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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의 거대한 노란색 먼지털이

"노랑 머리 잡귀 머리통들 수직으로 줄줄이 매달려 있는 형상, 기괴하다"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저술가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14-05-31 00:29 | 수정 2015-06-12 14:27



오직 개인만이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다


평소 냉소와 빈정거림으로 주변 사람에게 종종 깊은 상처를 주곤 하는 친구와 밥을 먹었다.
친구가 이렇게 묻고 답했다.


“너,
지구에서 가장 막강한 종족이 어느 종족인 줄 알아?”


“글쎄...유대인이야?”

“아니...유가족이야.”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이름이 엄청난 힘을 휘두르고 있다는 빈정거림이었다.
물론 그의 냉소는 온당하지 못하다.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또한 이미 숨진 망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러나 정당 정치인이 유가족을 사칭하여 한때 유가족 대표를 맡아 극단적 발언을 일삼고,
통진당이 유가족을 위한 자리랍시고 만든 후에 정치 집회로 변질시키고,
유가족의 집회에 이상야릇한 인간들이 등장해서
“잠수함을 출동시켜라! 정권이 퇴진해야 한다!”와 같은 황당한 주장을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사납고 냉소적이기 짝이 없는 내 친구와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될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본질은 슬픔 끝에 만나게 되는 공포다.
못다 핀 어린 학생들이 떼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런데 그 슬픔을 따라가면,
결국 해운사-협회-감시관리부서 사이의 결탁과 선장-선원의 무도덕이라는,
끔직한 공포에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 전체,
인간에 대한 신뢰성 전체를 의심하게 되니까,
공포스러운 것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J. Lennon)이 말했다.

“인간의 본질적 감정은,
사랑과 공포,
두가지 뿐이다.”


나는 말한다.

“세월호가 불러일으키는 본질적 감정은,
끔직한 공포에 이르는 슬픔이다”




물이 그릇에 담기고,
행동이 예(禮, protocol)에 담기듯,
감정은 표현에 담겨야 한다.
아무리 절실한 감정이라도,
표현이 상스러우면 결국 상스러운 감정이 되고 만다.

"내용이 형식을 만든다"는 것은 미신이기 때문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된 미학의 출발점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콘크리트를 규정하는 것은 거푸집이지 않은가?
거푸집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콘크리트의 쓸모와 형상이 정해진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미디어 비평가 맥루한(M. McLuhan)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이다.

“TV냐 라디오냐 책이냐라는 미디어 형식 그 자체야말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 내용물이다.
미디어 형식이 정해지면,
내용이 그에 맞추어 따라 올 수 밖에 없다.”




나는,
노란 리본을 달지도 않았고
추모 분향소에 가지도 않았다.
분향소가 눈에 띄면 일부러 멀리 에둘러 갔다.

왜?

마치 거대한 먼지떨이 모양이 되어 버린,
수직 막대기에 줄줄이 달린 리본들의 형상이 섬찟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너는 미국 컨트리송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도 모르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나를 반긴다면, 집 앞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매어줘!’
뜻이잖아?”


그 노래에서 말하는 노란 리본은,
나무 허리에 큼직하게 매는 단 하나의 리본이다.
그래서 부정관사 [a]가 있다.
나무 가지 여기저기에 매는 수도 있지만,
이때에도 마치 나무에 여러 마리의 새가 앉은 모습으로 매는 것이지,
이곳의 분향소처럼 수직 막대기를 세우고 거대한 먼지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미국 컨트리송이 묘사하고 있는 노란 리본

 

천을 줄줄이 달아매는 것은,
미국 컨트리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낭당 깃발,
그 중에서도 수직 룽타(lungta)에서 나온 형식이다.
이곳 한반도에 오랫동안 뿌리 박아 온 서낭당 문화 코드가 되살아난 것이다.

룽타는 서낭당 깃발의 정식 명칭이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티벳 고대 종교가 남긴 가장 중요한 상징 두 개는,
[룽타3태극]이다.
둘 다 이곳 한반도의 중요한 상징 코드이다.

우리 서낭당 깃발의 원형인 룽타, 티벳 및 히말라야 지방에서는 일상화되어 있다.

 

▲ 고대 티벳의 상징인 다르마(Dharma).
우리의 3태극은 다르마로부터 유래되었다.
어쩌면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三足烏)는 다르마(Dharma)가 변형된 것 아닐까?

 

룽타, 즉 서낭당 깃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의 서낭당 혹은 무당집 앞에서 볼 수 있었다.
빨강-파랑-노랑-하양-녹색의 다섯가지 색깔의 천조각을 사용한다.
8천년 정도되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상징물이다.
티벳에서는 이 중 노랑 깃발에 기도문을 인쇄해서 걸어 놓기도 한다.

룽타 중에서도 수직 막대에 줄줄이 깃발을 달은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수직 룽타이다.
이곳 한반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이 같은 수직 룽타를 세우곤 했다.
그러나 룽타가 반드시 무속의 상징인 것은 아니다.
고대 티벳의 상징들은 이미 불교와 융합되어 불교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룽타의 다섯 색깔은 불교 단청의 색깔에 다름 아니다.

 

티벳의 수직 룽타. 노란색 깃발에는 기도문이 인쇄되어있다.
기도문 중앙의 그림은 천마(天馬)이다.

 

세월호 분양소에 세워진 수직 룽타가 섬찟한 까닭은,
첫째, 노란색 일색이고,
둘째, 네모난 깃발이 아니라 먼지떨이를 만들 때 사용되는 길다란 형상의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룽타에서 출발했지만,
이미 더 이상 룽타라 부를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다.

거꾸로 세워놓은 거대한 노란색 먼지떨이….
게다가 한 개의 막대기에 하나의 뭉치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랑 머리칼의 머리통들이 수직으로 줄줄이 매달려 있는 형상....


종교적 상징 혹은 영혼에 관계된 상징을 사용할 때에는 경건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언어가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시켜주는 동앗줄이라면,
상징은 개인의 영혼을 다른 영혼과 얽히게 만들어 주는 얼개이기 때문이다.

룽타의 깃발이 빨강-파랑-하양-노랑-녹색인 까닭은,
생명과 우주의 순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룽타의 깃발에 천마(天馬)를 새기는 까닭은,
죽음과 파괴의 기운을 빨리 보내고 생명과 성장의 기운을 어서 영접하기 위함이다.
룽타의 천 쪼가리 하나하나가 네모 반듯한 까닭은,
인간 생명 하나하나가 반듯한 영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한답시고 만든 분향소의 노랑 일색의 거대한 먼지떨이들은,
생명과 우주의 순환을 상징하지도 않고
인간 영혼의 개체성을 뜻하지도 않는다.
길죽하고 얇은 쪼가리들은 뭉개져 가닥가닥 해체된 영혼의 부스러기를 상징하고,
노랑 일색은 죽음 한가운데에 발목 잡힌 침체를 상징한다.

그래서 섬찟하다.

영혼과 관계된 상징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마구 훼손해서 끔직한 상징을 만들어내는,
그 무식함과 상스러움이 섬찟하다.
수천년 세월에 걸쳐 이곳 한반도에 뿌리박아 온 룽타,
즉 서낭당 깃발을 이 모양으로 타락시킨 이 무식과 상스러움은, 
수백명 어린 생명들을 선실에 가두어 바다에 가라앉힌 채 오직 제 한 목숨 살겠다고 기어 나온,
세월호 선장-선원들의 무식-상스러움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섬찟한 상스러움의 극치는 서울 시청 앞의 서울광장이다.
수백개의 거대한 먼지떨이가 거꾸로 서 있고,
먼지떨이 막대기 하나하나마다 수천-수만 가닥의 노랑 쪼가리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나는 서울광장의 이 섬찟한 광장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은,
숨지는 순간까지 서로를 챙겨주려 애쓴,
숭고한 어린 넋들은 올 수 없는 공간이지.

오직 구천을 떠도는 잡귀들만 바글바글 모일 수 밖에 없어.
가닥가닥 끊긴 채 덩어리로 뭉쳐져 흐느적 거리는
저 노랑색 천 쪼가리처럼 잡귀들의 덩어리가 흐느적거리고 있구나…

시장 박원순의 눈에는 이 끔직한 광경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그는 서울광장에 왜 이리 많은 잡귀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일까?
잡귀들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것일까?”


노랑머리칼을 산발한 채 대가리만 동동 떠다니는 잡귀들의 머리통들을 줄줄이 꼽아 놓은 형상의,
괴기하고 상스러운 룽타는,
세월호가 촉발시킨 지극한 슬픔과 끔직한 공포를 치유하는 상징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슬픔과 공포를 막연한 것, 눈먼 것으로 악화시키는 상징일 뿐이다.

나는 두 번 절망했다.
하나는,
수천년 조상의 얼이 담긴 서낭당 깃발,
룽타를 이 같은 상스럽고 끔직한 상징으로 훼손-타락시킨 병든 인간들에 대해 절망했고,
또 하나는,
이 같은 상스럽고 끔직한 상징에 대해 입을 처닫고 있는 무속인들-스님들-신부들-목사들에 대해 절망했다.

영혼에 관한 상징을 해독하지 못 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직자가 될 자격이 없다.
성직자는 영혼을 어루만지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상스럽고 끔직한 상징을 해독하고도 침묵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그들은 성직자가 될 자격이 없다.
성직자는 영혼에 관한 상징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징이야말로 성직자의 언어 아닌가?

대한민국에는 종교기관만 번창할 뿐 이미 종교가 없어진 것일까?
그래서 유병언 같은 인종이 종교를 만들고 교주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종교의 자리는 없고 오직 종교기관만 있고,
영혼의 가이드를 위한 연단은 없고,
오직 유병언이나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인종들만 있다.
최소한의 책임감이 들어 앉아 있어야 할 마음은 없고,
오직 오직 개 같은 생존본능만 똬리 틀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곳-그 자리-그 마음의 원래 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공허다.
공허는 공허이지만, 보통 공허가 아니다.
절대적 공허다.
“없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허다.
공허는 원래 “채움/있음”을 향한 맹렬한 진공(眞空, 갈망)이 되어야 함에도,
대한민국을 사로잡고 있는 이 공허는 “채움/있음”조차 거부하는 절대적-악마적 공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한답시고 만들어진 분향소의 노랑머리 잡귀 대가리들은,
바로 이 절대적-악마적 공허를 키득거리며 즐기고 있는 것 아닐까?
잡귀의 양식은,
원래부터 슬픔과 공포에 의해 넋이 빠져버린 마음 자리의 공허 아닌가?


우리는 [건강한 공허]-[건강한 갈망]을 상실한 존재들인가?
[채움과 있음],
[생명과 성장],
[진정한 소통과 상징],
[진정한 의미와 해석]을,
사정없이-게걸스럽게 끌어당기는,
그 맹렬한 진공을 상실한 존재들인가?

이런 존재가 되어 버린 까닭에 진정한 추모와 슬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런 추모와 슬픔을 통해 부활과 생명에 도달해야 할 자리에,
오직 노랑머리 잡귀 대가리들만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럴 리 없다.
우리의 물질적 일상 생활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정치적 제도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시장 속에서 하루 하루 땀 흘려서 번영을 유지하고 있다.
물질의 차원에서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개인의 관점과 이익이 보호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사회-정치의 차원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건강한 제도를 달성해 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의 정신과 영혼이 문제이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실존이 되지 못 했다.
개인 실존의 본질은 [건강한 공허]요 [건강한 갈망]이다.
우리 각자에게 [건강한 공허]-[건강한 갈망]이 자라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해석-상징-소통]을 가려낼 수 있는 입맛(taste)과,
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음을 갖추게 될 것이다.

개인 실존이 무도덕한 까닭은,
보다 깊은 도덕-의미를 원하는 맹렬한 공허와 갈망으로 기존의 도덕을 의심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개인 실존이 무법인 까닭은,
보다 엄정한 법률-의미를 원하는 맹렬한 공허와 갈망으로 기존의 법률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다.
개인 실존이 냉소적인 까닭은,
보다 진실된 의미-상징-해석을 원하는 공허와 갈망으로 기존의 의미-상징-해석을 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귀에는 세월호에서 숨진 어린 넋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너, 우리 때문에 슬프다고?
웃기지 마!

너의 태평한 일상 뒤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태로움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까발려졌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거겠지.

슬픈 척 하고 노랑머리 잡귀 대가리에,
노랑 머리카락 하나 더 붙들어 매면 그 공포가 사라질까?

개소리 마!

니 공포는 정치 선동꾼들의 밥이 될 뿐이야.
그놈들은 진짜 악마 같은 놈들이거든.
남의 슬픔과 공포를 증폭시켜 거기에 빨대를 박는 놈들이지.

그게 악마 아니야?
악마의 양식은 인간의 가없는 슬픔과 끔직한 공포인 것 아니야?

네가 만약 우리를 위해 정말로 울어 주고 싶다면,
먼저 개인이 돼! 영혼이 돼!

오직 개인만이 영혼이 될 수 있잖아?

오직 영혼만이
우리, 저승으로 넘어 간 영혼에게 감정과 뜻을 전할 수 있잖아?”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bangmo77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보도문

본 언론사는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보도에 대하여 다음의 통합 정정 및 반론보도를 게재합니다.

1. 구원파가 오대양사건과 관련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1987년과 1989년 그리고 1991년 검경의 3차례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 및 유병언 전 회장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2.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의 유병언 전 회장 지위 관련 보도에 대하여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 유족 측은 "유병언 전 회장은 교주도 총수도 아니며, 유병언 전 회장은 1970년대 극동방송국 선교사들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은 있으나, 목회 활동을 한 사실은 없으며, 기독교복음침례회는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목사가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3.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의 5공화국 유착설 보도에 대하여

유병언 전 회장과 기독교복음침례회는, 5공화국 및 전두환 전 대통령, 전경환씨 등과 유착관계가 없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4. 유병언 전 회장의 50억 골프채 로비설 보도에 대하여

유병언 전 회장이 사돈을 동원하여 50억 상당의 골프채로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했다는 보도와 관련해, 지난 10월 검찰은 "해당 로비설은 사실이 아니고 세모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회생했다"고 확인해 줬습니다.

5. 유병언 전 회장의 개인 신상 관련 보도에 대하여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 유족 측은, "유 전 회장이 해외 망명이나 밀항을 시도했다는 보도는 사실무근"이며, "유 전 회장은 세월호 실소유주가 아니며 2,400억 재산의 상당부분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영농조합 소유"라고 밝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언론사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법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사건을 여론재판으로 끌어간 세월호 사고 관련 보도 행태를 돌아보고, 법치주의 국가로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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