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근일 칼럼]
     지금 이 싸움,
    [문화]전쟁에서 결판난다
     
     
  • 똑같은 통진당 대리투표 사건인데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무죄를 선고했고
    광주지방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법관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그런 상식을 넘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극심한 정체성의 분열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 사례는
    보다 전반적인 문화전쟁이
    사법부에까지 미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에서도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들에 대한
세속적 진보주의자(secular progressives)들의 문화전쟁은
미디어-역사·사회 교과서-문화이론 쪽의 말싸움으로 시작해
"월가를 점거하라" 같은 거리 싸움을 거쳐
끝내는 법정 싸움으로 가곤 했다.
법의 축복을 받는 쪽이
최종 승자가 되는 까닭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에 있었던
본 워커(Voughn Walker) 연방 대법원 판사의 게이(동성애자) 결혼 손들어주기였다.
그는
[결혼=남녀 결합]이라는 통념을 제치고
동성(同性) 간의 결혼을 금지한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는
아서 슐레진저 2세가 1947년에 쓴
[사법 운동](judiciary activism)이란 말을 둘러싸고
새삼 열띤 논쟁이 일어났다.

[사법 운동]이란,
판사가 판결할 때
자신의 개인적-주관적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을 의미했다.
오랜 기간 널리 통해 온 기준,
누구나 다 당연하게 생각해 온 기준을 깨고
"내가 바로 기준이다"라고 하는 식이다.
판사가 법을 적용하기보다는, 스스로 법을 만드는 격이다.

그래서 판사가
자신의 취향을
법보다,
법을 만드는 주체보다,
그 주체를 만드는 투표보다
더 높게 치는 식이다.

미국의 전통주의 시사평론가들은
본 워커의 [사법 운동]을 진보주의자들의 전반적인 문화전쟁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워싱턴 타임스>의 데니스 프레이저 같은 사람은
이렇게까지 극언했다.

"미국에서는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군대가 필요 없다. 
미국에는
그것을 할 좌익 판사들이 있다."


본 워커 같은 유형을
딱히 재래식 [좌익]으로 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보다는,
그가
판결에 다분히 주관적인 신념을 풀어 넣었다는
논란일 것이다.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의 문화전쟁에 대한
미국 전통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은
자신들이 승승장구하던 부시 행정부 때부터
이미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공화당 지도급 폴 웨이리치는
1999년,
잡지에 기고한 그의 공개 서신을 통해 이렇게 경고하고 나섰다.

"보수는
문화전쟁에선 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보수는
1994년에 정권을 되찾고 자기 후보들을 의회로 보내긴 했지만,

그런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어젠다를 채택시키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그는,
자신들의 정치가
미국 문화 환경의 [시궁창 같은] 탁류 앞에서
무력했다는 말로 설명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뉴욕과 워싱턴 밖에서는 중도우파가 다수다.
진보주의자들은 하고 싶은 대로 떠들어라.
그럴수록 그들은 선거 때마다 질 것이다"
라고
느긋해 했지만,
이제는 그런 좋았던 옛날은
더 이상 없다는 게
시사평론가 매트 루이스의 말이기도 하다.

1980~1990~2000년대를 통해
공화당은
선거에선 어찌어찌 산술적인 재미를 봤지만,
미국 사회는
갈수록 더 거칠어지고 [제멋대로]가 되고
사회적 진보주의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주의들이
투표에서 이기는 동안
젊은이들은
그들보다는 오히려
섹스-마약-폭력이란 흥분제를 타서 파는
할리우드 리버럴들의 영화를
더 [선생]으로 쳤다는 것이다.

단순화의 흠은 있지만
어쨌든 기성 정치가
막장 진보 문화의 쓰나미에 익사했다는
설명일 것이다.

이런 미국 이야기를
한국 현실에 그대로 투영시켜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주류(主流) 문화랄 게 없는 공간으로
진보라기보다는
[진보]임을 자임하는 거친 문화 코드가
월 스트리트 점거하듯
치고 들어온 것은
다를 게 없다.

이 [마구 해대는] 풍조는
지난 대선(大選)에서 잃은 것을
광장에서,
문화 전선에서,
교육 현장에서,
거대 포털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법부에서
얻으려고 하는
난폭한 노이즈(noise) 마케팅의 하나다.

그렇다면 이 시대 싸움은,
결국
정치판보다는
문화판에서 결판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키려는 사람들]은
과연 지켜야 할 가치,
지킬 만한 가치를
문화의 매력으로 포장해서 세일할
창의성이 있는가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체제 공방(攻防)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른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조선일보 2013.10.28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