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대협 간부들의 金日成 충성맹세 자료들

    從北의 뿌리(2)

    金成昱   /한국자유연합 대표, 리버티헤럴드 대표

  •   從北세력은 80년대 대학가에 소위 김일성 주체사상파(이하 主思派)가 나오면서 양적으로 팽창한다. 주체사상은 극소수 학생이 추종한 이념이 아니다. 
      
      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지도부는 이들 主思派가 장악했다. ‘反帝청년동맹’ 등 主思派 조직에서 활동하다 전향했던 洪晋杓(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2004년 10월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主思派는 1980년대 중반 이후 全大協,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金日成 原典을 읽으며 북한 주도 통일 실현을 목표로 활동했다.
    主思派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金正日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金日成과 金正日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386운동권의 主思派 추종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 당시 가장 큰 인맥으로 불리었던 ‘전국대학생총연합회(全大協)’ 역시 主思派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87년 결성된 대학생 조직인 全大協은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對南노선을 주장했다. 全大協의 실제 모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가안전기획부의 全大協 수사결과를 담고 있는 ‘主思派에 장악된 全大協의 실체 수사결과’, ‘全大協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 ‘全大協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全大協의 조직실체’ 등 복수의 공안문건들은 主思派 지하조직의 全大協 장악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全大協이 1987년과 1988년 ‘전국사상투쟁위원회(전사투위)’와 ‘反美청년회’의 배후조종을 받은 데 이어 1989~1990년에는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의 배후조종을 받아왔고, 1991년 이후에는 ‘반제청년동맹’, ‘조통그룹’ 등 主思派지하조직에 장악됐었다”며
    “全大協은 항상 金日成과 한민전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적고 있다. 
      
      <“金日成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이들 기록은 全大協 내부에서 金日成에 대한 충성의식도 행해졌다고 적고 있다.
     예컨대 한OO라는 全大協 조통위 위원장의 자술서 등에 따르면,
     
    “1991년 4월 하순 경희대 총학생회실에서 全大協 조통위 정책실장 손OO 주재로 개최된 정책주체전국회의(全大協 정책실원 5명과 全大協 각 地區 조통위 실무자 11명 참석) 후 참석자 전원이 “金日成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金日成 수령님 만세” 삼창 후 회의를 종료”하는 등 全大協 간부들이 회의·집회·시위·MT 후 金日成에 대한 충성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全大協을 장악한 主思派 지하조직 중 하나인 자민통은 1990년 8월 중순 한탄강 소재 민박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에 출마할 한OO 등 88학번 6명과의 MT에서 金日成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들이 당시 “金日成 수령님 만세! 金正日 지도자 동지 만세!”를 부른 후 선언했던 결의문과 맹세문은 아래와 같다. 
      
      “위대한 수령님 金日成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金正日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 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강령 中)...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하겠습니다(규약 中)” 
       
      主思派를 포함한 386좌익 운동권 가운데 자유주의로 전향한 이들은 노무현 정권 당시 이른바 ‘뉴라이트’를 형성했다. 그러나 대부분 재학습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從北세력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