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그럼 다녀올게.」
    현관에 선 윤상기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동생 잘 봐, 알았어?」
    「아, 글쎄 염려 놓으라니까?」

    눈을 치켜 뜬 윤대현의 시선이 윤상기 옆에 선 박미주에게로 옮겨졌다.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잘 부탁해. 응?」
    하고 이번에는 박미주가 말했다.

    아침인데도 선그라스를 낀 박미주는 30대 같다.

    박미주가 윤대현 뒤쪽에 선 고수연에게 말했다.
    「수현아, 오빠 말 잘 듣고 응?」
    「알았다니까 그러네.」
    고수연의 대답은 부드럽다.

    그러자 박미주가 다시 윤대현에게 말했다.
    「집에 9시까지는 꼭 들어오게 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요.」

    그리고는 윤대현이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 그때서야 둘은 몸을 돌렸다.
    지금 둘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유럽을 일주하고 터키까지 들려 돌아오는 15일 코스였다.

    문이 닫쳤을 때 윤대현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 것을 느꼈다.
    다른 때는 안그랬다. 아버지가 출장을 떠나 혼자 남았을 때는 가슴이 개운해졌고 몸이 거위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 반대다.

    심호흡을 한 윤대현이 몸을 돌렸다. 고수연은 마악 제 방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야, 나 좀 봐.」
    하고 불렀더니 고수연이 문지방에서 멈춰섰다.

    시선이 곧고 강하다. 윤대현은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응접실 소파에 앉았더니 고수연이 잠자코 앞쪽에 앉는다.

    집 안은 조용하다. 벽시계 초침이 울리고 있다.
    오전 8시 25분, 오늘은 합가(合家) 한 다음 날이다.

    윤대현이 입을 열었다.
    「까놓고 이야기 하자. 난 처음에 너한테 아무 감정 없었어. 새 엄마가 온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고 새엄마한테 나보다 세 살 밑의 딸이 있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고 했어. 뭐 같이 살면 되겠지 했다. 군대서는 별 잡놈들하고도 같은 방에서 2년을 살았으니까. 근데 말야.」

    윤대현이 눈을 치켜뜨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너, 사람 잘못 봤어. 내가 어떤 놈인지 좀 알고 나서 그렇게 씨부렸어야지. 너 그날 나 처음 만났을 때 씨부린 것, 난 못봐준다. 니가 어떤 놈들하고 겪어왔는지 모르지만 난 종자가 다른 인간야. 아, 시발 짜증나는데 말 끝내지.」
    해놓고 윤대현이 눈을 부릅떴다.

    「너, 오후 9시까지 집에 들어와. 핑계 대면 죽을 줄 알어. 이건 니 엄마가 나한테 부탁한 사항이야. 글고.」

    윤대현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다.
    「지 밥은 지가 챙겨 처먹기. 처먹고 설거지까지 끝낼 것. 글고 빨래, 청소는 지가 알아서 할 것. 글고,」

    머리를 든 윤대현이 똑바로 고수연을 보았다.
    「집 안에서는 불이 났을 경우만 빼고 서로 말하지 말 것. 서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란 말야. 내가 홀랑 벗고 다닐 때도 있으니까 미리 알고 있도록.」

    그리고는 윤대현이 일어섰을 때 고수연이 머리를 들었다.
    「나도 참고로 미리 말하는데.」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고수연이 말을 잇는다.
    「홀랑 벗고 돌아다닐 경우에 즉각 119에다 신고 할테니까 미리 알고 있도록.」

    그리고는 고수연도 일어서며 말을 잇는다.
    「미친 놈하고 같이 있을 수는 없으니깐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