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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9.0진도 대지진과 초대형 쓰나미로 수만 명의 인명 피해와 천문학적 경제적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인들로부터 ‘인류정신의 진화’라는 경이로운 칭송을 받을 정도로 침착한 일본인들이지만 후쿠시마 원전 고장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앞에서는 다소 흔들리는 모습이다.
방사능 유출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공동 위기이기에 일본 원전의 방사능 유출 위기는 원전 보유 선진국가들과 또한 새로이 원전 건설을 기획 중인 후발국가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장 독일은 1980년 이전 지어진 원전 7기를 모두 폐쇄키로 결정하는 등 발빠른 대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또한 원전의 안정성을 긴급 점검하고 27기의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잠정 유보키로 결정했다.
기후변화시대의 해결사로 화려하게 재등장한 원전 르네상스 시대가 위기를 맞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그러나 한국, 일본 등과 함께 원전 분야 4대 선진 개발국 가운데 선두 주자인 미국이나 프랑스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총체적 점검을 벌이겠지만 원전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국 원전의 안전성을 홍보하며 국제 원전 시장에서의 파이를 키울 태세이다.
특히 프랑스는 퀴리 부부가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원전에 관한 한 원조라는 자긍심을 가져왔지만 최근 원전 시장에서 미국과 일본에 밀림으로써 구겨진 자긍심을 이번 일본 원전의 방사능 유출을 발판으로 삼아 되찾으려 하고 있다는 분석도 받고 있다.
후발국가 가운데 중국 못지않게 의욕적으로 원전 건설을 기도하고 있는 인도 또한 싱 총리가 직접 나서서 안전 절차를 재검토하겠지만 원전 건설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상적인 전기 공급을 받지 못하는 국민들이 12억 명 가운데 거의 40%에 육박하는 열악한 전력 공급 상태에서 원전 건설의 중단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 역시 원전 건설의 백지화를 천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원전의 안전성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언뜻 단순하게 생각하면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이 불러온 전 지구적 위기의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원전 건설 중단, 나아가서는 기존 원전의 가동 중단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각국의 움직임은 앞서 언급했듯이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주목할 것은 원전 선진국이든 후발국가이든 간에 원전 가동이나 건설의 전면 중단을 외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 없이는 단 하루도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 현 국면에서 석유, 석탄 등의 탄소 에너지는 지구 온난화 위기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심각하게 배출할 뿐만 아니라 얼마지 않아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론,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태양열, 풍력 등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로는 전 지구가 요구하는 에너지를 몇십 년 내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인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상에 도전을 하며 발전해 왔다. 숱한 위기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위기는 발전의 새로운 기회가 되어왔다.
기후변화 시대 클린에너지로 각국의 주목을 받고 있는 원전 또한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안전성의 문제가 부각되며 위기를 맞은 듯하지만, 이번 위기 역시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시점에서 원전 정책의 중단이나 후퇴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물 샐틈 없는 안정성을 담보하는 새로운 원전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원전 르네상스시대의 주도권을 대한민국이 쥘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는 역발상의 측면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고 있다. 우리 원전도 과연 안전한가 하는 논란 속에서 일본 원전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 원전이 일본에 비해 안전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측면도 그 하나라 할 것이다.
또한 천안함 폭침, 연평도 민간인 폭격 등을 비롯한 범국가적 사안마다 날뛰던 유언비어도 이번에는 거의 맥을 못 추고 있는 측면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양치기 목동과 같이 '아니면 말고' 식의 유언비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BBC, CNN을 거짓 인용해서 '바람이 한국 쪽으로 부니 가급적 실내에 있어라'는 등 트위터, 블로그,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서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포 혐의자를 검거하는 등 조기수습에 나선 결과 더 이상의 유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 우리 국민들이 이런 유치한 유언비어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국가적 위기가 닥치더라도 성숙한 시민 정신으로 뭉친 국가는 이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기에 이번 우리 국민들의 침착한 대응은 매우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라 할 것이다.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목도하면서 정부와 원전 당국에게 강력 주문한다. 원전 르네상스 시대의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해서는 원전 반대의 목소리조차도 겸허하게 수용하고 안전성 대책을 마련하는 전진적 태도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원전의 안전성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절대명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모적인 논쟁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귀감으로 삼을 만한 사항을 두 가지만 붙인다.
하나는 2002년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자로 점검기록을 허위 기재하고, 균열 등의 문제점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귀감은 조직 간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안전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의 별도 기구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린피스의 공동 창설자인 패트릭 무어가 지난 2005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린피스는 원자력 기술의 이점과 파괴적 오용을 구분하는 데 실패했었다."고 반성한 사실이다. 반핵운동을 펼치던 대표적 환경단체마저 원전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그만큼 기후변화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의 일부 환경단체들이 귀감을 삼을 만한 대목이다.기후변화시대 위기 대처라는 인류 공통의 고민 해결은 무조건적 반대와 같은 단순 논리만으론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대안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재욱 전국환경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