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수연이 집에 왔을 때는 9시 10분이다. 아파트 앞까지 8시 45분에 도착했지만 놀이터에서 20분쯤을 뭉개다가 들어 온 것이다.

    열쇠로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더니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던 윤대현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돌려 TV를 본다.

    고수현도 어깨를 펴고 윤대현 앞을 지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 닫는 소리가 보통때보다 15%쯤 크게 울린 것 같다.

    「지구전이 되겠군.」
    TV에 시선을 준채로 윤대현이 입술만 달삭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먼저 흥분한다든가 또는 과장된 침묵 등의 행동을 한다면 바로 간파 당하게 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상대도 알고 있을 거다. 평상시처럼 자연스럽게 절대로 약점을 드러내면 안된다.

    심호흡을 한 윤대현이 어금니를 물었다.

    그때 세컨드룸이 벌컥 열렸으므로 윤대현이 초풍을 했다. 그러나 군에서 비상으로 단련된 몸이어서 겉으로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네, 잡채밥 특으로 하나요.」
    귀에 붙인 핸드폰에 대고 말한 고수연이 주방으로 다가가면서 말을 잇는다.
    「여기 비너스타운 11동 701호예요. 현관에서 인터폰 누르세요.」
    그리고는 정수기 앞에서 멈춰서더니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컵에 물을 받는다.

    윤대현은 TV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고수연은 음식점에다 잡채밥을 시킨 것이다. 그것도 저 혼자 처먹을 것 딱 한그릇.
    웃음이 터지려고 했으므로 표정은 그대로 유지한채 TV만 보았다.

    기쁘다. 느닷없이 돈벼락을 맞는다면 이런 기분이 될까? 윤대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고수연이 물잔을 들고 앞으로 지나갔다. 고수연의 머리 위쪽 벽시계가 오후 9시 35분을 가리키고 있다. 윤대현은 우두커니 고수연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다.

    아파트 정문에서 인터폰이 온 것은 그로부터 15분쯤 후인 9시 50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인터폰은 가까운 거실에 있던 윤대현이 받았다.

    「아, 예.」
    「아이구, 701호실이시죠?」
    정문 경비가 사근사근 묻는다.

    「예, 그렇습니다.」
    「저기, 여기 음식점 배달이 와 있는데요. 잡채밥 한그릇을 시켰다고 하셨는데.」
    「아아, 예.」

    윤대현은 심호흡을 했다. 될 수 있는 한 경비가 사납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친절해서 불만이 일어났다.

    그때 경비가 말을 잇는다.
    「저기, 모르고 계신 것 같은데 주민회의에서 9시 반 넘어서 음식 배달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왜 모르고 있겠는가? 윤상기가 주동이 되어서 잡상인은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출입금지를 시켜야 된다고 밀어붙인 결과가 이것인 것이다. 그래도 꼭 시켜먹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아파트 정문에서 음식을 받아가야 한다. 이곳에서 아파트 정문까지는 3백미터쯤 된다.

    그때 윤대현이 말했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 이야기를 주문한 사람한테 다시 해주시죠.」

    그리고는 윤대현이 세컨드룸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여기 정문 전화 받아! 음식 시킨 것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다는거야!」
    하고는 다시 TV 앞자리에 앉았을 때 세컨드룸에서 고수연이 나왔다.

    반바지를 입었는데 눈앞으로 다리만 지나가는 것 같다. 저러고 잡채밥 한그릇 받아먹으러 3백미터를 갔다 와야 할 것이다.

    아까 음식 시킬 때 이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