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주침략을 예견했던 독립운동가서간도 대한독립단 총참모․내몽고 항일운동 개척자
  • 의병활동을 하다 투옥되고, 다시 풀려난 뒤에는 간도와 내몽고 지역까지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 있다. 조병준 선생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조병준 선생(1862.10.2 ~ 1931.10.2)을 선정했다. 조병준 선생은 구한말 의병투쟁은 물론 서간도 대한독립단 지도자, 임시정부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 등을 역임했고, 내몽고 독립운동 개척자로서 폭넓게 독립운동을 이끈 분이다.

  •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1862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2년간 옥고를 치르다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조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켜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했지만 일제의 병력이 증강돼 더 이상은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된다. 선생은 결국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지방행정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에 89개 지단을 설치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썼으며,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기관인 광복군 참리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통의부 통의부장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일제의 만주침략을 예견하고 동지 및 가족 80여 명을 인솔하여 내몽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안창호 선생이 미주 동포를 통해 마련한 이주자금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농지 약 60만 평을 빌려 ‘배달농장’을 세웠다. 곧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립하였으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아울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선생은 이곳에 의민부를 설립하여 배달농장의 수입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1년 10월 2일 포두현 중탄에서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