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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박근혜 후보가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양호상 기자
박근혜 후보의 대권 도전은 지난 2002년, 2007년에 이어 세번째다.그는 46세가 되던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홀연히 등장했다.
2000년에는 총재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나라당을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2002년 대선 독자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대권 의지를 표면화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회창 전 총재를 위협할 높은 지지율을 얻었지만 ‘보수 단일화’ 요구로 결국 한나라당에 복당, 이회창 전 총재를 지원했다.
두 번째 대선의 꿈은 2007년이었다.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정면에서 맞붙은 박근혜 후보는 결국 분루를 삼키고 말았다.
2007년 경선 패배 이후 박근혜 후보는 ‘경제-복지-안보’ 등 대권수업에 올인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이 때부터 박근혜 후보는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정권을 잡겠다는 ‘권력의지’가 크게 강화된 것이 박근혜 후보의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면으로 꼽힌다.
경제정책 기조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에서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급격히 이동했다.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경제민주화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을 중용하며 경제정책 기조 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경선 캠프 구성도 예전과는 달랐다. 박근혜 후보는 현역 의원을 최대한 줄인 채 실무진 중심으로 캠프를 꾸렸다.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와의 ‘세(勢) 불리기’ 경쟁이 과열되면서 참여 의사를 밝힌 현역 의원들을 대거 기용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과는 상반됐다.
다만 박근혜 후보의 가장 큰 특징이자 상징으로 꼽히는 ‘신뢰’와 ‘일관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박근혜 후보는 18대 새누리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 박근혜 후보는 전체 유효투표의 84%인 8만6,589표를 얻었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8.7%인 8,955표를 얻어 2위를 차지했으며 김태호 의원(3.2%·3,298표),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2.6%·2,676표), 안상수 전 인천시장(1.6%·1,600표)이 뒤를 이었다.
박근혜 후보는 앞으로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 ‘안철수-문재인’이라는 벽을 넘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