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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왠일이냐?」
하고 정기철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이유미는 먼저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반갑다기보다 두렵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남자는 지금까지 정기철 한사람 뿐이다.「응. 휴가 나왔다면서? 민화한테서 들었어.」
그래놓고 덧붙였다.
「내가 민화한테 부탁했거든.」
「그렇구나.」정기철의 목소리가 담담했기 때문에 이유미도 차분해졌다.
「지금 어디야?」
「대전.」
「거긴 뭐하러?」
「일 때문에.」
「언제 서울 오는데?」
「글쎄. 열흘쯤. 더 걸릴지도.」이유미가 시선을 들고 앞쪽 잔디밭을 보았다. 이곳은 도서관 앞 벤치여서 앞쪽에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나무와 시들어가는 잔디밭이 펼쳐졌다.
이미 끝난 사이라는 것이 실감되었으므로 이유미의 가슴은 더 가라앉았다.남자가 군대가면 대부분 갈라선다니 정기철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잊었다.
그런데 이제 넉달 만인가? 다시 목소리를 들으니 정답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졌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이유도 알고 싶어졌다.
「그러면 내가 그쪽으로 갈까?」
불쑥 그렇게 물은 이유미가 손바닥으로 볼을 쓸었다. 얼굴이 화끈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간적 또한 처음이다. 나쁜 놈.그때 정기철이 짧게 웃었다.
「야. 이유미답지 않게 왜이래?」
「이 나쁜놈아. 뻐기지마.」
이유미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섞여졌다.그러나 여전히 볼을 쓸면서 이유미가 말을 잇는다.
「어차피 또 헤어질 놈한테 내가 밥 한번 사면 안되니?」
「내가 밤에도 일을 해서 그래.」
「무슨 일?」
「벽지 바르는 일.」입을 다문 이유미의 귀에 정기철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아파트 공사 현장이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하거든.」
「......」
「내가 벽지 기술자라 하루에 20만원 받는다. 물론 야간 수당까지 합쳐서.」
「어딘데?」
하고 이유미가 말을 끊듯이 물었더니 정기철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유미가 그 사이에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정기철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회사에 다닌다는 것만을 말해주었을 뿐이다.
휴가 나와서 새벽까지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할 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단 말인가?「말 안할꺼야? 내가 점심때라도 그 잘난 낯짝 한번 볼수는 있지 않겠어?」
다시 이유미가 추궁하듯 말했더니 수화구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났다.「야, 끝난 사이에 이러지 말자. 걍 이렇게 좋게 끝내자.」
「우리가 뭐 했니? 끝나게?」
「그런건 없지만 네가 이곳까지 와서 날 만날 필요는 없다는거지.」
「아유. 알았어.」마침내 쓴웃음을 지은 이유미가 눈을 치켜뜨고 잔디밭을 보았다. 색이 바랜 잔디는 살풍경하다.
「그럼 열심히 일해.」
열심히 벽지 붙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말을 돌렸다.그만큼 평정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