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때 만난 정수민이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천만원짜리 수표.」

    인사동의 한방 찻집 안이다. 김동수는 이곳이 처음이었지만 정수민은 단골이라고 했다. 녹차가 진품이라는 것이다.

    수표를 확인한 김동수가 주머니에 넣으면서 물었다.
    「영수증 달라고 안해?」
    「필요없어.」
    「너 왜이래? 집에 돈도 없다면서?」
    정색한 김동수가 나무랬다.

    정수민은 어머니하고 둘이서 전셋집에 산다고 했다. 10년쯤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부터 어머니가 보험 설계사로 일하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다 인간 컨테이너 일을 알바로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동수가 지나던 종업원에게 메모지와 펜을 부탁하고는 정수민을 쏘아보았다.
    「내가 이 돈 갖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너, 이러니까 소똥으로 만든 우황청심원을 사온 거야.」  
    「아,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정수민이 머리까지 저었다.

    7백만원을 주고 사온 우황청심원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마터면 정수민의 어머니까지 사기로 구속 될 뻔 했다.

    종업원이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다주었으므로 김동수가 영수증을 써서 내밀었다.
    「갖다가 어머니 드려. 어머니가 마음을 놓으실 거다.」
    「고마워 오빠.」
    「별 인사를 다 받네.」
    「근데 뭐 가져오는데 오빠가 직접 가?」
    「짝퉁 시계.」
    정수민한테는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김동수가 낮게 말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정수민이 다시 묻는다.
    「짝퉁 시계? 괜찮을까?」
    「다 손을 써 두었어.」
    「하지만...」
    「아, 걱정마.」

    손바닥을 펴 보인 김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최악의 경우에도 넌 손해보지 않을테니까. 내가 방금 영수증 써 줬잖어? 나한테서 원금은 받게 될테니까 말야.」
    「오빠 어떻게...」
    「우리 술이나 먹자.」
    하고 김동수가 화제를 돌렸으므로 정수민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좋아. 내가 오늘은 술 살게.」

    커피숍에서 나온 둘은 한정식 식당에서 밥과 찬을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신다.
    「근데, 오빠 애인은 몇살야?」

    문득 정수민이 물었을 때는 막걸리를 세 주전자째 시켰을 때였다. 정수민이 갑자기 생각 난 것처럼 물었지만 웃음 띤 얼굴의 눈빛이 강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나하고 동갑.」
    김동수의 입에서 저절로 그렇게 말이 나왔다. 박미향을 떠올린 것이다.
    「나 때문에 애인하고 만날 기회가 적어졌겠네. 그지?」
    「천만에.」

    술잔을 든 김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맨날 만나는데 뭐.」
    이제는 눈만 깜박이는 정수민을 향해 김동수가 말을 이었다.
    「우리 사무실 바로 옆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
    「오늘 점심때도 데이트 했는걸 뭐.」
    같은 회사 직원이라면 금방 누군지 알게 될 것이었다.

    벌컥이며 술을 삼킨 김동수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하긴 박미향 덕분에 이렇게 큰 작업을 맡았다. 박미향은 여러모로 이용가치가 큰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