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⑨ 

     그동안 하루코는 로노크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의 일본인 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있었다.

    숙소 근처의 식당 안이다. 하루코가 저녁을 사겠다면서 이곳으로 나를 끌고 온 것이다. 예약까지 해 놓은걸 보면 미리 준비를 한 것 같아서 내 가슴이 가라앉았다. 유창한 영어로 음식을 주문한 하루코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곧은 콧날, 단정한 용모에다 이제는 성숙한 체취가 풍겨났다. 

    하루코가 입을 열었다.
    「하버드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께 허락받기 위한 핑계였구요.」

    말을 그친 하루코의 눈이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둥근 얼굴에 둥근 눈이 본 순간 내 가슴도 따뜻해졌다. 얼굴 전체로 웃는 진정한 웃음은 상대방의 마음도 편하게 만들어 준다.

    하루코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어요.」
    「아버님도 며칠 전에 여기 다녀가셨어.」
    「들었어요.」

    물잔을 든 하루코가 다시 웃는다.
    「아마 아버지도 제 의도를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아카마스는 내 의도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집안에서 1천 3백년이 넘도록 조선어를 써온 조선인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다니.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아카마스는 백제인일 뿐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그리고 그 후의 고려, 조선 왕실에 대해서는 인연도, 미련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백제를 도우려고 전선 4백척을 보낸 일본국 왕실에 대해 더 호의적인지도 알 수 없다.

    그때 음식이 날라져 왔으므로 내 눈동자의 초점이 맞춰졌다. 오랜만에 먹는 정식 요리다.

    「이번 아버님 생신 파티에 오실건가요?」
    포크를 들면서 하루코가 물었다.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던 내가 시선을 내건 채로 대답했다.
    「공부가 힘들어서 워싱턴에 다녀올 여유가 생길 것 같지가 않아.」
    「태산이는 천국에 가 있을 거예요.」

    하루코가 불쑥 말하는 바람에 나는 잠깐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벼르고 있다가 말을 꺼낸 것이다.

    조각낸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나는 태산의 얼굴을 떠올렸다. 1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10년쯤 전의 일 같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금방 엊그제 일어났던 일처럼 가슴이 뛰더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벌써 잊었냐는 자책감이 가슴을 치면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다.

    그때 하루코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며칠간 울었어요. 태산이도 안됐지만 선생님이 불쌍해서요.」

    그 순간 내 얼굴에 갑자기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 불쌍하다는 표현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그러나 그 웃음 덕분에 스스로 평정을 찾은 내가 말했다.
    「위로 고맙군. 태산이가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는 덕담이 더욱...」     
    「선생님은 루즈벨트한테 농락 당하신 거죠. 보육원에 둔 태산이를 돌 볼 시간도 없이 애썼지만 말예요.」
    하루코의 표현이 과격해졌으므로 나는 긴장했다.

    내 시선을 받은 하루코가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인이죠. 하지만 전 아녜요. 전 그런 이중생활이 싫어요. 조선말 쓰는 일본인이 싫어요.」

    그리고는 하루코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