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태워 신의주 출발한 입영열차는 영영 돌아오지 못해그로부터 33년 뒤 그 열차 탄 나는 선과 악의 무서운 여행 시작
  • “... 아버지,
    저를 기다리지 마세요.

    아들은  반역의 길을 떠납니다.

    부디 마음고생 마시고,
    오래오래 살아계십시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세요

    아버지 ...“

     

    주제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나는,
    이 말을 맘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덜커덩,
    하고 기차가 움직였다.

    붕 ~
    하는 무거운 기적소리가 들리고
    기차는 서서히 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 자료사진 ⓒ 뉴포커스
    ▲ 자료사진 ⓒ 뉴포커스

     

    기차 객실 안팎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안에서는 엄마 아빠를 찾는
    앳된 병아리들의 애절한 부르짖음 소리가,

    밖에서는 자식의 손을 차마 놓지 못하고
    점점 빨라지는 차창에 매달려
    연신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눈물범벅 된 엄마 아빠들,

    그들의 슬픈 모습들이 창밖으로 하나 둘, 서서히 멀어져 갔다.

    나는 남들처럼
    아버지와 가족들을 애타게 찾지 않았다.

    그 난리 속에서 나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뚤렁뚤렁 떨구었다.

    2001년 5월 봄의 그날,
    고향의 하늘은 어두운 비구름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등에 짊어진 허줄한 군용배낭,
    그 안에 담긴 것은
    아버지가 급하게 준비해 준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중국산 월병(빵) 한 봉지,
    철이 덜 들었던 나는
    내 인생과 우리 가문의 운명까지도 모두
    그 군용배낭 안에 쑤셔 넣어 버렸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났고
    내가 자란 신의주시를 떠나
    전방으로 남진하는 인민군 입영열차에
    허약하고 초라한 몸을 실었다.

    내 몸에 걸쳐진 거적때기는
    우리 가문의 전통의상인 이른바 [범의 가죽]이었다.
    용맹한 범처럼 자랑스럽기도 했겠지만,
    포악한 범처럼 무섭기도 해서일까,
    공화국 인민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범]이라 칭했고,
    인민군의 거적때기를 [범의 가죽]이라 불렀다.

    기차는 이내 역을 벗어나 신의주시를 관통하고 있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낯익은 도시의 풍경들,
    나는 이제 이 정든 풍경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잠시 쉬고 있는 전쟁터로 가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먼저 쏘지 않으면 먼저 맞아야 하는 그곳,
    강토의 가장 무섭고 아픈 곳으로
    나는 자진해서 가고 있었다.

    나는 곧,
    무서운 철의 분단선을 넘어
    적군(敵軍)에 투항(投降)할 것이다.

    그 전에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아군(我軍)의 총탄에
    내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벌 둥지가 될 수도 있고,
    내가 흔드는 흰 발싸개를 보지 못한 적군의 성급한 誤發에
    분단선을 베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또 재수 없이 어디에 묻혀 있을지 모를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내 몸뚱이가 갈갈이 찢겨져 나갈 수도 있고,
    2000볼트가 넘는 고압 전기 철조망에 붙어
    빠삭히 익은 통구이가 될 수도 있다.

    살아서 투항에 성공할 확률은? 0 % ...

    나는 그런 0%의 가능성에 도전장을 내민
    무모하고 정신 나간 하룻강아지였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0%의 가능성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죽어도,
    여기서 이렇게는 살수 없었다.

    맞다.
    나는 변절자요, 반역자요, 배신자였다.

    나는 나의 뿌리인 공산주의와
    영원한 단절을 결심했다.

    나는 나를 공부시켜준 조선노동당과 수령을
    철저히 변절하려 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이 입혀준 범의 가죽을 쓰고,
    공화국을 반역할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싸준 빵을 먹으며
    아버지를 배신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

    내 속은 변절과 반역과 배신의 심한 멀미로 하여
    구토 직전이었다.

    내가 탄 군용열차는 민간열차들을 앞지르며
    빠르게 南으로,
    남으로 질주했다.

    어둠속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10대의 어린 신병들은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의 무게에 짓눌려
    꼼짝 않고 있었다.

    나 또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납게 울부짖는 견인차의 고동소리,
    무쇠바퀴와 강철레일이 부딪치며
    나는 규칙적이고 둔중한 충격음이
    나의 연약한 심장을 마구 두들겨 팼다.

    캄캄한 암흑이 강산을 삼켰고,
    그 어둠에 튕겨난 나의 모습이 차창에 머물렀다.

    나는 창문 유리에 반사되는 수심에 찬 내 모습을 보며
    33년 전, 18살 소년의 아버지 모습을 그려보았다.

     

    조선반도가 제 2의 6.25를 막 준비 중이던
    1968년 늦은 봄,

    자신도 이 운명의 열차에 있었다던
    어느 옛적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1968년 1월 21일,
    원형인공기마크를 새긴 소련제 MG-21 전투기가
    공화국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미군 정찰기 EC-121을 격추시킨다.

    그로부터 3일 후 인민군 海, 共軍은
    강원도 원산 앞바다 공해 상에서
    군사정보를 수집 중이던 미군첩보함선을 나포한다.

    그 유명한 [미국간첩선 푸해블로호 나포사건]이었다.
     
    조선반도에는
    전쟁직전의 위급상황이 도래(到來)한다.

    미군은 평양 폭격을 준비했고,
    수령 김일성은 全軍에 전투태세를 命한다.

    “報復에는 보복에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수령은 단호했다.

    全國 곳곳의 고등중학교들에서
    17세 이상 청소년들에 대한 대량 징집이 실행되었다.

    ​신의주 자동화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전자전기기술을 배우는 게 꿈 이었던 아버지는
    수령의 전쟁소동에 휘말려 전문학교 1학년 때 인민군에 징집된다.
     
    아버지가 입영열차를 타는 날,
    ​아버지의 누나(나의 고모)와 어머니(나의 친할머니)가
    역으로 배웅을 나왔다고 한다.

    ​누나는 눈물을 훔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잘 다녀오라고 당부하셨다는데,
    어머니의 안색이 별로 슬프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의 전쟁으로 인해
    가족 중에 남자는 모두 죽고
    아낙네와 노인들과 아이들밖에 없었던 터라
    집안 살림은 몹시도 가난했다고,

    그런 시기에 아버지의 軍 징집은
    집안에 밥술을 하나 덜게 되는 것이어서
    집안 살림을 짊어지고 가난에 쪼들리던 아낙네들의 입장에서는
    시원섭섭했었다는 할머니의 말씀 이었다.

    그때 공화국 인민들은
    미국과의 전면전(全面戰)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었다고 한다.

    당이 그렇게 선동했다.

    그 선동으로 全軍, 全民이 일심 단결했다.
    전국의 도시와 마을들에서는 非常대피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반항공(反航空) 등하관제 훈련이 실시되었다.

    미국과의 공중전에 자신이 없었던 노동당은
    두더지 땅굴 전략으로 미국의 공중폭격에 대비했다.

    미 공군에 의해 전 국토가 초토화 됐었던 6.25 전쟁의 그 악몽이
    위대한 수령의 발편잠과 만수무강을 방해했다.

    1968년, 입영열차에 몸을 실은 아버지는
    얼굴도 오르는 18년 전의 할아버지 모습을 상상했었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한 지 3년 후인 1947년,
    20대 청년 할아버지는 당시 신의주의 최고 권력자였던
    조선노동당 신의주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바로 옆에서 보필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고 한다.

    점점 조선노동당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당시
    북반부의 시류에 재빨리 편승해 선참으로 당에 입당한 할아버지는
    다행히 친일파 숙청을 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부귀영화도 잠시, ​
    1949년에 할머니는 아버지를 임신했는데,
    ​다음 해 그만 전쟁이 터지고 말았고,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세상에 나오는 날을 보지 못하고
    인민군에 입대한다.

    전쟁은 북조선의 모든 것과 함께,
    우리 백씨 가문의 부귀영화도 전부 쓸어버렸다.

    1950년 여름,
    할아버지는 신의주에서
    인민군의 입영열차에 몸을 싣고 신의주를 떠났다.

    할아버지는 일제시기 때
    일본인 택시회사에서 배운 운전기술을 인정받아
    수송(輸送)부대를 책임지고
    최전선에 포탄과 탄약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하늘은 이미 공화국과 할아버지의 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수송부대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줄폭탄을 쏟아 붓고
    유유히 사라지는 하늘의 무법자, 미군 폭격기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1952년,
    전선(戰線)은 기존의 38선 즈음에서 교착되어 버렸고,
    뺏고 뺏기는 지루한 소모전으로 해가 지고 날이 밝았다고 한다.

    일선(一線)에서 총알받이로
    개죽음을 당하는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도 불쌍했지만
    그들에게 총포탄을 날라주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수송부대 병사들도
    하늘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 폭격기들의 성화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해 여름,
    인민군의 후방 보급로 원천차단을 목적으로 날아든
    미 공군 전폭기들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황해도 전선에서 暴死한다.

    인민군의 포탄수송은 주로
    미 공군의 공습(空襲)을 피해 주간(晝間)이 아닌
    야간(夜間)에 진행되었는데,
    그날에는 야간에도 공습이 있었다고 한다.

    서부전선에 대한 대대적인 포탄 수송이 있을 거라는
    인민군총사령부의 비밀이 미군 측에 새어나갔고
    할아버지의 수송부대는 미 공군의 기습 폭격에
    대책 없이 당했다고 한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날아든
    수백 대의 미군 전폭기들이 하늘을 뒤덮었고,
    비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폭탄들은
    도망치는 병사들까지 모조리 찢어버렸다.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흐른 뒤,
    쌍지팡이를 한 퇴역군인 한명이
    연장 없는 허줄한 군복차림으로
    신의주에 있는 아버지 집을 찾아왔는데,
    그의 손에 들린것은 것은 할아버지의 사망통지서였다고,
    그는 자신을 전쟁당시 할아버지의 조수(助手)라고 소개했다 한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10년 후에야 유가족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그 때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못한 할머니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재가를 한 상태여서
    할아버지의 죽음이 더욱 더 비참했다는 아버지 말씀이었다.

    그 후 재가한 남편도 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할머니는 전쟁 과부의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늘에서 폭탄이 마구 쏟아질 때
    조수는 대피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할아버지는 만취상태였고,
    빨리 대피하라는 조수의 요구에
    내 차는 괜찮을 거라며 조수의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2년 동안의 처절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살육의 악몽을 잊기 위해 독한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만 술중독이 왔다고 한다.

    마지막 미군 폭격기 편대가 사라지고
    여지없이 짓이겨진 수송대 차량들 속에서
    할아버지 차량은 기관실이 날아가 있었다고 한다.

    조수가 차문을 열자 할아버지는
    “야 나 맞았어.”라고 한마디 남기고 바로 실신했다고,

    야간이라 어두워서 불을 비춰 자세히 보니
    솥뚜껑만한 폭탄 파편이 피범벅이 된 의자 밑에 박혀 있고,
    뭉청 잘려나간 할아버지의 두 다리가
    차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몇 분후에 할아버지는 과다 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1950년 여름,
    20대 청년 할아버지를 태우고 신의주를 출발한 그 입영열차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18년이 흐른 1968년 늦봄,
    신의주를 출발하여 남하하고 있던 그 입영열차 안에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만날 준비를 하고 계셨을 지도 모른다.

    33년이 흐른 2001년 늦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몸을 실었던
    그 불행한 운명의 입영열차를 타고
    나는 돌아갈 수 없는,
    선과 악의 길고 무서운 여행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8년,
    나는 비로소 적진(敵陣)으로의 투항(投降)에 성공한다.

    0%의 무모한 도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것도 장장 8년 만에 말이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나는 폭력과 살육과 공포의 악령들이 이글거리는
    신의주의 그 열차,
    공화국의 입영열차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질게 발악했다.

    벚꽃이 만발하고,
    하늘이 화창한 이 봄날,

    이미 내 조국이 되어버린 적진(敵陣),
    이곳 남쪽의 고요한 평화는 왠지 불안하다.
    밤마다 이 땅에 어둠이 내리면,
    내 귀에는 생생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13년 전의 신의주 입영열차,
    그 무쇠바퀴의 공포스러운 진동소리와 섬뜩한 경적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히 들려온다.

    절대로 악몽이 아니다.

    내 고향땅 신의주 기차역에서,
    그리고,
    평양에서,
    청진에서,
    원산에서,
    해주에서,
    혜산에서,
    강계에서,
    사리원에서,
    개성에서

    이 따스한 봄에도 어김없이
    수십만의 소년병들을 실은 인민군의 입영열차가
    무섭게 남진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60년 전에 묻힌 할아버지의 유골 위에서
    또다시 동족을 향한 피의 살육전을 예고할 것이다.

    그 저주의 소리, 입영열차의 소름끼치는 경적소리가 들린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반도 땅의 남과 북,
    결국 나는 아직도 입영열차 안에 있다.

     

  • ▲ 탈북자 백요셉 ⓒ 백요셉
    ▲ 탈북자 백요셉 ⓒ 백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