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탄강의 얼음이 봄비에 풀려 상류쪽에서 흘러내려오는 흙탕물에 섞여 수위를 높여가던 어느날, 나는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全谷)에서 간단한 짐을싸 군용 지프로 서울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민간버스에 몸을 싣고 진해로 향한 것은 1955년 2월 25일 오후였다.

    ◆ 명장(名將)의 그릇이 되기 위해 떠나는 길

    그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도로는 모두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여서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보얗게 일어났으나, 그 날은 노면에 습기가 좀 남아 있어서인지 먼지는 나지 않았다. 낡은 버스는 시속 약 30킬로로 덜커덕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길가의 보리밭에는 파란 보리 싹들이 탐스럽게 자라났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아낙네들이 나물을 캐고 있었다. 짝을 이룬 까치들은 부지런히 그들의 건축자재를 산란(産卵)의 보금자리로 물어 나르고 있었다.

  • ▲ 한국대사관 무관 시절 월남군 총사령관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 한국대사관 무관 시절 월남군 총사령관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만물이 소생하며 꿈을 가지고 약동하는 봄이다. 오래간만에 희망에 찬 가슴이 뛰고 있다. 되돌아보면 1950년 6월 25일, 남으로 밀어닥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남쪽의 젊은이들은 울려퍼지는 포성과 함께 미래에 대한 무지개 꿈을 모두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흥망의 기로에 선 자유조국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친다”는 일념으로, 청춘의 몸을 초개같이 여기며 전선에 나가 싸웠다.

    중생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대자연의 법칙은 변함이 없었다. 지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며 계절의 순환은 반복되고, 해는 거듭 바뀌고 있었다. 눈 녹은 전선에 봄이 와서 꽃이 피면 저 꽃이 떨어지기 전에 내 목숨이 먼저 떨어질 것인가, 그리고 가을 단풍잎이 곱게 물들면 저 단풍잎이 초겨울 땅 위에 뒹굴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뒹굴게 될 것인가 하는, 전선 특유의 정서를 갖고 젊은이들은 벼랑 끝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도 전선의 잔상(殘像)은 한동안 젊은이들의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평온을 되찾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약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나에게도 마음의 봄, 계절의 봄이 함께 찾아 온 것이다.

    신생국 군대라서 계급은 중령으로까지 올라가 있었지만, 내 나이는 아직도 만으로 29세 3개월의 젊은 몸이었다. 1946년 늦가을 서울에서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갈때 까지만 해도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제세구민의 뜻을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치적 현실은 그런 꿈을 무참히 앗아가 버렸다. 자유의 불모지대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골수에 사무치게 느낀 나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 땅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의 간성이 됐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러나 명이 하늘에 닿아 살아남았고, 이제 전쟁은 일단 끝이 났다.

    이 시점에서 나의 꿈은, 일선의 전투경험에 학술적인 최신식 군사지식을 더해서, 이 나라의 군사선구자인 명장(名將)의 그릇이 되는 것이었다.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군사대학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야 한다.

    미국 훠드레븐 월스에 있는 육군지휘참모대학은 국제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유명한 군사대학이다. 그 대학에의 유학시험은 1년에 한 번씩 있으며, 한국군 영관급에서는 매년 세 명에서 네 명이 선발되어 유학을 가고 있었다. 수천 한국대사관 무관 시절 월남군 총사령관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명의영관급 장교 중에서 그렇게 적은 수의 인원을 선발하니, 유학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몇 년간을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 미친 듯이 책과 싸워야 한다. 나는 그 시험에도 전하는 꿈을 갖기로 했다. 나의 꿈과 몸을 실은 버스는 진해읍에 들어섰다.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흩어져 있는 거리의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달리던 버스는 육군대학 앞에 서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 1/3만 졸업할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육군대학에서의 생활

    1955년 2월 28일, 나는 육군대학 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육군대학의 교육절차와 졸업절차는 좀 특수했다. 최초에 150명의 학생을 입교시켜 4개월 교육을 시킨 후, 성적이 나쁜 100명에게는 그때까지 이수한 증서를 주어 탈락시켜 각 부대로 내보냈다. 성적이 상위권인 50명만 4개월 더 추가 교육을 시켜 8개월 교육을 끝내고 졸업시키는 교육과정을 채택하고 있었다.

    육군대학교육이 시작된지 며칠 있다가 첫 시험이 있었다. 첫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학교당국에서 특별히 성적발표를 했다. 100점 만점을 받은 학생이 두 명 있었고, 60점 이하의 낙제점수를 받은 학생도 20여명이나 되었다. 그 후 약 2개월 반 동안은 성적발표가 없었다. 나는 첫 시험에 100점 만점을 받았으므로 육군대학 공부는 대충대충 적당히 해도 상위권인 50등 이내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읍내 영어 강습소에 등록하고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밤마다 나가서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영어로 된 작전요무령(作戰要務令) 등의 원서를 가져다가 밤늦게 까지 읽으며 영어공부에 열중했다. 미국육군지휘참모대학 유학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입교한지 2개월 반쯤 되는 어느 날, 그간 치른 육군대학 학생들의 시험결과를 학교 당국이 발표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내 성적은 상위권을 훨씬 벗어나서 중위권 이하로 곤두박질해 있었다. 앞으로 비상한 노력이 없는 한, 1개월 반이 지나면 육군대학에서 성적미달로 쫓겨날 형편이었다.

    숙소로 돌아가서 결혼 한지 몇 개월 안 되는 아내에게 성적통지표를 보여주었더니 아연실색을 했다. 이때부터 영어공부를 집어치우고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육군대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수면시간은 하루에 3시간 반이었다. 한 달 반이 가고 탈락여부를 알려주는 학교당국의 종합성적 발표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함을 뜯고 속에 접혀있는 성적표를 꺼냈다. 만일 상위권에 재진입을 하지 못했다면 짐을 싸서 4일 후에 육군대학을 떠나야 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접혀있는 성적표를 폈다. 아!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성적은 50등까지의 상위권에 넉넉히 들어가 있었다.

    선발된 50명의 후반기 교육이 시작되자 나는 영어 공부를 또다시 시작했다. 영어공부와 육군대학공부의 비중을 반반으로 하여 어느 쪽에도 편중하지 않는 방법을 썼다. 8개월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나는 육군대학 교관으로 남게 되었다. 육군대학총장은 이종찬(李鍾贊) 중장이었다. 그분은 돈에 대하여 깨끗하고, 부정을 배격하는 청직(淸直) 정신이 투철했으며, 모든 일을 소신을 갖고 단행하는 용기 있는 장군이었다.

    1952년 그분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대통령직선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이 대통령과 야당 국회의원들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대통령은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개헌 반대 야당국회의원들을 구속하여 물리적으로 개헌을 강행하려했다. 그래서 육군 1개 사단을 일선에서 빼내어 부산에 계엄군으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신태영(申泰英) 국방장관을 통하여 육군참모총장에게 내렸다.

    이종찬 중장은 그런 부당한 명령은 취소되어야 한다면서 단호히 거부했다. 일선에서는 병력부족으로 현재 힘겨운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데, 전투중인 1개 사단을 빼내면 일선 작전에 큰 지장이 생긴다. 또한 신성한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는 군을, 국내 정치판에 개입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그분의 소신이었다. 이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방법으로 개헌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이종찬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직에서 해임하여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을 떠나게 했다. 이종찬 중장은 1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육군대학총장으로 부임했다.

    나는 이종찬 중장을 존경했으며, 그분을 눈앞에 모시고 일하는 것이 매우 기뻤다. 육군대학 강의실에서 장군학생들을 위시한 고급장교 학생들을 앞에 놓고 강의하는 것도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또한 미국육군지휘참모대학 유학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하루에 네 시간 정도의 수면시간으로 버티며 열심히 공부했다.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을 때는 점심시간에 약 40분간의 단잠을 잤다. 참으로 즐겁고 값있는 교관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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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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