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석 연재칼럼 ②> 으랏찻차 박정희! 유신40년을 유신하라!
유신의 진실 100억$짜리 '1.31 중화학 선언'
남의 말 하듯 '자기역사' 버리는 인간들! 박근혜는 따라하면 안된다!
-
- ▲ 조우석 문화평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5·16, 유신은 헌법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문제의 발언(9월 24일)을 한 뒤 표면적으로는 전에 없는 칭찬과 덕담의 릴레이가 펼쳐졌다. “상당수 국민 가슴에 와 닿는 발언”이라고 다음 날짜 조선일보 사설이 박수를 보냈고, “내리막길을 걷는 지지도가 멈추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보도도 줄을 이었다.
그 직전 문재인, 안철수도 “용기있는 발언”이라며 과거사에 머리 숙인 박근혜를 치켜세우는 장면도 있었다.
어색하고 낯선 풍경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코미디언 비슷한 소설가 이외수도 강원도의 자기 집을 찾아온 박근혜에게 “큰일을 하셨다”고 덕담을 했다. 박근혜도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인데, 실로 어리둥절하다. 거품일 수도 있는 지지율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억지 발언의 생쇼를 연출하는 건 내가 아는 큰 정치에서 크게 멀다.
의문은 여전하다. 이런 게 사회통합을 위한 광폭정치 행보일까? 무엇보다 성난 얼굴로 과거사를 보는데 너무도 익숙한 한국적 상황을 왜 정치권과 학계는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있는가?
박근혜는 왜 성난 한국사회를 정면돌파하지 못하나?
안타까운 점은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선거의 여왕' 박근혜는 힘도 한 번 못 써본 채 역사 무대에서 퇴장 당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의 복기(復碁), 즉 5·16과 유신을 짚어보자.
“5·16과 유신 따위”를 비판하는 게 균형 잡히고 진보적 지식인다운 것으로 통하는 우리의 잘못된 상식과 뒤틀린 균형감각에 감히 도전해보자.기억하시는지? 박근혜의 발언 이틀 전 고려대 석좌교수로 있다는 대법원장 출신의 이용훈은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아니 헌법학을 처음 배운 학부생처럼 이렇게 발언했다.
“유신헌법은 헌법의 이름으로 일당독재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이후 2010년 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1호 대해 만장일치로 위헌 판결을 한 것은 사법부의 원죄를 씻는 것이었다.”
이용훈의 발언은 좌파적 프레임 속의 현대사 인식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재정리하자면 이렇다.
‘몹쓸 5·16’은 군사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어지럽혔던 불행한 사태이다. 유신은 또 한 번의 영구집권체제이자, 무한권력 분위기에서 만들어낸 ‘악의 꽃’이었다. 그걸 주도한 ‘불행한 군인’ 박정희는 산업화에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독재자의 전형일 뿐이다. 때문에 낡은 세력을 대표하는 박근혜는 정말 나쁜 ‘유신 공주’이자 독재자의 딸이다 등등등….
엔간한 대학생도 그런 인식에 물들어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정반대의 진실을 말하려 한다.
꼭 40년 전 이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유신의 진실은 무엇일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 형식으로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헌법개정안의 공고 및 국민투표 실시 등의 메가톤급 선언을 했다. 유신 헌법 선포 이후 박정희가 서거할 때까지 유신체제, 유신공화국이 꼭 7년 간 펼쳐졌는데, 놀랍게도 누구도 이 정치변화 빛과 그늘을 포함한 ‘전체의 진실’에 대해 입을 떼지 않는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으로 박정희를 보필했던 김성진, 보다 핵심세력의 한 명이던 비서실장 김정렴, 권력의 뼈에 해당했던 이후락과 김종필까지도 그러하다.
‘박정희의 고뇌’는 있다면 ‘유신의 고뇌’도 나왔어야
공식발언 내지 저술로 유신체제의 정당성, 그 체제 출범 전후 대통령의 고뇌를 추적한 책은 없거나 극히 드물다. 있다면 1980년 서울의 봄 직후 김종필이 ‘유신 본당’을 자처했으나, 말장난 응수에 불과하다.이러 저런 기록을 남긴 김성진, 김정렴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모셨던 주군 박정희의 충정과 뜻을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유신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식이다.
이런 엉거추춤 화법에서 유신 선포와 뒤이은 중화학공업이 한반도 현대사의 놀라운 도약을 주도했음을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박정희의 고뇌를 말하는 이는 일부 있어도, 왜 유신의 고뇌를 말하는 이는 없는 겁니까?"
내가 아는 한 대선배 언론인은 그렇게 말했다.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 분도 당시 개인적 고초를 겪었던 걸로 안다.
하지만 역사의 시야가 확보된 지금은 유신 선포 전후 한국현대사의 큰 수레바퀴가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돌았고, 그게 지금 우리 삶의 토대가 되었음을 그 분도, 나도 기꺼이 인정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모두 위선의 나라인 셈이다. 유신으로 얻은 열매를 즐기면서, 겉으로는 욕을 하는 두 얼굴의 태도 때문이다.
그건 '역사의 무임승차'라고 나는 규정한다.그 뿌리는 깊다.
일테면 <박정희를 말한다>(삶과꿈, 2006년)을 펴낸 김성진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박정희로부터 대통령 특별담화문 초안을 건네받은 것이 발표일 몇 개월 전이었다. 문안은 초록색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박정희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담화문 초안을 그에게 건네주면서 이 말만 남겼다.
“갖고 가서 잘 읽어보시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두시오.”
돌아와 문장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야당의 반응을 추측해 보았다. ‘민주주의 말살’이니 ‘영구집권 기도’니 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가만 있자. 이것이 정말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남쪽 땅으로 피란을 내려왔단 말인가’ 하는 회의감에 빠져 있는 내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처럼 내 경우를 미루어 보더라도 유신은 분명 정치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일반 시민들에게 별 이해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얼마나 큰 충격이었으랴.”(150쪽)
이미 고인이 된 김성진 증언을 읽으며 나는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유신이라는 게 너무도 돌연하고 거대한 변화라서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모신 사람까지도 진면목을 파악하기 힘들구나 하는 점, 40년 뒤인 지금이라면 또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김성진이 그렇게 엉거주춤한 채로 남의 말하듯 회고한다는 것은 지금도 내게 의문이다. 최고지도자와 한 몸이 되어 돌아가야 하고, 정치적 판단에서 한치의 틈도 없어야 할 스태프가 겨우 이 정도이다. 그는 박정희 사후 4반세기가 넘은 시점인 2006년 당시 책을 펴내면서 여전히 남의 말하듯 했던 것이다.
사실 김성진과 다른 관료들은 1980년대 내내 박정희 격하운동이 한창일 때도 복지부동 내지 관망세였다.
그렇다면 이제 거꾸로 분명해지는 게 있다. 유신 선포란 당시 박정희에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선택이었는지, 그 무거운 결행을 거의 혼자서 결단했다는 가늠이다.유신체제를 7년 간 버티며, 국내외 상황을 조율해야 한 것도 온전히 최고통치자의 몫이었다. 스태프들이 받쳐주지 않은 채 박정희 혼자 감당해야 했다. 김재규가 “나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10·26을 저지르기 직전까지 박정희의 절절함을 공감해준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단군 이래 최대 투자가 이뤄진 그날 1·31회의
오히려 당시 말년의 박정희가 개인적으로 총기가 흐려졌느니, 그래서 용인술에도 허점을 드러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는 믿지 못할 보고가 일부 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이란 말인가?
박정희, 그의 내몰린 외로움과 쓸쓸함의 내면풍경, 그걸 꽉 잡아주는 천근만근 역사철학적 신념의 무게를 요즘의 나는 조금 알 것도 같다. 10월 유신 선포 때 당시의 결행을 후세 역사가의 평가에 맡긴다는 비장한 발언만은 아니다. 실로 귀한 기록이 하나 남아있기 때문이다.단군 이래 최대의 투자,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결단을 했던 박정희의 진면목 하나를 오원철은 훗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서 매우 물기어린 톤으로 꼼꼼하게 스케치했다.
-
- ▲ 1973년 청와대 경제2수석 비서관 오원철씨가 '박정희 중화학공업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자료사진)
“박 대통령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이때의 그는 몹시 고독해보였다. 쓸쓸해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지켜본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큰 역사적 현장에는, 격한 감정이 굉음을 내면서 서로 부딪치는 것이 예사다. 그런데 이날의 역사적 현장에는 적막이 감돌고, 그 가운데 고독한 박정희 대통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날은 유신 선포 3개 월 뒤인 1973년 1월의 역사적인 1·31회의에서의 박정희 스케치이다.장소는 청와대 지하의 국산병기 진열실, 장장 4시간 회의에서 역사적인 중화학공업화 구상을 확정했다.
박정희는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 구성을 지시했지만, 한국을 바꿔놓은 1·31회의는 중지를 모으고 의견을 합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기 확신이 선명했다. 이미 3개월 전 문단속을 해두지 않았던가. 그게 유신이다. 그렇다면 이 토대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날 발제된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중화학공업 발전안과 방위산업 육성안’.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의 브리핑이 핵심인데, 한마디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결합시켜 수출 100억 달러를 이룩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뒤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지만,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이르자 중화학공업으로 궤도 수정을 했다. 1957년도의 일이다. 이후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수출을 주도하면서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에 성공했다.
우리도 못할 게 없다는 구상이었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당시 대화 내용을 우리는 안다.
“오 수석, (중화학공업)에 돈은 얼마나 들지?”“내·외자 합쳐 약 100억 달러입니다.”
회의장 분위기가 출렁였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당시 남덕우 재무장관도 너무 큰 액수에 크게 놀랐고, 할 말을 잊었다.
나머지도 허둥댈 때 약간 뜸을 들인 대통령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크게 결심한 표정인데, 나는 그게 유신의 속마음, 그동안 가타부타 말도 많은 유신을 둘러싼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라고 본다.
당시 박정희는 마치 혼잣말처럼 높지 않은 톤, 그러나 무게가 크게 실려 있었다.
-
박정희 유신의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저네들은 태평양전쟁 때 패전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박정희 국가개조의 꿈, 국민들의 시야보다 몇 걸음 앞서가던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표적 발언이다. 국민 협조를 기대하겠지만, 설사 따라주지 않더라도 자기 의지로 밀어붙이겠다는 선언이다.
그걸 요즘 말로는 소통 부재라고 할 지 모르겠으나, 한국역사가 빅뱅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나는 오늘 밝힌다. 현대한국의 국운을 가른 것은 유신선포와 1·31회의이라고, 그리고 그게 바로 유신의 실체라고….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한반도 전체와 동북아질서를 염두에 두자.
당시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동북아질서가 온통 바뀌는 급박한 와중이었다. 우리도 유신체제로 대응했지만, 이북 역시 주석제(主席制)로 전환했다. 동남아에서 베트남은 월맹 주도로 통일돼 오늘의 저발전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있다. 모두 1960년대 후반 이후 벌어진 국제 현대사의 구조적 상황이었다. 당시 최고지도자는 그런 상황에서 실로 역사적 선택을 했다.
국민기본권 제한을 포함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잠시 유보하겠다, 그러나 "한 단계 높은 산업혁명을 이루는 단호한 정책 입안"(한국학자 제임스 팔레의 말)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게 유신이다.
지금 상황에서도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역사적 실체는 박정희와 유신이 갖는 정당성이다. 새삼 분명한 것은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5·16, 유신은 헌법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문제의 발언(9월 24일)이야말로 역사적 진실과 무관한 진술이라는 점이다.다음 회에 그 점이 더욱 분명해리라 믿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