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직(虛職)으로 내몰린 인고의 시간

    그러나 훗날 돌이켜보니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1972년 봄, 내가 해외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김 중장도 장 소장도 모두 군복을 벗은 후였다. 그리고 김 중장은 곧 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귀국과 동시에 사단장을 시켜준다는 언약을 받고 해외에서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군에 복귀했으나, 국내에 돌아와서 육군참모총장 지휘 하에 들어가 보니 사정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단장 자리는 계속 나왔으나, 후배들이 내 차례를 넘어 사단장으로 나가고 있었다. 6년 전에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 임기를 끝내고 돌아와서, 무보직 상태에서 오랫동안 칩거하던 불우했던 시절과 똑같은 현상이 이번에도 되풀이 되었다.

    내가 육군본부로 복귀한 것은 1972년 3월 16일었으며, 그 후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와도 참모총장은 나에게 보직을 주지 않았다. 무보직 생활이 6개월이나 흘렀다.

    1972년 9월14일, 참모총장이 뜻밖에도 나를 집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 사단장 자리가 나는 대로 보직 발령을 내줄 터이니, 그때까지 우선 제6군관구 부사령관으로 가있으라고 하면서 9월 15일부로 보직발령을 냈다. 군관구 부사령관이라는 직책은, 그 당시까지의 관례로 보아 한물 간 빛바랜 장군이 예편을 앞두고 물이나 마시면서 앉아있는 정말로 별볼일 없는 희미한 자리였다. 그런데다가 더구나 제6군관구에는 이미 부사령관이 보직되어 있었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참모총장인 대장이 앞으로 사단장 자리가 나는 대로 발령을 내준다고 했으니 믿고 감사하게 여겼다.

    9월 15일, 제6군관구에 부임했다. 군관구 부사령관이 두 명이 되었으므로 한 사람은 행정부사령관, 또 한 사람은 작전부 사령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는 작전부 사령관이 됐다. 허직(虛職)이지만 보직 명칭만은 그럴듯 했다. 약 2개월 반 근무하고 있는데, 사단장 자리가 여러개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사단장이 되는가 하고 참모총장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허사였다. 나보다 까마득한 후배까지도 나를 뛰어넘어 사단장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나는 참모총장 R 대장의 언약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서울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며 불우한 사람들의 심기를 달래주더니 또 한 해가 가고 1973년 새해가 왔다. 1월 두 번째 주로 기억되는 어느 금요일 밤, 제6관군구 사령관 방경원(房景源) 소장의 친구가 나와 방 소장을 어느 술집으로 초대했다. 술은 소외된 사람, 외로운 사람, 불우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슬픈 사람들을 달래주며 따뜻한 벗이 된다.

    나는 집안이 불우해서 술집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한복 입은 미모의 기생아가씨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마시고 또 마셨다. 아마도 평소 주량의 10배쯤 폭음을 한 것 같다. 나중에는 기생아가씨가 내가 죽을까봐서 위스키 병을 치워버리는 판국에까지 이르렀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 부부의 꿈 속에 동시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

    지프에 실려 집에 돌아와서 많이 토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현기증과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아직은 젊음이 남아 있어 아침을 굶고 관구 부사령관실에 출근하여,  비상 침대에 누워서 군의관을 불러 링거주사를 맞았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굶으며 누워 있었고, 밤에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새벽 네시경에 꿈을 꾸었다.

  • ▲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 연합뉴스
    ▲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 연합뉴스

    꿈속에서 서울 시청 근처의 큰 중국 음식점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누런 삼베 상복을 입은 상제들이 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문간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안쪽에는 검은색 칠을 한 위에 금색으로 용을 그린 관이 놓여있고, 귀인들로 보이는 조문객들이 그 주위에서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내 옆에는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박정희 대통령이 서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던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 장군, 왜 여기와 있나?”

    한 박자 뜸을 들이고 나서, 박 대통령은 “임자 걱정말아. 내가 도와주고 가지”하고 말을 끝냈다.
    나는 박 대통령의 물음에는 대답도 못하고 “각하, 어떻게 각하께서 여기에......?” 하면서 깜짝 놀라 꿈을 깼다.

    옆에 누워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꿈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내 이야기를 듣다가 “어머나!” 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도 똑같은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을 꿈속에서 만났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아내에게 이대용 장군의 부인이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고생이 많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도움을 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하였다. 부부가 똑같은 시간에 꿈 속에서 똑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내가 종교적 신앙심이 깊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내의 꿈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차원 높은 신비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바깥은 어두웠으나 어제 내린 눈이 10센티미터 이상 쌓여있어 먼동이 트는 것 같이 훤해 보였다. 잠은 다 달아나고 머리는 더욱 맑아지는 가운데 그럭저럭한 시간이 지나갔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때 아닌 전화벨에 의심스럽고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수화기를 들었다. 제6군관구 사령관 방경원 소장의 전화였다. 오늘 아침 7시 30분에 남서울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예약해 놓았는데, 1개조 세명 중 한명이 갑자기 못 가게 되어 팀 구성원이 부족하니 대타로 나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세 끼를 굶으며 링거주사를 맞는 처지에 골프 치는 것이 무리라면서 거절했으나, 방 소장은 그럴수록 골프를 쳐야 주독이 말끔히 빠지고 건강이 속히 회복 된다면서 자꾸만 졸라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방 장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른하고 허기진 몸으로 지프에 오른 나는, 차 안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여러 번 했다. 남서울 골프장 페어웨이에는 흰 눈이 10센티미터 이상 두둑하게 고루 쌓여 있었다. 빗자루를 가진 캐디 한 명을 더 고용해서 앞쪽으로 내보내 공이 떨어지는 지점을 잘 보게 했으나, 자기가 친 공을 수도 없이 많이 잃어버리고 대신 남이 잃어버린 공을 많이 주웠다.

    우리 팀이 제12번 티그라운드에 올라가는데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김진만 의원, 정재호 회장과 함께 제11홀 그린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 팀 뒤에는 박종규, 차지철, 그리고 낯모를 한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 팀은 박정희 대통령 팀을 먼저 통과시키려고, 티그라운드에서 내려와 길 옆에서 기다렸다. 박 대통령이 우리 팀 있는 곳으로 오자 방 소장과 나는 거수경례를 하고 민간인은 허리를 90도쯤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 ▲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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