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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의 고백 "난 이승만의 Rhee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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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8-24 20:48 | 수정 2014-08-25 11:14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에서 내려다본 화진포 모습ⓒ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편집자주>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별장이 있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화진포(花津浦)는 사연이 깊은 곳이다. 

1945년 8월14일 광복(光復)을 하루 앞둔 날, 일본이 항복(降伏)을 선언하기 전날, 소련과 미국은 "서울과 인천 위의 북위 38도선을 한반도에서의 미·소련군 간의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그 북쪽에 위치한 일본군과 식민지 통치기구에 대해서는 소련군이, 그 남쪽에 위치한 일본군과 식민지 통치기구에 대해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기로 한다"는 내용으로 서로 합의했다. 

소련과 미국이 정한 38선에 따라 화진포는 북한의 땅이 됐고 대한민국이 6·25전쟁에서 화진포를 수복하면서 1953년부터 대한민국의 영토로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진포에서 통일을 꿈꿨다. 화진포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 별장을 1954년 새롭게 단장해 휴가지로 이용했다. 

이곳은 지난 2007년 고성군과 육군복지단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화진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과 별장이 있다ⓒ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난 이승만의 Rhee자도 몰랐다"

지난 23일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에 위치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별장'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다녀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과 초대 대통령직을 행하며 대한민국의 한 세기를 이끈 리더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답사 이전 본인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무지했음을 미리 시인한다.

얕은 배움 속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다 4.19 혁명에 의해 햐야한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가 상하이 임시정부나 독립협회 등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 대한민국 건국 이후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등을 시행하며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국방의 힘을 기른 것과 같이 대한민국에 이바지한 모습을 알지 못했다.


▲ 유혜인 인턴기자가 지난 23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찾았다(사진 가운데 메모지를 든 사람)ⓒ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위해 한 일과 그 의미, 한계점까지 밝히는 객관적 역사박물관이었다. 이곳은 이승만 박사의 삶을 시간순서대로 개화, 독립, 건국, 애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다. 

개화관에서는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신문학을 연마하며 개화지식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화만이 열강들의 제국주의에서 속에서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수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해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된 제네바 신문 '라 뜨리뷴 도리안'지에 실린 이승만 박사의 기사ⓒ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대한제국의 개화 실패가 식민지배로 이어진 이후 그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했다.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그의 외교독립론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제네바 신문 ‘라 뜨리뷴 도리안’지의 1933년 2월 21자에서는 그의 외교독립노선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톱기사로 담겼다. 

건국관에서는 대한민국을 수립, 선포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알린다. 신탁통치와 공산주의를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등을 시행하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친 내용이 전시돼 있었다. 또 북한의 남침에 의해 발발된 6.25전쟁 초반 1.4후퇴 때 수도와 시민 곁을 떠난 점은 아쉬운 일이라고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내부 모습ⓒ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애국관은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폐허가 된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미국의 경제 원조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낸 모습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 할 일이 많았던 그는 부정선거의 책임과 4.19혁명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1960년 5월 9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난 이승만 박사는 입국 거부당하며 돌아오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망명'으로 알고 있던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행은 잘못된 정보다. 서거 후 고국에서 가족장이 치러지는데 이를 추도하러온 시민이 10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 하와이에서 서거한 이승만 대통령을 추모하는 국민들ⓒ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대한민국이 자유를 찾고 홀로 서는 과정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많은 먹물이 튀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려던 큰 그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을 오르려는 사람은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선포 성명 중 담긴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애국이라는 큰 뜻을 펼치는 중 생긴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니 평가 절하된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혜인 인턴기자 cuteboy12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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