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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단련 (22)
박사과정 공부는 숨 가쁘게 이어졌다.
지도 교수 엘리엇(Elliot)은 그것이 학문의 시작이나 같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성취해야만 할 업적이었다.고국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는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또 다른 전쟁처럼 느껴졌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조바심과 걱정으로 벌떡 일어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었던 때가 마음이 더 편했다.
미국에 온 조선 유학생 대부분이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뭔가 이루어 들고 고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동포를 볼 것인가?
나는 이미 조선 통감의 지배하에 놓인 조선의 관직(官職)에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힘이 닿을 때까지 동포를 계몽하고 결집 시키리라. 그래서 하나로 뭉친 힘이 되어 일거에 화산처럼 폭발하리라. 그것이 내 목표였다.그러나 인간의 일상은 어떤 상황이든 간에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법이다.
하루코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데 안정제 역할을 해주었다면 윌슨 총장은 희망과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그것이 윌슨의 무의식적 행동이었을지라도 받아들이는 내 입장에선 그렇다.그날도 나는 윌슨 총장의 관사에 초대받아 가있었는데 손님이 많았다. 주 의원에 주지사, 멕시코 대사까지 초대된 파티였다.
「여기있군.」
하고 뒤에서 윌슨 총장의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긴장했다.몸을 돌린 나는 윌슨과 함께 다가오는 멕시코 대사를 보았다. 제복 차림의 대사는 비대한 체격에 윤기가 흐르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내 앞에 선 윌슨이 멕시코 대사에게 말했다.
「페르단데스씨, 이 분이 조선 황제의 사촌이신 이공이요.」
「아, 각하, 처음 뵙습니다.」정색한 대사가 부동자세로 서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으므로 나는 윌슨을 보았다. 윌슨의 한쪽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커졌지만 표정은 엄숙했다.
「반갑습니다 대사님.」
할 수 없이 먼저 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대사가 다시 허리를 굽혀 손을 잡는다.
「지금은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조선의 민중을 이끌어 갈 새 지도자시오.」
윌슨이 정색하고 말을 잇는다.
「그래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계시지요.」
「영광입니다. 각하.」
대사가 다시 정중하게 말했을 때 윌슨이 그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저 양반이야말로 정치인이 되어야 해.」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내 옆으로 다가서며 엘리엇 교수가 말했다. 뒤쪽에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엘리엇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보았다.
「고집이 있지만 포용력을 갖췄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냉혹하고 가난한자 편에서 있으면서 부자들의 친구야.」
내 시선을 받은 엘리엇이 말을 잇는다.
「양면성이 있지만 목표가 뚜렷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엇이 강의 할 때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가 본론을 말했다.
「대중을 동원할 줄 안다는 것이네. 언론과 여론을 이끌어 갈 능력이 뛰어나지.」우드로 윌슨은 존스 홉킨스대 정치학 박사 출신이다. 나는 물론이고 지도교수 엘리엇도 윌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때 내가 길게 숨을 뱉으면서 이렇게 엘리엇에게 말했었다.
「내가 오늘은 황제의 사촌이 되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