 있겠느냐. 아침은 뭐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현실성 없는) 헛소리 한다 그거죠.  

    이동욱 -그러면 이승만 박사가 망명한 게 아니고 언론이 이승만 박사를 망명을 시킨 거네요? 결과적으로? 

    윤양중 -글쎄요. 그러나 언론이라는 게 언론을 포커스를 언론에 집중하고 있는데 민중이 그렇게 생각한 거죠. 이박사는 이제 손 떼고서 타국에 가서 조용히 살다가 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고령이지만 85세라면 대단한 나이예요. 그리고 1952년 5.26 부산 정치파동을 전후해서 부통령급들이 이시형씨도 그만 뒀죠. 인촌 김성수도 그만 뒀죠. 다 그만 둔 게 이 박사에 놀아나서 그만 둔 거거든요. 이박사의 실책에 대해서는 5.26 정치 파동을 한번 보세요. 

    이동욱 -그럼 여론과 언론이, 언론이 여론을 만들고 여론이 다시 언론을 만드는 것이군요. 

    윤양중 -그렇게 물고 물리고 하는, 그러니까 선순환 구조라고 할까 악순환 구조라고 할까 하여튼 그거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는데, 언론이 일방적으로 망명으로 몰고 간 거는 아니라고요. 하야할 때부터 하야 자체가 벌써 정치에서 손 뗀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동욱 -그렇죠. 거기서부터 언론은 망명할 것으로 간주한 것이죠. 그러면 언론의 선입견이? 윤양중 -정부에서도 그때 이 박사가 그렇게 가주기를 바랬고, 원했고, 또 현실화 됐는데 안 했으면 참 골칫거리라고. 잡아넣을 수도 없고, 구속할 수도 없고, 감옥에 넣을 수도 없고...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보였다. 한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동안 필자가 무수히 반복해서 상상해 본 문제를 끄집어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이승만 박사에게 인터뷰 할 때 과연 윤양중 기자는 ‘왜 망명하시는가’란 질문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취재 기자가 결론을 내리기 전, 취재원에게 이유(Why)를 물어보지 않는다면 엄청난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자연과학의 진보를 이뤄낸 동력인 동시에 인문과학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취재기자에게 ‘왜’라는 의문사가 사라져 버리면 기사는 기자의 상상력으로 쓰는 백일장의 문예작품이 되어 버린다. 필자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질문을 했다.

    “차마 그렇게는 못 묻겠더라고요” 

    이동욱 -만약 그때 김포공항에서 선배님께서 인터뷰하시면서 “지금 망명 가시는 겁니까?” 라고 확인하는 질문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윤양중 -가혹하지만 그렇게 질문을 “지금 망명가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얘기죠? 

    이동욱 -예. 

    윤양중 -차마 그렇게는 못 묻겠더라고요.


    휴양을 떠나는 이 박사 부부에게 기자가 “지금 망명가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더라면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떤 표정이 되어 무슨 대답을 했을까? 아마도 펄쩍 뛰지 않았을까? “망명이라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언론계 老선배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어지는 대화는 깊이 없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었다. 여든 넘은 노인에게 가혹한 심리적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닌가 해서 마음을 풀어주는 수다 비슷한 말들을 이어가다 인터뷰를 끝맺었다. 

    유리빌딩인 동아일보사 밖으로 나섰을 때는 차량의 불빛들이 광화문 네거리의 어둠을 어지럽게 가르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내뿜는 연기가 봄 밤 속으로 흩어져 갔다. 소복 입은 여인의 살풀이 춤사위처럼... 90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살았던 우남에게 과연 하느님은 저토록 냉담하게 계셔야만 했을까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맺
    는 말 

    《경향신문》의 <이승만 부처 돌연 망명>이란 오보 기사 한 건은 순식간에 역사가 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단일 사건에 대해 4면 중 3면 전체를 할애해 보도했다. 그러자 모든 언론들이 망명을 기정사실화 했다. 신문으로 세상을 보던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망명”했다고 믿으며 분노하고 탄식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을 간절히 열망하다 4년 3개월 뒤 숨을 거둔다. 그리고 사건 발생 56년이 지난 2016년에 와서야 그의 망명은 사실이 아니며 오보였음을 필자의 글을 통해 밝히는 셈이 됐다. 

    당시 이 사건은 한국 언론사 전체에 파장을 미쳤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의 1961년 4·19 직후 등록된 정기간행물들은 일간지 83개, 주간지 377개, 월간지 88개와 기타 각종 통신사 등 총 885개나 되었다. 이들 모두가 경향신문 기사만을 믿고 ‘이승만 망명’을 보도했다. 누구도 하와이로 출국한 이승만을 더 이상 취재하지 않았다. 

    ‘망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고 확인취재한 언론사도 없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전임 대통령에 대한 취재 경쟁을 포기하는 대신 책상에 앉아 후속 기사의 경쟁에 몰입했다. 백일장처럼 기자들의 글 장난이 시작됐다. 며칠 안 되어 프란체스카 여사가 미국에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했다는 주장도 가감 없이 기사화되었고, 각종 실정과 함께 김 구 암살범, 조봉암 암살범이란 기사도 뒤따랐다. 전 국민이 믿는 도리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유수한 언론사들은 이 사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당시 존재했던 모든 언론사들이 망명 오보(誤報)의 원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월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덕분에 <이승만 망명> 이라는 ‘오보가 역사로’ 남게 됐고 오늘날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망명객’으로, 국민 대다수는 ‘거짓을 역사로’ 믿고 산다. 

    독재 권력만이 거짓말을 국민에게 세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추구를 포기한 언론집단도 국민에게 거짓말을 세뇌시킬 수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도 진실추구를 포기한 언론들로 인해 국민들은 온갖 선동에 휩쓸리는 중인 것처럼. 거짓과 역사, 자유와 진실 그리고 하느님은 과연 어떤 함수관계일까. 

    오보와 거짓의 역사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건국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의 기록을 마다한 채 국사 교과서 발행주체의 논쟁만 계속한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수준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지게 되는 것일까.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신은 빈곤 그 자체이다. 이런 시대에 지식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과연 대한민국의 지식계급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소명이나 알고 있는 것일까. 

    이승만 망명에서 세월호 사고에 박주신 사건까지 어느 것 하나 진영논리에서 자유롭게 진실을 찾아 매듭지어진 사례가 없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어 버리는 역할은 모두 당대의 지식인 그룹인 언론인들이 해 낸 ‘위대한 성과’ 였다. 이런 지식인 패거리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같은 지성인이 설 자리를 잃었다. 암기된 지식으로 무장한 청맹과니 지식인들이 설쳐대는 공간엔 우남과 같은 지성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들이 자체 방송채널까지 갖고 국민 앞에서 갑질을 해댄다. 종편 채널이 없는 경우는 자체 블로그나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갑질을 해댄다. 

    그래서 이 나라는 언론인을 뛰어넘는 지성인은 존재할 수 없는 ‘지성의 암흑기’를 지나는 중이다. 진영논리에 갇힌 언론인들만 지상의 제왕이 된 이 세상에서 포퓰리즘을 한탄해 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 거짓이 진실을 몰아내면 자유도 메말라 죽는다. 국가의 망조(亡兆)가 보이는 것이다.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다수가 거짓을 믿게 됐을 때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국가를 붕괴시키는 최악의 제도가 된다. 우남께서 자유민주주의를 우리에게 주셨지만 거짓민주주의로 변해가는 오늘, 우리는 다시금 종의 멍에를 써야 하는가.

    <2016. 6. 21.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