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28)

     다음 날 오전 11시경이 되었을 때 이강이 다시 내 숙소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김일국과 동행이었다. 소파에 앉은 이강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다.

    이강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김윤정의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공의 운이 더 강하신 것 같소.」
    「어찌 그렇습니까?」

    이제는 나도 이강에 대한 친근감이 우러나 있다. 
    이강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급 권련이다. 뒤에 서있던 김일국이 재빠르게 성냥을 그어 담배 끝에 불길을 대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품고 난 이강이 말을 잇는다.
    「김윤정은 이미 이공이 밀서를 가져왔다는 것을 아카마쓰한테 보고했을 것이오.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부터 대한제국 공사관은 일본대사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같으니 보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다시 담배연기를 뱉은 이강이 이제는 그늘진 얼굴로 나는 보았다.
    「이공, 아카마쓰가 이공을 그냥 보낸 이유가 뭔지 아시오?」
    「이제 황제의 밀서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이공과의 인연 때문이오.」

    쓴웃음을 지은 이강이 말을 잇는다.
    「우리는 김윤정이 기껏해야 일본인 암살자 서너 명을 데려올 줄로 예상했던 거요. 아카마쓰가 10여명이나 되는 수하를 데려올 줄은 몰랐소.」
    과연 아카마쓰하고 안면이 없었다면 나는 어젯밤 살해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는 딘스모어를 만나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펜실바니아 거리의 루이스 저택으로 오시오.」
    정색한 이강이 말을 잇는다.
    「철강업자 제임스 루이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딘스모어가 초대를 받았으니 만날 수가 있을 거요.」

    이강이 눈만 껌벅이는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내가 이공의 초대장도 한 장 더 얻어 놓을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시오.」
    그리고는 뒤에 서있는 김일국을 눈으로 가리켰다.
    「오늘 미스터 김하고 같이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두시오.」

    그리고는 이강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따라 일어선 내가 물었다.
    「저하, 어떤 준비 말씀입니까?」
    「옷차림.」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이강이 정색한 채 말을 잇는다.
    「이곳 사교계는 까다롭소. 동양인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하.」
    「미스터 김한테 다 맡겼으니 이공께선 따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몸을 돌렸던 이강이 시선만을 이쪽으로 보낸 채 생각난 듯 말했다.
    「아마 아카마쓰 영사나 일본 관리를 파티 석상에서 만날지도 모르겠소. 여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발을 뗀 이강이 혼잣소리처럼 말을 잇는다.
    「지금 일본과 전쟁 중인 러시아 대사관 직원들도 참석하겠지요.」

    이강을 배웅하고 돌아온 나에게 김일국이 말했다.
    「나으리, 왕자 저하께서 옷과 구두 값을 주고 가셨습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내 시선을 받은 김일국이 말을 잇는다.
    「왕자께서 주색에 빠져 물 쓰듯이 버린다는 돈이 이렇게 쓰이는 것이지요.」

    나는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