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성준 주간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황성준 주간 <미래한국>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인가? 너무나 당연해 보이던 이 질문에 대한 정답마저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교육과학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으로 삼으려 하자,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 20명 가운데 오수창 서울대 교수 등 9명이 사퇴를 표명한 것이다.‘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가 집필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정치권으로도 비화돼, 때 아닌 대한민국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을 보고, 놀라는 보수진영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솔직히 필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라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국사학계의 주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반(反) 혹은 비(非)자유민주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번 사건이 주목되는 것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의 본질은 잘못된 역사 교과서를 ‘자유민주주의’ 기준으로 바로 잡으려는 교과부의 노력에 대한 국사학계 주류(?)의 반발이었던 것이다. 현재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국사학계에서 비주류라는 점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인 것이다.

    광우병 난동현장에 울려 퍼졌던 ‘민주공화국’ 노래      
     

    지난 2008년 광우병 난동 현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문구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 심지어 ‘헌법 제1조 1항’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었다. 이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MB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자신들의 ‘난동’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교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헌법 제1조가 무엇인지를 알아 오는 숙제를 내며, 광우병 집회에 참석을 독려하기도 했다.

    분명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난동꾼들이 자신들만이 ‘국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점에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주장과 의지를 전체 국민들의 주장과 의지로 대체시키면서, 자신들의 난동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만이 ‘국민’이 아니며, 이들의 의사가 ‘국민의 의사’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선에 가득 찬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인식될 리는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만의 후보’를 ‘시민 대표’ 혹은 ‘시민 후보’라고 참칭하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니 누가 그들을 ‘시민 대표’ 혹은 ‘시민 후보’로 선출했단 말인가? 저들끼리 선출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시민’은 그들을 ‘대표’ 혹은 ‘후보’로 선출한 적이 없다.

  • ▲ 파리드 자카리아의  책 표지ⓒ
    ▲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의 미래> 책 표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개념의 혼란 속에서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ria)의 <자유의 미래>(The Future of Freedom)는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카리아에 따르면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헌정적 자유주의’(constitutional 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가 결합된 것으로서, 여기서 ‘헌정적 자유주의’란 ‘법치’(the rule of law)와 생명, 자유, 재산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의 보장을 의미한다.

    반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란 ‘헌정적 자유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다수의 권력’으로서, ‘군중 독재’ 현상을 일컫는 개념이다. 물론 이러한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오래 지속되는 예는 거의 없다. 이른바 ‘소비에트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혁명적 시기에 일시적으로 대중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결국 ‘1당 독재’ 혹은 ‘1인 전체주의’로 귀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소련의 1당 독재, 북한의 수령체제 등에서 잘 보여준다.

    비(非)자유 민주주의와 과잉 민주주의의 위험 

    또 자카리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헌정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상호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치 독일이 등장하기 직전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헌정적 자유주의’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원하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에 의해 압살되고, 이로써 나치즘이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헌정적 자유주의’의 뿌리가 굳건하지 못할 경우, ‘민주주의의 과잉’이 ‘민주주의의 부재’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자카리아에 따르자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및 목표는 ‘헌정적 자유주의’이며, ‘민주주의’는 이러한 ‘헌정적 자유주의’를 실현시킬 수단이며, 절차인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모임에 나갔더니 “아직도 이념 싸움을 하느냐”며 점잖게(?) 충고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념 문제’가 단순히 자장면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짬뽕을 좋아하느냐와 같은 ‘단순 선호도’의 문제이거나 형이상학적 지식인들의 ‘관념적 유희’라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수 있다. 아니 그러한 ‘관념적 유희’를 둘러싼 싸움이라면 정말 한심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냐의 문제는 단순한 ‘관념’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 문제는 ‘삶의 존재 양식’을 둘러싼 문제이다. 즉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꽃제비’가 될 것인가 라는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위 기사의 출처는 주간잡지 <미래한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