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30)

    「이공 아니시오?」
    뒤에서 들리는 조선말에 놀란 나는 몸을 돌렸다.
    아카마쓰 다케오가 웃음 띤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이강과 딘스모어 일행과 헤어져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내 뒤를 따르던 김일국은 어느새 군중 사이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아카마쓰가 내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을 때 나는 그의 뒤에 붙어선 여자를 보았다.
    흰색 드레스 차림에 역시 레이스가 달린 흰 모자를 쓴 동양 여자, 검은 눈동자가 부딪친 순간 긴 속눈썹이 창문을 닫는 것처럼 내려졌다.

    「아니, 여긴 웬일이십니까?」
    하고 아카마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으므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 헤리스씨를 아십니까?」
    「예, 조금.」

    그렇게 어물거렸을 때 아카마쓰가 몸을 돌려 뒤에 선 여자를 소개했다.
    「내 딸 하루코올시다. 로노크 대학(Roanoke Collage)에 다니고 있지요.」
    그러더니 여자에게도 조선어로 말했다.
    「하루코, 인사해라. 조선에서 오신 이공이시다.」
    「하루코입니다.」
    하루코가 허리를 꺾고 절을 했으므로 나는 당황했다.
    「이승만입니다.」

    안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으므로 아카마쓰는 옆쪽 베란다로 나를 안내했다. 바깥 공기가 찼지만 넓은 베란다에는 10여명의 남녀뿐이었다.

    아카마쓰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이공께서 만나시려는 딘스모어씨도 와 있을 겁니다. 내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아닙니다. 됐습니다.」
    「어쨌든 헤리스씨한테서 벌써 초대를 받으시다니 놀랍습니다.」
    「초대는 받았지만 아직 인사도 못했습니다.」
    「인사를 해도 금방 잊어버릴 겁니다.」

    그러더니 아카마쓰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짓고 나에게 말했다.
    「전 잠깐 누굴 만나고 올 테니 내 딸하고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아카마쓰가 이제는 하루코에게 말했다.
    「네가 이공이 적적하지 않으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몸을 돌린 아카마쓰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나는 시선을 돌려 하루코를 보았다.
    하루코의 검은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동그란 얼굴, 곧은 콧날에 단정한 입술, 어딘지 도도한 분위기가 풍기는 미인이다.

    그때 하루코가 시선을 준채로 묻는다.
    「조선 황제의 밀서를 갖고 오신 분이시군요? 같은 배를 타고 오셨다고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조선말을 잘 하십니다.」

    내가 화제를 바꿨더니 하루코가 머리를 끄덕이며 받는다.
    「집 안에서는 조선말을 씁니다. 이것이 천여 년 간 내려온 저희 가문의 전통이죠.」
    「천여 년이나.」
    「정확히 계산하면 1천3백년쯤 되었습니다. 저희 조상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으로 건너 왔으니까요.」

    말문이 막힌 나는 시선만 주었고 하루코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 조상 중에 일본인이 섞이기도 했지만 조선말은 지켜져 내려왔지요. 가족이 된 일본인은 조선말을 배워야 했습니다.」

    나는 하루코의 야무진 입술을 본채 숨을 죽였다.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세차게 뛰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