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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전 북한의 남침의 포성은 멎었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남한에서는 아직도 총성없는 전쟁이 살벌하게 진행되고 있다. 평양것(北)들을 좋아하는 세력과 싫어하는 세력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매일 총성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평양것(북)들을 좋아하는 세력들은 62년 전 6·25 전쟁의 남침도 부인하고 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선언으로 말미암아 38선으로 허리가 갈라지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또 다른 전쟁의 암흑이 몰려오고 있었다.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북쪽은 소련이 점령하였고,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우리 민족의 바램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북쪽은 소련의 정치체제인 사회주의 공산당 정치를 하게 되었고,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인 미국을 따르게 되었다. 공산당 쪽을 지지하는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 쪽으로 갈라져서 심각한 좌우대립과 이념적 갈등으로 남쪽은 연일 광복을 기쁨을 누릴 날이 없이 치열하게 이념갈등이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강한 자유민주주의 신봉과 공산주의 배척으로 남한에는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 때 정국이 혹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정국과 흡사하다고들 한다.
심각한 이념갈등 속에 겨우 첫 걸음마를 뗀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연일 이념갈등을 치유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그 때에 북쪽은 김일성을 내세워서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사천리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많은 애국지사들을 숙청하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고서 호시탐탐 겨우 정부수립을 하고 첫걸음마를 떼는 그 시기에 미군 이 철수를 하게 된다. 미군의 주둔으로 인하여 북쪽 김일성이가 남침을 쉽게 못하던 차에 앓던 이같은 미군이 철수한 것을 기회로 여기고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에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의 공세로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 김일성은 자기 동죽을 죽이는 일에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도 없이 무자비하게 소련에서 지원해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침범하여 남침을 하였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도 하지 못한 우리는 4일 만에 허무하게 서울을 내주고, 3개월 만에 대구 부산 지역인 낙동강 전선만 남겨두고서 전지역을 북한에 점령당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노력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되어 미군을 중심으로 국제연합군인 유엔군이 창설되었고 국제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6·25 전쟁은 국제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날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하고, 동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서 동년10월 13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동년 10월 26일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우리 국군이 진격하였다.
압록강 근처까지 도달한 우리 국군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짖으며 한반도 통일이 코 앞으로 도달했다며 기뻐할 그 때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동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인해 전술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전세가 역전되어 오산 부근까지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1950년 3월 24일 38선을 다시 넘어서 동년 6월 11일날 철원·금화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진일퇴를 주고받으면서 격렬하게 전투를 하며 부지기수의 사상자를 배출하는 가운데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 중국 남부지방에 제2 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하다가 동년 4월11일날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었다.
38선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로 사상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하였다. 그리고 동년 6월 23일 소련이 휴전을 제의하여 동년 7월 10일날 휴전회담 개시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보다 북진을 하여 통일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해 지금까지 휴전상태로 38선 대신 휴전선이 그어지게 된 것이다.
여러 차례의 휴전회담을 갖고서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를 하고 동년 12월 18일날 포로명단 교환하고, 1953년 4월 20~26일 부상병 포로 교환, 동년 6월 8일 포로송환문제 타결, 동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전격적으로 석방, 동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지금까지 휴전선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때 연합군이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북진을 계속해서 한반도를 통일시키지 못한 점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때 휴전협정으로 한반도의 분단화는 고착화 되어 가고 있다는것이다.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 된 3년 1개월간 전쟁으로 인명피해는 민간인 포함 약 450만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 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북한은 민간인 100만 명 포함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남한의 산업시설 42%와 주택 33%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당한 것으로 끝까지 북진을 하여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62년간 남북한 분단의 고착화가 되었으며 그동안 북한의 무장간첩 침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으로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중임을 실감하고 산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당한 남한에서 6·25가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 30% 정도라니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는 학생이 50%가 넘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인 학생들이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모르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는 정확하게 가르쳐야 할 것 이 아닌가?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가 남침인지 북침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6·25 전쟁 발발 62년이 되었다. 공당의 대표까지 지낸 자의 입에서 북침인지 남침인지 더 생각을 해서 말하겠다고 했다. 포성이 멎은 휴전상태로 59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남남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62전 새벽 4시에 남침이 시작되어서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총성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더군다나 혹자들은 말한다. 지금의 정국이 광복절부터 6·25 남침 이전의 정국과 아주 흡사하다고 말한다.
남한 내에서 이념갈등이 아주 심각하다. 우리의 주적인 평양것(北)들을 좋아하는 세력이 각계각층에 포진되어 있다. 간첩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의 진실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전교조의 역사 왜곡 가르치기를 끊어내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이다.
또한 평양것(北)들을 좋아하고 동조하는 세력들은 철저하게 임명직이나 선출직에 진출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시켜야 한다. 국민들도 6·25 남침을 부정하는 정당이나 인물에게는 표를 주면 안 된다. 이석기, 김재연 등 주사파 출신 비전향 6 명은 사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을 국회에 진출시킨 국민들도 또한 각성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